구서독은 자유로웠으나 구동독은 북한 ‘5호담당제’처럼 감시
노동관도 자아실현의 한 방편 VS 집단을 위한 희생 달라

사회통합 현장을 가다(4) -브란덴부르크문 방문기-
최승호 충북연구원 선임연구위원

한반도가 분단된 지 반세기를 훌쩍 넘겼지만 교류와 협력이 늘어나고 평화가 공고해지는 것이 아니라 날로 대립과 갈등만 격화되는 거꾸로 가는 역사를 쓰고 있다. 머나먼 유럽과 북미는 자유로이 오갈 수 있지만, 몇 시간이면 갈 수 있을 북녘 땅은 서슬 푸른 철책으로 가로막혀 있다. 최근 공동경비구역(JSA)을 통해 귀순한 북한군 오모(24) 하사의 사연도 과거와 달리 머나먼 나라 이야기처럼 들리는 것은 나만의 느낌일까? 북에서 수시로 쏘아대는 대륙간 탄도미사일도 그저 일상처럼 느껴지는 것은 안전불감증일까?

통일을 이루어야 하는 당위성은 공감하면서도 한민족 동질감은 점점 멀어져 가는 느낌이다. 장기간 다른 이념을 가진 국가체제로 살아오다가 정치, 경제적 통일을 이루고 사회문화적 통합까지 이루기는 쉬운 일이 아니다.

우리에게 통일 독일의 경험은 아주 좋은 사례로 언급된다. 1989년 통독 이후 90년대 구서독과 구동독 두 도시에서 유학시절을 보낸 필자로서는 누구보다 일상에서 통일의 사회적 현실, 구체적으로 보자면 구동독민과 구서독민의 가치기준과 문화적 성향, 라이프 스타일이 다름을 피부로 느낄 수 있었다. 직접 경험한 에피소드 몇 가지를 소개한다.
 

브란덴부르크문. 독일 베를린의 상징으로 한때 서 베를린과 동 베를린의 경계선이었다.

‘동쪽 것들’과 ‘서쪽 것들’ 서로 폄하

필자가 몸담았던 구동독지역의 대학교 기숙사에서 구동독 학생 둘이 나누는 대화는 개그 같아 보였다. 머리 세정제인 ‘린스’를 두고 머리를 감기 전에 바르는 것인지, 감고 난 후 바르는 것인지 언쟁을 벌이고 있었다. 코카콜라, 햄버거, 팝송 같은 용어도 그 당시 구동독민에게는 생소한 용어였다.

또한 당에서 정해주는 직업대로 살아 온 사회에서 실업이라는 단어는 감내하기 힘든 상황이었고, 직장에서 해고되어 집세도 못 내고 거리로 나앉을 수 있다는 위기감은 구동독민에게는 일찍이 경험해 보지 못한 충격이었다.

당시 필자는 통일문제에 관심이 많아 주변 사람들에게 구동독 시절과 통일 이후생활의 변화를 자주 물어보곤 하였다. 베를린 종교단체에서 만난 구동독인은 통일 후 관공서에서 컴퓨터 웹분야 보조업무를 하고 있었는데 통일 전에는 트럭 기사, 판매, 행정보조 등의 직업을 가졌다고 했다. 이전의 직업들이 서로 연관성이 없는 점이 의아하여 반문하니 전문성이나 개인의 바람과는 상관없이 당에서 정해주는대로 했을 뿐이라고 담담하게 대답했다.

외국인을 대할 때도 양극단의 반응을 경험했다. 한 번은 관청의 위치를 몰라 주변에서 헤맨 적이 있다. 지나가는 구서독 젊은 친구에게 물어보니 같이 가자며 10분 정도 걸어서 해당 장소로 인도해 준적이 있다. 당신도 이쪽 방향으로 가는 길이냐고 물어보니 아니라며 왔던 길을 다시 돌아가야 한다고 하여 고맙고도 미안했던 적이 있다.

그런가하면 또 다른 경험은 박사과정 수업에서 자주 보는 동료가 있었는데, 학교 식당이나 시내에서 마주치면 안면몰수를 하는 것이 아닌가? 이해가 되지 않아 같은 기숙사를 쓰는 구동독 학생에게 이런 사실을 털어놓으니 그럴 수밖에 없다며 이해하라는 식이었다. 이전 구동독 시절에는 북한의 5호담당제처럼 가족 이외의 외부인에게 말을 잘못하면 고발을 당하여 당 차원에서 자기비판과 처벌을 받아야 하는 감시사회에 살았기 때문이라고 하였다.

