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모산, 백제로부터 조선에 이르는 이야기의 산실<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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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모산, 백제로부터 조선에 이르는 이야기의 산실<2>
  • 충북인뉴스
  • 승인 2017.08.21 15: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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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민식의 ‘톡톡 튀는 청주史’

부모산 자락에 깃든 삶의 뿌리

부모산 정상에 오르면 방송·통신사의 송출탑이 있고 그 정상은 철문을 통해 들어설 수 있다. 이곳에 청주대학교, 청석학원을 설립한 석정錫定 김영근金永根, 1888~1976의 묘소가 있다. 동쪽을 바라보며 정갈히 마련하였다. 지금 수목이 우거져 볼 수 없지만 동쪽 와우산에 있는 형 청암 김원근金元根, 1886~1965의 묘소와 마주보는 위치이다. 사립 명문대학을 세운 두 분이 청주를 대표하는 동서 두 산에서 서로 마주보는 셈이다.

김영근의 묘소 아래에는 배위인 경주이씨의 묘소가 있다. 상석에 쓰인 ‘사자嗣子’라는 표현을 두고 현장을 답사한 이들 사이에 말이 많았다. 사嗣는 ‘잇다, 상속하다’ 라는 뜻인데, 백부에게 양자로 가 종계를 이은 인물이 남긴 여지를 엿불 수 있다. 아무튼 부모산의 상당 부분이 지금도 청석학원의 소유인 것은 말할 필요가 없다. 더불어 육영사업으로 큰 뜻을 이뤘으니 오늘의 명당이라 할 수 있다.
 

부모산 정상의 김영근 묘소.


지역 명문가로 자리 잡은 순천박씨

청주를 본관으로 하진 않지만 일찍부터 청주에 세거한 성씨 중의 하나는 순천 박씨다. 고려 초의 공신인 박영규朴英規를 시조로 한다. 후백제 견훤의 사위였지만 왕건을 도와 개국에 공을 세운 인물이다. 개성 인근에 터전을 마련한 문벌로 자리 잡았지만, 순천박씨는 인근의 대전·세종시에 일찍부터 자리 잡고 있었다. 사육신 사건으로 크게 타격을 입은 그들이 청주 경계에 들어온 것은 9세 박의륜朴宜倫 때라 한다. 순천박씨는 조선 초부터 훈구로 크게 득세한 성씨로 일찍부터 청주지역과 관련이 없었던 것은 아니었다. 특히 중시조 박숙정朴淑貞의 손녀가 청주 오창에 자리 잡은 김사렴金士廉, 1335~1405의 아들 김약金瀹과 혼인한 것이 계기였다.

그밖에 2세 박원상朴元象의 묘가 대전 동구에, 그의 아들 박안생朴安生의 묘가세종 전동면에 있다. 박안생의 아들 박중림朴仲林과 그의 아들 형제들은 우리가 아는 사육신 사건으로 큰 피해를 입었다. 아마도 중앙 정계에서의 피화被禍를 계기로 그들은 선대 묘소가 있던 터전으로 옮겨온 것으로 볼 수 있다.
 

팔봉산 북쪽 자락에 있는 박춘무의 묘.
부모산 아래 비하동의 박춘번 묘.


전란의 시기에 두드러진 활동

순천박씨가 지역에서 두드러진 활동을 보인 것은 전란의 순간이었다.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박춘무朴春茂, 1544~1611와 박춘번朴春蕃 형제는 의병을 모아 왜적을 물리쳤다고 전한다. 그 후 순천박씨가 다시 사서에 등장하는 것은 1728년(영조4) 무신란戊申亂 때 박춘번의 현손 박민웅朴敏雄과 박민준朴敏俊 형제 등이 다시 의병을 일으켜 공을 세웠다. 이렇듯 국난의 때에 맞춰 의병을 일으켜 공을 세우면서 순천박씨는 지역의 유력한 성씨로 자리 잡았다. 2001년 후손들은 민충사愍忠祠를 세워 임진왜란 등 3대 창의倡義의 사실을 밝히고 있다.

신하를 의심한 왕과 조선을 의심한 명, 송상현의 순절로 잠재워

부모산 서쪽은 여산송씨가 모여 산다. 여기에 임진왜란의 순절 충신 송상현宋象賢, 1551~1592의 묘소와 신도비, 그리고 그의 부조묘인 충렬묘, 마을 입구에는 충신 정려가 있다.
 

수의동 강촌 마을 입구의 여산송씨 정려각(충청북도 기념물 제151호)은 가운데 충렬문과 두 효부각이다. 충렬문은 1594년(선조 27) 명정된 송상현의 충신문과 1704년(숙종 30) 금섬·이양녀의 열녀문을 합쳐 세운 것이다. 그리고 후손 송현기宋鉉器, 1684~1750의 처 밀양박씨 효열각, 송명휘宋明輝, 1737~1793의 처 연일정씨의 효부각이다.


