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주 괴산군민회관에서 열렸던 ‘홍명희 문학제’에 다녀왔습니다. 민족문학작가회의가 주최하고 충북작가회의가 주관한 이날 행사는 전국에서 200여명의 홍명희 연구자들이 참석해 성황을 이루었습니다.

올해로 9회 째를 맞는 ‘홍명희 문학제’는 첫날 영상으로 만나는 임꺽정 상영을 시작으로 임헌영 민족문화연구소장과 민충환 부천대교수의 학술강연으로 이어졌고 벽초전문가인 강영주 상명대 교수의 ‘벽초 홍명희평전’ 출간기념회도 열렸습니다.

‘홍명희 문학제’는 그가 사회주의자이면서 월북 작가로 북한에서 두 차례나 부수상을 역임한 인물이라는 점 때문에 그 동안 공개적으로 열리지 못하다 지역 보훈단체의 양해로 이번에 그의 고향 괴산에서 막을 올린 것입니다.

이날 ‘홍명희문학제’에는 김문배 괴산군수, 이재화 괴산군의회의장이 특별히 참석했고 김정기 전서원대총장, 박학래 전도의원, 김승환 충북민예총회장, 허장무·윤석위·도종환·장문석 시인, 노화욱 하이닉스경영지원본부장, 김창규 목사등을 비롯해 서울 경기 강원 전남 등 전국의 홍명희 연구자와 학생들이 각지에서 몰려와 열기를 더했습니다.

당초 충북민예총이 초청하려 했던 홍명희의 손자 홍석중(63)은 경색된 남북관계로 아쉽게도 오지 못했습니다. 홍석중이 쓴 소설 ‘황진이’는 북한의 베스트셀러로 얼마 전 남쪽에도 수입돼 판매 중인데 만해문학상에 선정돼 화제가 되기도 했습니다.

1888년 괴산읍 인산리(현 동부리450-1)에서 태어난 홍명희(洪命熹)는 일본에서 중학을 졸업한 뒤 귀국해 1920년대 초 동아일보 편집국장을 역임했고 1938년에는 조선일보에 장편소설 ‘임꺽정(林巨正)’을 연재했습니다.

‘임꺽정’은 반봉건적인 천민계층의 인물을 통하여 조선시대 사대부계층의 계급적 우월성을 배격하고 서민들의 생활양식과 의적의 활약상을 그린 역작으로 우리 문단사의 거봉으로 평가되고 있습니다. 그가 최남선, 이광수와 함께 조선의 3대 천재라는 별호를 얻은 것은 이 때입니다.

그러나 그는 광복 직후 좌익운동에 가담, 1948년 월북해 북한정권 수립에 참여하고 부수상까지 역임하므로서 남쪽에서 ‘홍명희’라는 이름은 물론 그의 작품 ‘임꺽정’은 금기의 대상이 되어 어둠 속에 묻혀 왔습니다.

홍명희의 부친 홍범식은 1910년 금산 군수로 있으면서 한일합방이 발표되자 “나라가 파멸하고 임금이 없어지니 죽지 않고 무엇하리”라는 유서를 남기고 목숨을 끊은 애국지사입니다. 또 아버지를 따라 월북한 그의 아들 홍기문은 국문학자로 이름을 떨쳤고 손자인 홍석중 역시 당대의 문장가로 필명을 날리고 있습니다. 이들 홍씨 가문은 4대에 걸쳐 그 명성을 역사에 남기고 있습니다.

이날 행사는 기피인물이던 ‘홍명희’라는 이름 석자가 아쉽게나마 ‘복권’된 계기가 되었고 보훈단체들의 열린 자세가 행사를 가능하게 했다는 점을 높이 평가할 수 있겠습니다. 문학제 주최측이 홍명희를 기리는 것은 그의 문학적 공헌을 높이 사고자 함이지 사상을 기림은 결코 아닐 터입니다.

세상은 많이 변했습니다. ‘빨갱이’라고 해서 입에 이름 올리는 것조차 쉬쉬하던 사람의 문학제가 군수, 군의장이 참석한 가운데 성황리에 열리고 쓰러져가던 그의 낡은 생가를 중앙정부에서, 도에서, 군에서 예산을 세워 복원하는 세상이 되었기에 말입니다. 바람직한 일입니다.

누가 됐던 그처럼 열린 마음으로 세상을 바라본다면 우리 사회가 지금처럼 이렇게 갈등으로 날을 지새고 살벌하지는 않을 것입니다. 한마디로 이번 행사는 괴산군도, 괴산군의회도, 보훈단체도 국민들에게 성숙한 모습을 보여준 좋은 계기가 되었습니다. 잘했습니다. 아주 잘 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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