일상적인 생활세계에서나 노동시장에서 양 독일인의 행동양식은 분명한 차이가 있었다. 구서독사람들은 구동독사람들에 대해 대인관계가 미숙하고, 권위에 약하며, 수동적인 태도, 자립심 부족, 관에 의존하는 습관이 배어있고 권위주의적인 교육 방식, 차이를 인정하지 않는 집단주의에 젖어있다고 비난한다.

반면 구동독사람들은 구서독사람들에 대해 거만하여 잘난 척하며, 이기적이고 의심이 많고, 팀워크와 상대방의 감정을 헤아리는 능력도 없고, 인정도 없고, 감정을 겉으로 드러내지 않고, 자기 약점을 털어놓지 않으며 공동체를 위해 행동하는 법이 없다고 비난한다. 두 지역 주민간의 상호불신과 갈등이 이렇게 깊었다. 이러한 관계는 오씨와 배씨 즉 ‘동쪽 것들(Ossis)’과 ‘서쪽 것들(Wessis)’이라는 단어로 서로 폄하하여 회자되기도 하였다.
 

이스트 사이드 갤러리(East Side Gallery). 1990년 독일 베를린 장벽 일부에 세계 각국의 미술 작가들이 그린 105개의 그림으로 구성되어 있다. 1.3km 규모의 세계에서 가장 길고 오래된 야외 공개갤러리이다.

다가오는 통독 30년, 괴리 많이 좁혀

서로 다른 양 체제가 갖고 있던 노동관과 노동문화를 비교해 보면 이러한 차이와 갈등, 상호 이해 부족이 분명해 보인다. 구서독인에게는 노동이 사회적인 자아실현의 한 방편이며 사회적 성공의 의미라면, 구동독인에게 노동은 도덕적인 의무와 동일시되고 집단을 위한 희생과 헌신을 의미한다.

또한 육체적으로 힘든 일이나 물건을 생산하는 일 등이 진정한 노동으로 보였으며 초과근무와 잔업을 미덕으로 여겼다. 일 자체의 재미나 급여 수준, 승진 가능성 등의 직업 만족도보다는 직장 내 복지시설과 직장 동료 사이의 인간관계 등을 중요한 변수로 여겼다. 일을 하지 않는다는 것은 사회생활의 윤리와 규범에 위배되는 것이며, 노동만이 인간을 인간답게 만드는 본질적인 요소라는 체제의 이념을 공유하고 있었다.

통일은 ‘호모 소비에티쿠스’에서 ‘호모 이코노미쿠스’로의 변화를 요구한다. 사회주의 노동윤리에 따르면 재화는 필요에 따라 공동분배 되는 것이나 자본주의 기업가 정신은 재화의 능력에 따른 분배를 요구하는 것이다.

사회통합의 어려움은 ‘마음의 벽’ 또는 ‘한 국가 내 두 사회’라는 상징적 표현에서 단적으로 드러난다. 구동독 지역의 경우 선거 때마다 좌파당이나 극우정당(AfD)에 상대적으로 많은 표를 던지는 것도 구동독민의 소외감이 작용한 결과라 할 수 있다. 40년 동안 서로 다른 체제에서 살아온 양독 주민들이 하루 아침에 서로를 이해하기는 불가능하다. 그럼에도 한 세대가 지나가는 통독 30년이 다가오는 시점에서는 문화적 괴리감이 많이 좁혀진 듯하다. 메르켈 총리를 비롯하여 몇 해 전 물러난 요아힘 가욱 독일 대통령, 독일 대표 축구 스타 발락이 구동독 출신인 것을 보면 한국의 남북관계처럼 절대적 거리감이 존재하는 것은 아님을 알 수 있다.

요아힘 가욱 전 대통령의 한국 초청 방문 시 “만약 남북통일이 된다면 북한 출신 대통령을 인정할 수 있느냐?” 라고 던진 질문은 의미하는 바가 크다. 남북한 사이에 존재하는 거리감을 고려할 때 누구도 긍정적인 대답이 어려울 것이다. 결국 자주 만나서 대화하고 교류하며 선입관 및 그 간격을 좁히는 수밖에 없다. 대립과 갈등이 아니라 상호 이해의 폭을 넓혀나가야 하는 것이 통일을 맞이하기 전 필수적인 과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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