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모산, 백제로부터 조선에 이르는 이야기의 산실<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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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모산, 백제로부터 조선에 이르는 이야기의 산실<3>
  • 충북인뉴스
  • 승인 2017.08.28 09: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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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민식의 ‘톡톡 튀는 청주史’

알려진 것과는 다른 모습들

오늘날 순천박씨는 가문의 현창에 적극적이다. 지역에서 가을에 열리는 ‘청주성탈환축제’에 중봉 조헌趙憲과 함께 박춘무가 주인공으로 등장한다. 다만 아쉬운 점은 임진왜란 직후로부터 백여 년 이상 박춘무 형제의 의병활동 기록이 보이지 않고 있다. 빨라야 18세기 중반 쯤 비로소 등장한다.

“선생은 이때에 옥천沃川에 있었는데, 난리의 소식을 듣고는 통곡하며 의병을 일으켜 먼저 보은報恩에 있는 적을 공격하고자 하였다. 순찰사가 이들의 길을 막자, 선생은 오른쪽 길로 돌아 1,600여 명을 이끌고 깃발을 나부끼고 격문檄文을 돌리며 적이 나아가는 것을 막았다. 적병들 중 청주淸州에 웅거雄據하고 있는 자들의 기세가 성하여, 방어하거나 방어를 돕던 여러 군사들이 모두 궤멸하여 의사義士 박우현朴友賢이 전사하니 선생이 이에 달려가 승僧 영규靈圭의 군사와 합세하였다.”
 

청주지역 밀양박씨는 박중손을 현조로 모시는데, 그의 부조묘인 공효묘恭孝廟가 옥산면 신촌리에 있다.


그리고 『선조실록』에 조차 의병장 박춘무와 의관醫官 박춘무가 보이는 등 혼란스럽다. 임진왜란 때 왜를 물리친 공신을 책록한 『선무원종공신녹권』에는 오히려 3명의 박춘무가 등장한다. 실제 임진왜란 후 청주성 탈환의 전황을 기록한 <조헌전장기적비>에는 다른 인물, 박우현朴友賢이 등장한다.

조헌 의병진이 청주로 진군한 것은 다름 아닌 의사義士 박우현의 전사가 계기였다. 우리에게 잘 알려진 청주성 탈환의 한 주역인 박춘무는 언급조차 없다. 이러한 사실은 실제 청주성 탈환의 계기가 된 주된 인물로써 의사 박우현을 주목할 가치가 충분하다.

모가울 박씨, 밀양박씨의 자취를 따라

밀양박씨는 신라 건국 시조 박혁거세를 시조로 한다. 밀양박씨는 신라에 이어 고려·조선에 이르기까지 거대 문벌을 이루었다. 우리나라의 밀양박씨는 인구수도 적지 않아 세계와 분파에 대해 여러 갈래로 있다. 청주 지역에 입향하여 세거한 밀양박씨는 대체로 규정공파糾正公派라 한다. 규정공 박현朴鉉은 시조로부터 45세, 밀양박씨로 분적한 후 16세에 해당한다.

조선 전기 밀양박씨는 흔히 말하는 훈구파勳舊派에 해당한다. 박중손朴仲孫, 1412~1466은 1453년(단종 1) 계유정란 때 수양대군을 도와 김종서 등을 제거한 공으로 정난공신靖難功臣에 오르고 응천군凝川君·밀산군密山君에 봉해졌다. 선대의 관력이 계속된 것을 보면 서울 거주 훈척으로 자리하였다. 사림파로의 전환은 박광영·박훈 때에 비로소 실현되었다.
 

‘밀양박씨천’을 새긴 고인돌 뒤로 공효묘가 보인다.


이런 연유로 청주 지역의 밀양박씨는 박중손을 파조로 여기고 제향 한다. 밀양박씨의 커다란 족적은 덕촌리를 지나 서쪽으로 더 들어서면 만날 수 있다. 옥산 신촌리에 박중손의 부조묘不祧廟가 있다. 대개 3~4대조 위로는 1년에 한 번 시제를 지내는데 반해, 현달한 인물은 매년 따로 제사를 지낸다. 그런분을 모신 사당을 부조묘라 한다.

박중손 부조묘 앞쪽에 고인돌이 있다. 흔히 신촌리 고인돌이라 부른다. 이 고인돌에 ‘밀양박씨천密陽朴氏阡’이라 하였다. 밀양박씨의 마을이란 뜻이다. 이 고인돌을 표식 삼아 주변은 온통 밀양박씨의 묘역이다.

실제 규정공파 9세 박광영(1463~1537)과 박증영(1464~1493)이 청주에 세거하는 밀양박씨의 현조다. 청주지역 규정공파 후손은 청주 수의동·강내 일대의 박광영-박숭원-박우현 후손과 옥산·강외지역에 세거하는 박증영-박훈의 후손으로 나뉜다.

먼저 청주 수의동·강내면 일대에 세거하고 있는 밀양박씨의 선조인 박광영에 대해 알아보자.

