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민식의 ‘톡톡 튀는 청주史’

모충사가 쫓겨가 동명洞名을 바꾸고

신사가 모충사와 함께 당산에 자리하다가 서공원을 거쳐 다시 당산으로 오게 됐다. 그 결과 모충사는 1923년 쫓겨나다시피 고당마을(청송아파트 자리로 추정)로 이전하고, 1975년 지금의 자리로 다시 옮겨졌다.

모충사가 위치한 곳은 일제 초기까지도 청주군 사주면四州面 화흥리華興里로 불리던 곳이다. 신사에 쫓겨 모충사가 옮겨옴으로써 행정 지명도 바뀌었다. 지금의 모충 고개는 임진왜란 당시 청주성 탈환전의 배경이 된 화청령華淸嶺이다.

지금의 모충사는 여러 차례 자리를 옮겨 자리 잡았다. 앞면 5칸 사우에 ‘모충사’라 편액하고 앞쪽에 ‘모충단慕忠壇 갑오전망장졸기념비甲午戰亡將卒紀念碑’를 세웠다.

신사참배의 기억, 대한불교수도원 자리

명장사 자리에 있던 신사는 또 한 차례 자리를 옮기게 된다. 1934년 앞쪽에 사찰이 들어서면서 논란 끝에 1935년 수동 대한불교수도원 자리로 이전한다.

신사가 대로변에 위치하면서 존엄尊嚴함이 덜하고, 경내가 좁아 증가하는 참배객을 수용할 수 없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보다 직접적인 원인은 신사 앞쪽에 고야산포교소高野山布敎所가 신축되면서 부터이다. 이 문제로 인해 1935년 도지사의 요청으로 민영은의 소유인 와우산 감천정甘泉亭에 신사를 신축하기로 하고, 1936년 3월 기공식을 가졌다. 그리고 그해 10월 준공과 함께 이전을 하면서 도진공사道進供社에 지정됐다.

이곳은 지금의 대한불교수도원의 자리로, 옛 사진에 보면 장방형의 대지를 마련한 후 계단을 통해 신사에 오를 수 있도록 하였다.

지금의 대한불교수도원은 옛 절터 치고는 매우 어색한 구조를 보이고 있다. 즉 들어서는 입구가 다른 사찰과 차이를 보인다. 이곳이 일제가 패망하기 직전까지 운영하던 청주신사 자리다. 일제강점기를 살아왔던 이들에게는 등교에 앞서 참배 후 손등에 확인 도장을 찍는 등 단체 참배의 기억이 희미하게 남아있는 곳이다.
 

대한불교수도원 자리의 청주신사(1935~1945). 현재의 수도원으로 들어가는 계단이 사진에 보이고, 삼일공원 자리도 신사 관련 시설이 들어섰다.

지방 유교 교육의 중심, 향교

사직단이 고을의 서쪽에 있다면 동쪽에는 문묘, 곧 향교가 있다. 청주향교는 앞쪽에 명륜당을 두고 뒤에는 대성전이 있다. 전학후묘前學後廟라 한다.

초정에 행차한 세종과 세조가 책을 내리거나 직접 제향을 지내기도 했다. 청주향교의 특징 중의 하나는 명륜당의 구조이다. 명륜당 좌우 끝에 온돌방을 두어 이곳을 동재와 서재로 이용하였다. 또한 옆면에는 짧은 눈썹지붕을 달아 비바람에 노출된 벽체를 보호하였다.

이곳에서는 고려 때의 기와편이 여럿 수습되어 흔히 대성동 사지라 부르기도 한다. 지금도 대성전에 오르는 계단 옆에 석탑의 옥개석이 남아있다.
 

삼문을 들어서면 맞배지붕의 명륜당이 있고 다시 높은 계단을 올라 회랑 모양의 일곱 칸 내삼문을 들어서면 대성전이 있다.

조선 건축 초 유학의 이념을 실현하기 위한 교육 공간으로 전국 모든 군현에 향교를 세웠다. 그런데 조선 중기 이후 서원書院이 그 기능을 주도하게 되자 점차 퇴락하기 시작하였다. 실제 양반이 향교에 입학하는 것을 기피하게 되자 점차 중인 이하 계층이 향교 학생을 차지하게 되었다. 특히 19세기에 이르러 전국적으로 향전鄕戰이 발생하면서 점차 신향新鄕 주도로 향교가 운영되기 시작하였다. 향교도 서원과 마찬가지로 역役을 피하는 통로가 되면서 신분 상승을 꾀한 계층이 장악하기 시작하였다. 청주향교의 경우에도 마찬가지였을 것이다. 향촌사회에서 몰락한 양반을 대신해 새로이 부를 획득하여 성장하고 있던 부농층이 향론을 장악해 나갔다.

또한 일제강점기에 경학원經學院, 대동사문회大東斯文會, 조선유도연합회朝鮮儒道聯合會 등 주요 유림단체는 친일 시비로부터 자유롭지 못했다. 지금도 여러 향교에 보면 19세기 신향과 결탁한 지방관 선정비와 일제강점기의 공덕비가 적지 않은 것을 볼 수 있다. 일제강점기 향교는 지방관이 임명한 상근직인 직원直員을 두었고, 해방 후 전교典校로 바꿔 부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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