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국유적지에 서린 보기 드문 남박다리

한반도 최남단인 전남 진도. 230개 섬들이 한폭의 그림처럼 펼쳐진 진도군은 예로부터 시·서·화·창의 찬란한 문화예술을 꽃피워 예술의 본 고장으로 널리 알려져 있다.
이런 독특한 예향 남도 진도에 아직도 불멸의 충혼이 서려있는 호국 유적지인 삼별초의 항몽전적지와 이충무공의 명량대첩지가 있다는 사실은 진도(진도)의 진미가 어디에 있는지 다시 한번 묻게 한다.
진도군 임회면에 있는 사적 127호인 남도석성이 바로 대몽 항쟁의 격전지이다. 남도 석성은 고려 원종때 배중손 장군이 삼별초군을 이끌고 진도로 남하하여 대몽항쟁의 근거지로 삼고 최후까지 격전을 벌인 곳이다.

그러나 성은 이미 삼국시대부터 있었다고 여겨지며, 현재 남아 있는 성은 남도포(南桃浦)에 만호부(萬戶府)가 처음 생긴 것이 조선 세종 20년 정월이므로, 1438년 이후에 축성하였다고 생각된다. 기록에 따르면, 1214년부터 1259년에 걸쳐 왜구가 연해지방을 침범하여, 1350년(충정왕 2)에는 진도의 관아를 내륙지방으로 옮기고 백성을 옮겨 살게 하였다. 이 교치생활(僑置生活)은 조선시대에도 계속되어 오다가 세종 때에 이르러 진도로 돌아갈 수 있었다고 한다. 그러므로 이러한 기록은 축성 시기가 1438년 이후임을 더욱 뒷받침한다. 특히 남도포 석성(石城)은 동쪽에 있는 금갑보(金甲堡)와 더불어 오른쪽으로 가는 바닷길의 요지이며, 동시에 남해안에서 서해안으로 올라오는 목줄기에 해당되는 요새지이다.

이러한 지형적인 특수성으로 인하여 1683년(숙종 9) 6월에는 수군진관(水軍鎭管)을 위도(蝟島)와 가리포(加里浦)에 둠으로써, 남도진(南桃鎭)은 가리포진관에 부속된 수군의 근거지가 되었다. 이 석성은 본래의 규모가 둘레 1,233척(尺), 높이 8척이 되었으며, 샘과 우물이 각각 1개씩 있었다고 한다. 그러나 1765년(영조 41)경에는 석축(石築) 둘레 1,040척, 높이 12척, 치첩(雉堞)이 43개소 있었다고 하며, 현재는 동문(東門) ·서문(西門) ·남문(南門)과 성터가 부분적으로 남아 있다. 이 성은 조선시대 수군진영의 진지로서 그 보존 가치가 매우 크다고 하겠다.
이 남도석성 남문 앞에는 개울이 흐르고 있는데 여기에 홍예로 된 돌다리가 2개 있다. 이것이 바로 전국에서 보기 드문 남박다리다. 위에 있는 것이 단홍교이고 아래 있는 것이 쌍홍교다. 석성의 외곽을 건너 다니기 위하여 축조한 것인데, 편마암의 자연 석재를 사용한 것으로는 전국적으로 보기 드물어 학계에서 큰 관심을 모으고 있다.

성박다리, 남박다리, 동박다리

이 쌍교와 홍교는 성밖에 있다고 성박다리, 성 남쪽의 다리는 남박다리, 성 동쪽의 다리는 동박다리라 했는데 성박다리, 동박다리는 현존하지 않고 위치만 확인된다.
성안에는 삼별초를 이끌고 왔던 배중손의 후손이 집단으로 취락을 형성하여 살았다고 하는데 현재는 20여호가 살고 있는 것으로 확인되면서 700여년이 지난 옛 호국의 정신이 아스라이 넘실거려 옴을 느끼게 한다.
청주에서 차를 치달아 남도석성과 남박다리에 도달하니 동문 먼밖 달등 바위에 달하나 걸려있어 성벽주위 유채꽂과 바다 물빛만이 돌 한 장, 한 장 쌓아가며 되새겼을 호국의 정신과 어우러져 있다.
단홍교는 축조연대와 내력은 정확히 알 수 없고 쌍홍교는 해방직후에 마을 사람들이 놓았다고 하는데 지금도 사람들이 왕래하고 있다. 두다리 모두 편마암질의 판석을 불규칙하게 세로로 세워 배열했으나 외부는 어느 정도 일정하게 쌓았을뿐 내부는 돌이 일정하지 않아 불규칙한 홍예를 이루고 있다.

-송광섭 청주건설박물관 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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