박광영의 자는 군포君宲, 예조참의 박미朴楣의 둘째 아들이다. 부인은 내섬시內贍寺 첨정僉正 양석견楊石堅의 딸이다. 1486년(성종 17) 사마시에 입격하고, 1498년(연산군 4) 식년문과에 병과로 급제한 후 여러 벼슬을 지냈다. 1504년 정언으로 연산군의 생모인 폐비윤씨廢妃尹氏의 추숭追崇을 반대하다가 연산군의 노여움을 사서 영광에 유배되었다. 1506년 중종반정으로 풀려났다. 이후 주요 관직을 지내다 그의 맏형이 아들이 없어 뒤를 잇지 못하므로 그가 습작襲爵하여 밀성군密城君에 봉해졌다.

직언으로 대신들의 미움을 샀고 생원으로 있을 때 나라에서 배척하는 불교를 숭봉하였다는 죄목으로 장류杖流되기도 하였다. 또 폐비의 복위를 반대하다가 유배되는 등 많은 파란을 겪었다. 반면 외교에는 상당한 수완을 가지고 있어 중국을 세 번이나 다녀왔고, 어려운 일들을 곧잘 처리하여 왕의 신임을 받았다.

박광영이 청주와 인연을 맺은 것은 부인 중화양씨中和楊氏의 고향이 청주이기 때문이다. 1504년 박광영이 영광으로 유배되었을 때 부인 중화양씨는 친정인 청주로 낙향하였다가 죽어 이곳에 묻히게 된 것이다.
 

양우 묘는 사각형태로 조선 초기의 양식이다. 적어도 조선 초에 중화양씨가 청주에 세거한 사실을 보여주는 자료이다.


현재 박광영의 부인 중화양씨의 묘소와 손자 박숭원, 박충원, 박우현 등 후손들의 묘소는 수의동 도장골에 있다. 박광영 본인은 고양 선영에 묻혔지만, 아들대에 이르러서는 청주 수의동·강내면 일대를 배경으로 세거하기 시작한 모습을 보여준다. 수의동 도장골의 밀양박씨 묘역에는 앞서 자리 잡은 중화양씨와 뒤이은 밀양박씨의 묘소가 혼재되어 있다. 처음 이곳에 자리 잡은 사람은 양우楊遇이다.

양우의 행적에 대해서는 알려진 것이 많지 않다. 1385년(우왕 11) 문과에 급제한 사실이 『동과록전편登科錄前編』에 전한다. 양우는 이때 을축방乙丑榜 동진사同進士에 급제하였는데, 벼슬은 정랑正郞에 이르렀다고 한다. 또 증조는 양포楊誧, 조부는 양동무楊東茂, 부친은 양원식楊元植이다. 수의동에 있는 양우의 묘소는 고려말 조선 초기의 양식으로 적어도 조선 초기에 이곳에 중화양씨의 묘소가 있었던 사실을 알 수 있다. 또한 박광영의 부인, 중화양씨의 묘소가 이곳에 있고, 그의 아버지 양석견의 묘소 또한 제일 위쪽에 자리한다. 이러한 사실은 수의

동 도장골이 중화양씨의 묘역이고, 이후 손자 박숭원과 박형원이 할머니와 함께 이곳에 묻힌 것이다. 그것은 밀양박씨 규정공파의 일부가 선영이 있는 고양에서 청주로 이주하여 세거하게 된 배경을 말해 준다.
 

박숭원 묘 뒤로 양석견의 묘가 보이고 아래는 할머니 중화양씨의 묘다. 묘역 입구에 신도비가 있다.


다만 박광영의 후손이 모두 청주로 이거한 것은 아니고 박란의 후손 중 박숭원과 박형원 후손에 한정된다. 특히 박숭원이 호성공신에 오르며 크게 현달하였는데, 그의 후손이 강내 일원에 세거한다.

박숭원朴崇元, 1532∼1593의 자는 상화尙和로 예조참판 박광영朴光榮의 손자이며, 군수 박란朴蘭의 아들이다. 1564년(명종 19) 갑자 식년 진사시에, 같은 해 별시 문과에 급제하였다. 이후 여러 관직을 거쳤는데, 선조가 “세상 사람들이 모두 꾀로써 살려고 하는데 박숭원만은 그렇지 않다.”고 말할 정도로 왕의 신임이 두터웠다. 그 뒤 평안도 관찰사·사헌부 대사헌·충청도 관찰사·도승지 등을 역임하였다. 1592년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왕을 호종하여 선조로부터 보검을 하사받고 도승지를 거쳐 한성판윤에 올랐다. 호성공신扈聖功臣 2등에 책록 되었으며, 좌찬성에 추증되고 밀천군密川君에 추봉되었다. 시호는 충정忠靖이다.
 

강내면 월탄리에 있는 충정사忠靖祠는 박숭원의 위패를 모신 사당이다.


박숭원의 묘소는 수의동 도장골 양석견의 묘소와 할머니 중화양씨 묘소 사이에 있다. 원형의 봉분에 동자석을 제외한 새로이 갖춘 석물이 다수 있다. 묘역 입구에는 1928년 세운 신도비가 있다. 박숭원의 호성공신 녹권, 박숭원호성공신교서朴崇元扈聖功臣敎書는 충청북도 유형문화재 제166호로 지정되었다.

강내면 일원에 세거하는 밀양박씨는 박숭원을 현조로 하는데, 그의 신위를 모신 사당이 충정사忠靖祠다. 강내면 월탄리에 있으며, 1958년 중건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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