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헌 환 (서원대 법학과 교수 )

지난 10월21일 내려진 헌법재판소의 신행정수도특별법 위헌결정은 우리 사회의 변화의 남은 영역으로 여겨지던 사법부가 말그대로 커밍아웃한 일대사건이었다. 결정 자체가 미치는 정치적·사회적·경제적 파장과는 별도로 이 결정이 우리 사법부의 역사에서 가지는 의미는 자못 심대하다 아니할 수 없다.

구한말 독자적으로 구축되고 있던 우리나라의 사법제도는 일제식민지를 거치면서 효율적인 식민통치의 수단으로 전락하였고, 해방 이후 과거 식민지시대의 친일적 법조인들은 식민통치에 기여하였던 과거에 대한 단 한 마디의 참회도 없이 그대로 새로운 나라의 사법부로 편입되었다. 건국 초기 이승만 박사에 대항하여 독립적이고 올곧은 사법부상을 구현하려 애썼던 김병로 대법원장의 노력도 얼마가지 못하였고, 연이은 독재정권의 폭압적 지배 하에서 우리나라 사법부는 과거 식민지 지배와 다름없이 억압적 권력의 품 안에서 자신의 안위만을 도모하는 데에 만족해왔다.

식민지시대에 법조인의 자격을 얻은 사람이 마지막으로 우리 재조 사법부에서 퇴장한 것이 1981년이었으니(이영섭 대법원장), 해방이 되고도 36년이 지난 다음에야 식민시대의 잔재가 형식적으로 완전히 청산된 셈이었다. 그러나 식민시대의 재조 법조인의 행동양식과 의식은 그대로 우리나라의 법조인들에게 이식되었고, 그에 따라 법조인의 뿌리깊은 선민의식과 기능인적 역할인식은 우리 국민들에게 법조인들을 불신하게 하는 데에 크게 작용하였다. 하늘이 무너져도 세워야할 정의는 단지 교과서에서나 나오는 구호일 뿐이었고, 국민들은 단지 우매한 통치의 대상일 뿐 사법권력의 원천이라고는 꿈에도 생각하지 않았다.

2002년의 대통령선거에서 학식과 덕망을 겸비한(!) 대법관 및 총리 전력을 가진 후보가 상고 졸업에 변호사 자격을 가진 보잘것없는(!) 후보에게 패하자 우리 사법부는 큰 혼란에 빠져들었다. 특히 최고 사법기관의 하나인 헌법재판소의 재판관들의 다수는 그들의 무리에서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는 대통령에 대하여 어떻게든 견제를 가하려 시도하였고, 그 결과가 지난 해의 재신임국민투표제의 위헌결정과 올해의 탄핵기각결정 그리고 이번의 행정수도이전위헌결정이다. 그나마 탄핵기각결정은 국민들의 엄청난 저항 때문에 기각으로 결정된 것이지 국민들이 들고 일어나지 않았다면 행정수도이전 위헌결정보다 더 먼저 대통령을 권좌에서 끌어내렸을지도 모르는 일이다.

사법부는 국민들의 규범적 대표로서 국민의 이익과 권리를 최우선으로 고려하여야 하는 국가기관이다. 의회가 정치의 장에서 국민을 대표한다면 사법부는 법치의 장에서 국민을 대표한다. 의회가 역동적인 동태적 정치현실을 그때그때 담아내는 기관이라면 사법부는 역동적인 정치현실에 방향타를 제공해주는 푯대로서 기능한다. 사법부가 정치현실의 이해관계에 휘둘리게 되는 것은 사법부 자신이 정치적 역할을 담당하겠다고 나서는 것에 다름아니다.

사법부는 정치현실이 아무리 변화무쌍하더라도 헌법과 법률이라는 엄격한 기준만으로 판단하고 결정하여야 한다. 정치현실이 사법부를 비난하든 칭찬하든 어느 쪽에도 귀기울이지 아니하고 엄정한 법의 논리로써 그 논리적 정당성을 제시할 수 있어야 한다. ‘관습헌법’ 같은, 전혀 이해할 수 없는 얼토당토 않는 논리는 헌법재판소의 정치적 편향성을 보여주는 명백한 증거일 뿐이다. 결론을 내려놓고 그에 짜맞추기로 법논리를 조작하였다면 잘못된 이해일까? 과거 유신시대에 저항권을 애써 무시했던 대법원의 억지가 30년이 지난 현재까지도 헌법재판소의 결정문에서 “관습헌법‘이라는 억지로 유지되고 있다는 것은 우리 사법부의 정치적 속성이 어떤지를 적나라하게 보여주는 사례이다.

이번 신행정수도특별법 위헌결정은 우리 국민들에게 또다시 소중한 경험을 주었다. 최고 사법기관의 구성원이 내리는 결정이 정칟사회적으로 어떠한 영향을 미치는지를 절감하게 하였고, 최고 사법기관의 구성원들에 대한 국민적 통제가 얼마나 절실한 과제인지를 새삼 느끼게 하였다. 그러한 의미에서 이번의 결정은 사법부가 국민들에게 커밍아웃한 일대사건이며 앞으로 머지않아 새롭게 구성될 대법원 및 헌법재판소의 구성원들을 올바로 충원하는 계기로 작용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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