여산송씨와 청주의 인연은 『양아록養兒錄』의 저자인 이문건李文楗, 1462~1501과 관련 있다. 그는 아들 이온李溫의 배필로 당시 오창에 살던 김해김씨를 맞았는데, 그의 딸이 송상현에게 시집갔다. 송상현의 부인 성주이씨는 이문건의 손녀였다. 성주이씨에게 청주는 곧 외가인 셈이다. 먼저 이문건은 괴산의 유력 성씨인 (구)안동김씨에게 장가들어 그 후손들이 괴산에 세거한 배경이 되었다. 얼마 전 고령에 있던 이문건의 묘도 괴산으로 옮겨왔다.

송상현은 임진왜란이 일어나기 전 해인 1591년(선조 24) 동래부사에 부임한다. 이미 전란이 일어날 것이란 흉언이 돌던 터라 그의 동래부사 부임 소식은 집안을 초상집으로 만들었다. 마침 이듬해 4월 왜군이 부산진을 거쳐 동래에 들이닥쳐 성이 함락될 즈음 송상현은 처연히 죽음을 맞이하였다.

지금도 여러 장의 기록화로 남아있는 동래부순절도는 하루 싸움의 긴박함이 그대로 남아있다. 이때 두 여인이 보이는데, 멀리 함흥에서 데려온 첩 한금섬韓金蟾과 서울서 데려온 이양녀李良女 등 두 명의 첩이다. 금섬은 당시 함께 순절하였고 이씨는 왜에 끌려갔다 절개를 지키고 돌아왔다. 지금도 송상현의 묘앞에는 두 첩의 묘와 단壇이 마련되어 있다.
 

송상현 묘소는 당초 동래읍성 밖에 있던 것을 1595년(선조 28) 지금의 자리로 이장하였다. 앞쪽에 한금섬의 묘와 이양녀의 단묘가 있다.


사실 송상현은 개성에서 태어나 서울에서 성장하여 청주와 직접적인 인연은 없다. 다만 성주이씨 부인의 외가가 이곳이라 산소를 마련한 것으로 보인다. 전란 중에는 동래성 바깥에 임시로 묻었다가 1595년 아들 송인급宋仁及이 조정에 아뢰어 왜군의 협조를 받아 이곳으로 옮겨 모셨다. 성주이씨는 임진왜란 직전 거듭된 시조모와 시아버지의 상을 치르고, 남편의 운구마저 자신의 외가 터전으로 옮겨오는데 주된 역할을 하였다. 지금 성주이씨의 묘는 남편과 떨어져 보다 서쪽에 있다. 송상현의 묘와 두 첩의 묘·단, 그리고 성주이씨의 묘는 당시 순절이라는 가치 속에서 우선 순위가 어디에 있는가를 보여주는 공간이다.

송상현의 순절은 명나라의 원군을 독려하는 결정적인 역할을 하였다. 처음 왜란이 발발하자 명 조정은 조선을 의심했다. 왜를 끌어들여 명을 공격하려는 것이 아닌가 했다. 왕 조차도 송상현의 순절뿐만 아니라 수령들이 적에게 투항한 것으로 의심했다. 그러나 송상현과 부산진 첨사 정발의 순절 사실을 거듭 상주하여 명의 의심을 거둘 수 있었다.
 

동래부순절도(충청북도 유형문화재 제223호). 임진왜란 개전 초기 동래부를 둘러싼 아군과 왜군의 치열한 전투가 한 폭에 담겨있다.


우리가 알고 있는 송상현의 자세한 순절은 1594년 12월 경상우병사 김응서金應瑞가 왜장에게서 그의 장렬한 순절 사실을 듣고 조정에 보고한 이후 알려졌다. 곧 이조판서에 증직하고 정문을 세우게 하였다. 이듬해 왜적의 수중에 있던 동래에서 지금의 자리로 묘를 옮겨오란 특지를 내리기도 하였다. 이해 정려를 세우란 명이 있었고, 1655년(효종 6) 충렬이란 시호를, 1681년(숙종 7)의정부 좌찬성으로 벼슬을 더 높였다. 이후 자손들에게 벼슬이 내려지고 1766년(영조 42) 부조묘인 충렬묘를 세웠다.

지금의 수의동 강촌 마을에 들어서면 입구에 세 칸의 정려가 있고, 좌우에 후손들의 정려각이 더불어 있다. 마을 뒤로는 옛 충렬묘와 최근 다시 세운 충렬사, 천곡기념관이 있다. 지역을 달리하여 사당을 세운 경우는 많아도 한 곳에 두 위패를 모신 사당은 처음이 아닌가 한다. 묘소와 신도비(충청북도 기념물 제66호)는 동쪽으로 산 너머에 있다.

이곳 법정동명인 수의동守儀洞은 보다 남쪽의 숫절에서 유래한다. 그렇지만 여산송씨 후손들은 송상현의 순절에서 찾으려 하고 마을 이름도 강상촌綱常村으로 부르고 있다. 이곳 부모산 서쪽 자락은 성주이씨의 외가라는 인연과 묘소와 부조묘를 위한 사패지賜牌地로 여산송씨의 4백 년 터전이 되었다.
 

충렬사(충청북도 기념물 제16호)는 원래 송상현의 부조묘不祧廟다. 부조묘는 1766년(영조 42)에 세웠다.
송상현 신도비는 1659년(효종 10) 송시열이 짓고 송준길이 썼다. 이정영李正英이 전액을 써서 1662년(현종 3)에 세웠다. 높이 280c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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