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문가가 살아온 길, 현도면<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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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문가가 살아온 길, 현도면<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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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승인 2017.11.16 14: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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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민식의 ‘톡톡 튀는 청주史’

혼맥으로 연결된 소북

보성오씨의 다른 갈래는 낭성면 갈산리·삼산리에 있다. 다른 길을 갔다. 당색으로 소북에 속했다. 먼저 오윤의 손자 오태좌吳台佐의 부인은 청주이씨로, 처가인 송절동으로 옮겨갔다. 이곳에서 다시 후손 일부는 낭성면 갈산리·삼산리로 옮겨갔다.

낭성면 갈산리에 기암서원機岩書院이 있다. 원래 오창읍 기암리에 있었던, 강백년姜栢年, 1603~1681을 모신 사당이다. 1706년 이후 오숙吳?, 1602~1675을 함께 모시고 있다. 서원은 철폐된 후 1984년 지금의 자리로 옮겨 복원하였다.

강백년의 할머니가 보성오씨이고, 그는 오숙에게 대고모할머니다. 선대 혼맥을 기반으로 한 당대 유력 인사들의 인적 네트워크다. 이들은 중앙 정계에서 광해군 이후 크게 위축된 북인, 그 중 소북계로서 명맥을 유지하고 있었다. 실제 그들이 남긴 글 속에 관직 생활의 어려움을 토로하기도 하였다.
 

기암서원, 청주지역 유일의 소북계 서원이다.
강백년 묵죽도(1785년). 두 가문의 혈연 관계를 증명하듯 보성오씨 문중에 강백년의 그림과 글씨가 전한다.


진주유씨, 명분과 권력의 갈래에서

현도면 노산리는 옛 기록에 노산리路山里라 하였고, 지금은 노산리老山里라 한다. 글자 그대로 읽으면, 큰 길에 있던 산이란 뜻이 나이 들어 은둔하는 산으로 바뀌었다. 아무튼 이곳은 대청댐을 지난 물이 둥글게 굽이치며 마을 앞에 커다란 들을 이루고 있다. 그리 높지 않으나 뒤로 산을 두고 앞에 강이 흐르니 말 그대로 배산임수의 명당이다.

이곳은 바로 진주유씨晋州柳氏의 터전이다. 청주에 세거하는 진주유씨는 유정柳挺을 시조로 하는 토류계土柳系이다. 시조로부터 10세인 유종식柳宗植은 세조 때의 훈신으로 만년에 이곳 노산리로 낙향하면서 후손들의 세거가 시작되었다. 후손들 스스로 백참판공파라 부른다.
 

진주유씨 입향조 유종식의 신도비다. 현도면 매봉리 그의 묘소 앞에 있다.


유종식은 두 부인에게서 4남 4녀를 두었다. 첫 부인 진천송씨의 아들들은 영永자 돌림, 둘째 부인 안동권씨의 아들들은 문文자 돌림으로 차이가 있다. 부인 안동권씨는 양촌 권근權近의 조카로, 첫 부인의 아들인 유영정의 후손들이 괴산에 자리잡게끔 하였다. 지금 괴산 소수 일원에 세거하는 진주유씨가 그의 후손들이다. 유격柳格, 1545~1584·유근柳根, 1549~1627 형제가 유명하다. 이후 5대가 내리 문과에 급제하면서 문명을 떨쳤다. 유근은 바로 충청도관찰사를 지내며 청주에 있던 감영을 공주로 옮긴 인물이다.

안동권씨의 큰 아들은 유문통柳文通인데, 그의 손자가 유희령柳希齡, 1480~1552이다. 우리에겐 『표제음주동국사략標題音註東國史略』의 저자로 알려져 있다. 이 책은 조선 전기 사림의 저작임에도 불구하고 조선 초 훈구파의 인식을 대폭 수용하였다. 사림들이 중국 중심의 역사 인식에서 벗어나지 못하던 한계를 뛰어넘는 역작이다. 유희령은 증손 유흥룡柳興龍과 함께 가덕면 노동리의 덕천사德川祠에 함께 모서져있다. 유흥룡은 학문이 뛰어나 ‘문산부자文山夫子’로 알려진 인물이다.
 

덕천사는 이름을 바꾸어 덕천서원이라 한다. 사우 앞에는 2008년 세운 묘정비가 있다.


청주 진주유씨는 시대의 변화 속에서 참화를 비껴가지 못했다. 유문통의 다섯째 아들 유인숙柳仁淑이 을사사화(1545) 때 네 아들과 함께 문의에서 처형되는 화를 입었다. 할아버지 유종식은 1455년(세조 2) 좌익원종공신 3등에 오르고, 아버지 유문통도 문과에 급제한 훈구계의 벌열이었다. 반면 아들 유인숙은 기묘사화 때는 조광조를 옹호하고, 이은 신사무옥에 역시 파면을 당하며 사림을 옹호하였다. 또한 1545년 을사사화에 크게 화를 입음으로써 이들 가문은 점차 사림으로 바뀌어갔다.

한편 유문통의 둘째 아들 유인걸은 상주김씨와의 사이에 2남 2녀를 두었다. 그 중 둘째 사위가 정렴鄭石廉, 1505~1549이다. 정렴은 경기 양주에서 살았는데, 그의 아버지 정순붕鄭順朋이 을사사화(1545) 때 많은 사람을 죽이니 처가인 노산리로 들어왔다. 정렴은 청주에 머무는 동안 지역에 많은 영향을 미쳐 그에게 배운 제자가 많았다. 또 그의 아들 정지임鄭之臨의 묘가 노산리에 있는 것으로 보아 머문 시기도 짧지 않았다. 정렴은 동생 정작鄭?, 1533~1603, 사촌 정초鄭礎와 함께 ‘일가삼선一家三仙’이라 한다. 정렴의 자취는 오명립의 주도로 세운 노봉서원魯峯書院과 『삼현주옥三賢珠玉』이 대표적이다.

안동권씨가 낳은 둘째 아들 유문달柳文達의 후손들도 노산리에 살았다. 증손유호柳顥는 유근과 함께 퇴계 이황에게 배우며, 이름을 떨쳤다. 유호의 아들 유사인柳思仁은 임진왜란 때 창의한 인물로 유명하다. 지금도 노산리에 그의 학재인 상의재가 남아있다.
 

유사인이 제자를 가르치던 상의재尙義齋가 노산리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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