류정환 「안부」 전문

꿈에 아버지가 보였다고, 별일 없냐고
누이가 어제 전화를 했다.

나는 어젯밤에 염소 꿈을 꾸었는데
너른 풀밭에서 혼자 풀을 뜯는
염소를 보았는데, 누구에게 전화를 해야 하나.

애라 모르겠다, 꿈보다 해몽이라는데
염소나 양이나 그놈이 그놈,
멀리 부산 사는 누이가 양띠였지.
불우했던 지난날 하얗게 덮어 두고
마흔 넘어 혼자 사는 하얀 누이.

설이나 추석에만 한 번씩 다녀가는
누이한테 전화하면 되겠다.

─ 류정환 「안부」 전문(시집 『상처를 만지다』에서)
 

그림=박경수

류정환의 시는 따뜻하고 아름답지요. 외롭게 늙어 가시는 아버지의 안부가 궁금한 딸이 있고, 아버지보다 더 외로운 누이의 안부를 걱정하는 오빠가 있는 세상은 5월의 훈풍처럼 따뜻합니다. 그러나 시를 가만히 들여다보면 문득 가슴 시리게 하는 맑은 슬픔 같은 것이 배어나지요.

그의 시에 자주 나타나는 이 서늘한 페이소스는 대체 어디에 기인할까요.‘ 아삭아삭 새금새금/ 잘 익은 오이소박이/ 한입 베어 물고 생각한다.// 인생이 이만큼만 경쾌하다면/ 내 삶이 이만큼만/ 완성될 수 있다면’「( 오이소박이」 전문). 아, 더도 덜도 말고 오이소박이 맛만큼만 내 삶이 상쾌할 수 있다면 하는 이 소박한 소망을, 그러나 세상은 그리 녹녹치 않아서, 늘 외면하기 일쑤지요. 시인의 짙은 우수가 내내 지워지지 않는 소이연이 여기 있습니다.

5월은 가정의 달이지요. 가정은 세상에 나를 서 있게 하는 힘이고요. 가족은 하나의 숙명, 더 정확히 말하면 내 운명의 근경根莖을 이룹니다. 가족이 내 삶을 이끌고 내 삶을 말하지요. 그러므로 가족은 언제나 내 편일수밖에 없고, 가족이 나에게 보내는 격려와 지지는 내 삶의 근원이며, 다른 어떤 것과도 비교될 수 없는 나를 이끌어 가는 근력이 되지요.

딸자식이 바라보면 늘 헛헛한 아버지의 노년, 멀리 부산에서 하얀 염소처럼 홀로 풀밭에 서 있는 누이의 먹먹한 고독, 조금씩 더해지는 슬프고 고통스러운 풍경입니다. 그래서 더욱 참을 수 없는 이 뜨거운 유대의 끈을 단단하게 걸머지려는, 시인의 결의가 낳은 좋은 시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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