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84부대원들이 자폭한 버스는 아수라장이었다. 총알과 수류탄 파편으로 벌집처럼 구멍이 뚫린 버스안에는 사람의 살점이 여기저기 무수하게 붙어 있었다. 버스바닥에는 핏물이 흥건하게 흘러내렸고 손목시계의 가죽끈이 덜렁대는 한쪽 팔이 구멍뚫힌 버스천정에 매달려 있기도 했다. 24명의 대원 가운데 19명이 현장에서 즉사하고 숨이 붙어있던 5명을 공군항공의료원으로 후송했으나 1명은 응급조치 과정에서 절명했다. 결국 20명의 부대원들은 훈련과정에서 익힌대로 그렇게 스스로 목숨을 끊었고 4명은 군사재판을 거쳐 사형대에 서게 된다.
전대미문의 사건에 대해 당시 야당이었던 신민당은 내각 총사퇴를 요구하며 정치공세를 펼쳤다. 청와대 박정희대통령은 사건보고를 접하고 대노했지만, 684부대의 창설 책임자였던 김형욱 중앙정보부장이 물러나고 이후락 부장으로 교체된 상황에서 직접 책임을 묻기도 곤란했다. 결국 정래혁국방장관, 김두만 공군참모총장등을 문책경질하면서 정치권의 논쟁은 수그러들기 시작했다. 사실상 공군 김총장은 억울하게 유탄(?)을 맞은 경우였다. 중앙정보부에 의해 특수목적으로 창설된 부대를 비밀리에 공군 관리책임으로 두는 바람에 난데없는 덤터기를 쓴 셈이었다.
또한 공군정보부대장인 K대령, 공작과장 L소령, 인천 파견대장 겸 실미도 파견대장이었던 H중령이 군보안부대에 전격 구속돼 군사재판에 회부됐다. 국기를 뒤흔든 총기난동사건의 생존자인 684북파공작원 4명도 고도의 보안속에 치료를 끝내고 서울 대방동의 공군교도소에 수감됐다. 이들은 사형선고를 받고 형이 집행되기까지 7개월간의 수감생활동안 낮시간에 단 한번도 눕거나 벽에 기대는등의 흐트러진 자세를 보이지 않았던 것으로 알려졌다. 군교도소측은 이들에 대해 일체의 외부노역을 제외시킨채 격리수용했고 다른 군죄수들은 이들의 사방을 지날 때면 부동자세로 목례를 하는등 신경을 곧두세웠다는 것.
사실상 민간인 신분인 이들이 군교도소에 수감되고 군사재판을 받는 자체가 불법이었다. 정부의 왜곡된 발표에 따라 모든 언론이 ‘군특수범’으로 오보를 내면서 일반인들의 여론 또한 최악이었다. 재판은 철저한 통제속에 일사천리로 진행됐다. 피의자 신분인 훈련대원 4명은 인적사항도 공개하지 않아 가족들조차 없이 재판정에 서야 했다. 당시 현역 대위였던 주심판사는 민주당 대권후보로 나섰던 김중권의원이었다. 김방일교관은 공군 정보부대 관계자들의 목격담을 통해 이들의 교도소 수감생활과 재판진술 내용들을 간접적으로 확인했다.
“당시 군보안부대에서 작성한 피의자 심문조서가 1200페이지 분량이었다고 한다. 피의자로 조사를 받은 대원들은 비굴하게 목숨을 구걸하거나 하지 않았다고 들었다. 이미 사형을 면키 어렵다고 판단했을 테고…, 아마도 체념한 심정으로 조사와 재판에 임했을 것이다. 군교도소에서도 하루종일 흐트러짐없이 독서로 시간을 보냈다고 한다. 조사과정에서 자신들이 민간인 신분에서 공작원으로 포섭되어 선발되기까지 과정과 훈련생활, 동료들이 하나씩 죽어가야만 했던 암울한 나날들을 솔직하게 털어놓았다고 한다. 결국 침투작전이 취소되고 자신들의 존재이유가 없어지자, 이대로 버려진채 잊혀질 수 있다는 두려움 속에 무장탈출을 시도했고, 중앙청이든 청와대든 높은 곳을 찾아가서 억울함을 하소연해보고 죽자는 생각에서 무장난동을 벌였다고 법정진술한 것으로 알려졌다”
이듬해인 1973년 3월, 매운 봄바람이 채 가시기 전에 684부대원, 북파 공작원 4명에 대한 사형이 집행됐다. 이들은 사형장에서도 ‘대한민국 만세’를 외쳐 참관인들을 숙연하게 했다는 후문이다. 무장난동사건 발발 7개월만에 군사재판을 끝내고 684부대의 마지막 흔적을 서둘러 지워버린 것이다. 실미도의 부대막사는 이미 김방일교관이 사건발생 며칠만에 상부의 지시에 따라 모두 폭파, 소각시킨 상태였다. 43명(훈련대원 31명, 기간요원 12명)의 생목숨을 앗아간 비극의 실미도는 아무 일도 없었던 듯 예전의 무인도로 돌아갔다.
재판결과 지휘계통에 있던 현역 장교들에게는 가벼운 판결이 내려졌다. 정보부대장 K대령은 공소기각됐고 공작과장 L소령도 집행유예 판결을 받아 출감했다. 다만 실미도 파견대장이었던 H중령은 관리책임을 면치못해 실형을 선고받았다. 사건전날 외박을 받아 화를 면했던 김방일교관은 실미도에 남아있는 부대흔적을 말끔히 정리한 뒤 공군정보부대로 배속받아 청주에서 근무하다 퇴역후 건설업에 종사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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