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원희 「능소화」 전문

그림=박경수

사랑을 믿지 않는 대신
그리움을 믿는다
울타리 밑에 가슴을 댄
능소화

마이산
탑사
암벽을 타고 흐르는
능소화
꽃이 피었다

사랑은 멀고
그리움을 먼저 피웠다

─ 박원희 「능소화」 전문(시집 『나를 떠나면 그대가 보인다』에서)

 

그리움의 연연한 그늘 뒤에 숨은 못 믿을 사랑의 고통, 그 모순의 돌탑 위에 가슴을 묻고 피는 꽃, 능소화. 사랑을 믿지 않는 마음과 그리움을 믿는 마음의 끝은 다를까요. 피어오르는 그리움의 꽃 한 송이와 이제는 떠나버린 사랑의 심연은 분명 다른 것일까요. 이토록 가슴 저려오는 대칭적 등가물-능소화. 그리움을 믿는 것은 결국 사랑의 존재 가치를 인정하는 것과 다를 바 없을 것. 이 모순의 역설을 아는 자만이 자신의 인연과 인간사의 물결에 몸 맡길 수 있을 것. 능소화 꽃 분분한 한낮, 꽃향기에 눈먼 피안의 울타리에 앉아 물어보지요. 아, 그리움이 먼저던가, 사랑이 먼저였던가. 다만, 사랑도 그리움도 마음처럼 멈추지 않고 오직, 흘러갈 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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