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민식의 ‘톡톡 튀는 청주史’

현도면의 지명 유래가 수상하다. 이곳은 옛 문의현 서쪽의 일도면一道面, 이도면, 삼도면 지역이다. 이중 세종시 부강면이 삼도면의 중심을 이루니, 일도면과 이도면 지역으로 좁혀 볼 수 있다. 대략 1914년경 지금의 행정구역이 정리되었으니, 이때 비로소 현도면이라 지명이 생겼다. 이곳에 있는 현도산에서 유래한 것이라 한다. 지금의 구룡산 또는 구봉산은 현도산이었다.
 

보성오씨 입향조, 오숙동 묘소. 부인은 원주원씨로 처가로 들어오며 현도면 일원에 자리잡게 되었다.

보성오씨의 자취와 세거

본관이 엄연한데도 면面, 혹은 리里의 땅이름을 따 이름 붙인 성씨가 여럿이다. 아마도 특정 지역에 밀집되어 살다보니 붙여진 이름일 게다. 우리 지역에는 현도오씨라 불리는 보성오씨가 있다. 더 좁혀 달계오씨라고도 한다. 그들의 입향조 묘소에서 연유한 것이다. 이들의 터전은 강내면 일원까지, 동으로는 낭성면까지 너른 분포 범위를 보인다. 한때 오박사 마을로 널리 알져진 적이 있다. 다섯 박사인지 오씨 박사라는 뜻인지 궁금하다. 또 양지리에 박사당골이 있었으니 여기서 유래한 것인지 모르겠다.

좁혀 달계오씨라는 유래처럼 이곳에는 보성오씨 입향조 오숙동吳叔同의 묘소와 큰 재실이 있다. 원래 달계리도 여러 자연 마을을 합친 곳인데, 그 중 재경골[齋宮村]이 눈에 띈다. 재실이 있어서 붙여진 것이다. 스스로는 금계포란형이라 한다. 오늘 오씨의 세거를 보면 그 땅의 기운을 무시할 수는 없을 듯하다.

가계 기록에 따르면, 오숙동은 병사 원계종元繼宗의 사위가 되어 현도면 양지리 월대촌으로 옮겨왔다고 한다. 그는 이곳에 뿌리 내려 네 아들을 두었다. 그 중 둘째 오인헌吳仁憲, 달계리과 오인후吳仁厚, 상삼리의 후손이 현도 일원에서 크게 번성하였다. 오인헌의 아들 중 첫째 오효원吳孝元의 장남 오윤吳潤의 후예는 낭성면으로 옮겨가 한 지파를 이뤘다. 오효원의 둘째 오식吳湜과 동생 오효관吳孝寬의 후손들은 현도를 중심으로 세거한다.

하지만 이들은 조선 후기에 이르러 당색을 달리 하였다. 현도의 오씨들은 노론계로, 낭성은 소북계의 길을 갔다. 노론를 대표하는 송시열과 송준길은 한동안 문의에서 살았다. 곧 문의는 이들의 세력 근거지로 자리 잡을 수 있었으니, 문의의 한 터전인 현도도 자연스레 노론이 우세하였다. 부강 검담서원이 송준길을 모신 서원이고, 옛 문의 땅 곳곳 송시열의 자취는 지금도 완연하다.
 

지선정(충청북도 유형문화재 제111호)은 금강이 내려다보이는 언덕 위에 있다.

명문가로 사는 법

금강이 내려다보이는 풍경 좋은 곳에 지선정止善亭이 있다. 오효관의 현손 오명립吳名立, 1563~1633이 1610년(광해군 2)에 세웠다. 정자는 앞면 3칸, 옆면 2칸의 홑처마 팔작지붕의 기와집이다. 남쪽 2칸은 우물마루로, 북쪽 1칸은 마루방인데 반을 나누어 뒤쪽은 한 단 높게 만들었다. 안쪽에 여러 현판이 있는데, 송시열이 쓴 ‘충효일생忠孝一生 와차강분臥此江?’과 송준길이 쓴 ‘지선정’이 유명하다.

지선정 앞에는 강고사江皐祠의 묘정비가 있다. 바로 동쪽 건너편에 강고사가 있다. 이 사당은 오명립을 모신 사당이다.

오명립은 광해군 때 사마시에 입격하였으나 관직을 포기하고 향리에 은둔하였다. 특히 송인수와 정렴의 기풍을 쫓아 노봉서원魯峰書院 건립에 주도적인 역할을 하고 원장을 맡기도 하였다.

지선정은 주위의 풍광을 품은 절경과 후학 양성을 위한 공간이란 점에서 크게 주목할 수 있다. 또한 이곳에 세거한 보성오씨를 대표하는 문화유산이다. 더불어 지선정이 건립된 후 송시열·송준길 등의 필적이 남아있는 점은 이곳 보성오씨의 당색을 결정하는 요소이다.

지선정에서 북쪽으로 금강을 따라 내려가면 월송정月松亭이 있다. 입향조의 3남 오인후의 후손으로 오명립과 같은 항렬의 오유립吳裕立, 1575~1659이 세웠다. 부강 노호리에 살며 후학을 양성하며 은둔하며 처사형 삶을 살았던 이다. 그 또한 금강이 내려다보이는 곳에 정자를 만들어 만년을 보냈다. 금강을 접한 현도 지역의 자연환경은 이처럼 학문이 뛰어난 처사형 인물들의 자취를 오늘에 전하고 있다.

양반이라면 과거를 통해 출세했을 것이다. 그러나 대부분 그렇지 못했다. 문과 급제자가 너무 적었기 때문이다. 소과·사마시라고도 하는 생원·진사시에 입격한 후 지역 명문으로 세를 유지했다. 경주 최부자의 예처럼 어차피 중앙정계로의 진출이 막힌 후 재지 사족으로 만족한 경우도 있다. 현도 지역에는 유독 보성오씨의 정려가 많다. 당연히 많은 충신·효자를 배출한 결과다.

오경례 효자각, 오대익 처 안동권씨 열녀각(중삼리), 오대남 충신문(시목리), 오준립 효자각(양지리), 보성오씨 삼효각(달계리), 오상진 효자각(시목리), 오상정 처 진주정씨 열녀각(노호리). 현도면 관내에만 일곱 곳에 충·효·열을 실천한 그들의 정려가 있다. 오식의 증손 오대남吳大男은 병자호란 때 강화도에서 순절하여, 1675년(숙종 1) 정려를 세웠다. 오인후의 후손 중 오상건吳尙健의 아들, 손자에 이르는 3대 삼효각은 현도초등학교에 있다. 대체로 현도 곳곳의 정려는 각 지파를 대표하는 상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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