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의 직언직썰/ 배명순 충북연구원 연구위원

배명순 충북연구원 연구위원

태어나서 20년 동안 충청도를 벗어난 적이 없었던 필자가 처음으로 외지 생활을 한 것은 군 입대 전 휴학하고 서울 인근 아파트 공사 현장에서 막일을 했던 때이다. 그 때 농담 반 진담 반으로 자주 듣던 얘기가 ‘멍청도 출신답게 느리다’는 말이었다. 군에 입대해서도 마찬가지였다. 필자는 다른 사람들과 크게 다르지 않은데 ‘멍청도’ 출신이라는 말을 들을 때면 은근 창피하고 기분이 나빴다.

설령 충청도 출신이 느린 행동을 보이는 것이 사실이라도 그것은 듣기에 기분 나쁜 비유와 말투였다. 여유 있다, 침착하다, 여러 번 생각하고 행동한다는 등의 표현도 있었을 텐데 말이다. 결혼하고 나서는 아내에게도 같은 말을 들었다. 운전도, 말도, 행동도 느리다는 것이다. 결혼 15년차라 이젠 적응이 되었을 법한데 요즘도 가끔 핀잔을 준다. 그래도 예전처럼 기분이 나쁘지는 않지만 ‘내가 정말 느린가?’라고 살짝 생각해보기도 한다.

그런데 요즘은 느리다, 느긋하다라는 표현이 꼭 나쁘게만 들리지 않는다. 70년대 이후 경제성장을 위해 빨리빨리만 외쳐왔고, 항상 최신의 것만을 지향했던 우리나라가 최근의 여러 가지 사회문제에 직면하면서 빨리빨리 문화의 폐단을 조금씩 깨닫는 것 같다. 지난 7월 집중호우의 피해가 컸던 것도 빨리빨리 문화와 경제성장 위주의 발전전략을 선택한 탓이라고 생각한다.

침수피해를 입은 대부분의 지역은 하천 근처였고, 하수가 제때 빠져나가지 못한 저지대 지역이었다. 하천 인근은 경관이 좋아서 선호하지만, 침수피해의 우려를 감안해야 한다는 것을 알고 선택하는 이는 거의 없는 듯하다. 산사태의 위험에 노출되기 쉬운 농촌마을의 전원주택도 급속도로 번지고 있는데, 그것이 어떤 사회적 변화를 야기하고 재해에 취약한지에 대해 사전에 충분히 검토하고 있는지 모른다.

홍수피해는 근본적으로 사회 구조적인 문제로 접근해야 한다. 하천 제방이 터진 부분의 취약성이나 도로가 침수된 지역의 대응에만 국한할 것이 아니라, 그 지점으로 빗물이 모이기 시작하는 유역(물그릇) 전체를 놓고 살펴보아야 한다. 아파트단지와 대형 마트가 물에 잠긴 석남천 피해의 근본적인 원인은 침수된 지역의 제방이 부적절해서가 아니라 그 상류의 토지이용 변화에 있다.

석남천은 남이면 팔봉산에서 시작하여 강서동, 가경동, 복대동 등 도시지역을 거쳐 미호천으로 합류한다. 빗물이 침투하기 어려운 지표면(불투수층)이 대부분을 차지하는 도시지역은 투수층이 대부분인 농촌지역보다 4.5배 이상 빠르게 빗물을 하천으로 배출시킨다. 이러한 도시지역의 특성은 이번 홍수처럼 많은 양의 비가 한꺼번에 쏟아지는데 짧은 시간에 빗물을 하천으로 쏟아 내기 때문에 상류에서 내려오는 물과 겹쳐서 더욱 위협적인 존재가 된다.

이번 홍수는 비가 세차게 내리기 시작한지 불과 3시간 만에 하천의 수위를 최고치에 올려놓았고 범람하였다. 상류에서든 도시지역에서든 1시간만이라도 빗물이 하천으로 들어오는 시간을 지연시킬 수 있었다면 피해는 훨씬 줄었을 것이다.

현재 빗물을 천천히 배출시키는 기술과 방법은 잘 개발되어 있다. 빗물이 땅 속으로 스며들 수 있도록 투수성 포장재를 사용하고, 주요 시설이나 아파트에 빗물을 담아 둘 수 있는 저수통을 설치하는 등 가능한 자연의 상태로 돌려놓는 방법(저영향개발기법; LID)은 빗물을 땅 속으로 침투시켜 홍수시 빗물의 배출을 느리게 하고, 땅 속으로 스며들었던 빗물은 비가 그친 뒤 천천히 하천으로 흘러나와 하천의 유량도 유지시켜 준다.

물론 풀어야 할 숙제도 있다. 저영향개발기법을 적용하려면 돈이 많이 들고 공사 시간이 길어진다. 어떤 것이 가장 바람직하고 효율적인 것인지는 모른다. 다만 우리가 어떤 선택을 할 것인지는 결정할 수 있다. 위험을 무릅쓰고 빠르게 갈 것이냐, 느리지만 안전하게 갈 것이냐.

홍수가 물러나니 살충제 달걀, DDT 닭, 발암물질 생리대가 등장했다. 이 이외에도 우리의 생명과 안전을 위협하는 요소들은 주변 곳곳에 널려있다. 우리가 그것을 애써 외면하고, 빨리빨리를 외치는 한 위험은 증가할 수밖에 없다. 향후 충북의 미래는 빨리빨리 보다는 천천히 가는 것에 달려있다고 생각한다. 느리다는 충청도의 이미지는 안전이나 생명과 궁합이 잘 맞는다. 최첨단을 외치는 시대에 오히려 충북은 느림의 미학을 내세우는 것을 어떨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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