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민식의 ‘톡톡 튀는 청주史’

2014년 청원이 통합되기 이전, 청주는 상당과 흥덕으로 나누었다. 상당구가 상당산성과 옛 읍치를 대표한다면, 흥덕구는 흥덕사지와 부모산을 짝으로 꼽았다. 『직지』를 간행한 흥덕사지의 위상이야 더 말할 나위가 없으며, 부모산은 상당구의 와우산과 대척에 우뚝 솟은 산이다. 이제 부모산은 도심 속 깊숙이 들어온 허파와 같다.

그러나 아쉽게도 청주 서쪽의 랜드마크를 이젠 내줘야 할 듯하다. 산 동쪽에 우뚝 솟은 주상복합건물이 시야를 가리고 있다.
 

남동쪽에서 내려다본 부모산 전경. 산 정상부에 테를 두르듯 성벽이 돌아간다.

한편 부모산은 옛 기록에 야양산爺孃山이라고도 하였다. 야양은 곧 부모의 다른 한자 표기다. 지금 아양산이나 악양산으로 잘못 쓴 경우가 있지만 부모의 은혜를 떠올리면 그만이다. 그리고 그것을 보여주듯 정상에는 옛 우물, 지금은 새로 찾은 신라 때의 집수정을 만날 수 있다.

부모산과 인근 자락의 산줄기는 옛 지도에 자세하다. 한남금북정맥이 서쪽으로 이어져 흔히 팔봉지맥이라 부르는 산줄기로 나뉜다. 산줄기는 서북쪽에 이르러 부모산에서 그친다. 『대동여지도』의 뒤바뀐 위치를 바로 잡고 보면 부모산엔 옛 성터의 표시가 있고 미호천을 경계로 초소 같은 느낌이다. 산에 오르면 주변의 전경이 한 눈에 들어올 정도로 전망이 뛰어나다. 그리고 넓게 펼쳐진 산자락은 오늘도 옥토를 가꾸는 사람들의 터전이다.

그래서 세형동검을 만들던 사람도, 백제와 신라 사람들도 이곳에 올랐던 것이다. 삼국이 다투던 시기 이곳은 격전의 현장이었다.

백제와 신라가 뒤엉킨 실타래, 부모산성

발굴조사가 계속된 부모산성(충청북도 기념물 제121호)에서 옛 성벽을 만나게 된다. 우리의 궁금증은 터를 파 옛 자취를 확인하려 한다. 먼저 옛 사람들이 남긴 글을 보자. 부모산과 그곳의 산성에 대한 가장 오랜 기록은 『신증동국여지승람』이다. 이 책의 청주목 고적조에 부모성父母城은 고을 서쪽 15리에 있는데 돌로 쌓았고, 둘레는 2천 4백 27자이고, 성안에 큰 못이 있었으나 지금은 허물어졌다고 하였다.

이 산성에 대해서는 1987년 기초적인 지표조사를 통해 산성의 크기와 형태 등을 밝혔다. 그리고 1999년 보다 자세한 조사를 통해 성벽의 축성 방식과 주변의 보루를 찾아냈다. 이후 2004~2006년 북문터와 수구를 포함한 북벽, 그리고 성 안쪽을 조사하여 이 산성을 신라와 백제가 교차하여 쌓고 유지한 것으로 밝혔다. 그리고 2012~2013년 연이은 발굴조사에서는 서문터와 성벽 바깥의 두 보루를 조사하였다.
 

부모산성 보루. 2013년 발굴조사에서 찾은 백제 때의 성벽이다. 성 바깥쪽은 돌을 쌓고 안쪽은 흙은 다져 쌓았다.

둘레 1km가 넘는 산성과 네 보루를 갖춘 철옹성

지금까지의 조사를 통해 부모산성은 둘레 1.1km 이상의 크기이며, 산의 정상부(해발 231m)와 상단을 지나는 성벽은 마치 사모봉형에 가까운 사실을 밝혀냈다. 특히 지금의 석축 성벽은 신라가 처음 쌓은 후 다시 백제가 차지하였다고 한다. 이러한 사실은 6세기 중반 이후 신라의 북진과 7세기 이후 백제의 대응이라는 삼국 항쟁 속에서 부모산성이 중요한 역할을 하였음을 알 수 있다.

이미 1999년 지표조사에서 3곳의 보루를 처음 확인하였고 2012년 한 곳의 보루를 더 찾았다. 모두 4곳의 작은 산성들이 부모산성의 위성처럼 산자락에 분포한다. 2012~2013년 이곳 보루를 발굴조사한 결과 신라가 쌓은 석축 산성에 앞서 백제가 쌓은 작은 산성으로 밝혀졌다. 보루의 축성 방식도 다양하게 나타나고 있는데, 쌓은 시기는 적어도 한성시기(BC8~AD475)라 한다.

따라서 지금의 석축 산성이 들어선 자리에 백제의 작은 산성이 있었을 가능성이 높다. 백제는 일찍부터 청주 지역에 자리 잡은 이후 작은 크기의 산성을 쌓아 방어선을 구축하였던 것이다.
 

부모산성 서문은 문터를 높게 만든 신라식 성문이다. 성 바깥으로 성문에 오를 수 있게 경사로가 있으며, 성벽을 지지하기 위해 덧대 쌓은 흔적도 있다. ⓒ충북대학교박물관.

모유정의 실체가 드러나

부모산성 안쪽과 여러 보루에서 출토된 유물은 백제가 한성시기부터 이곳에 산성을 쌓았던 사실을 여실히 보여준다. 게다가 청주 지역의 많은 무덤과 집터는 백제의 청주 진출과 지배라는 우리가 알고 있는 이해를 반영한 것이다.

아마도 백제 영역 속의 청주는 부모산성과 와우산성을 축으로 하여 고을의 모습을 갖추었을 것이다. 우선 지금의 흥덕구 일원에 많은 백제 유적이 남아 있어 이곳을 중심으로 생각할 수 있다.

부모산 정상부에는 모유정이 있다. ‘어머니의 젖과 같은 은혜로운 우물’이란 뜻이다. 당연히 이곳에는 모유정을 배태한 전설이 남아있다. 외적이 침입하였을 때 산성에 오른 많은 백성들의 목마름을 해결해 주었을 것이고, 또다른 매개를 통해 적을 물리쳤을 것이다. 전국에 남아있는 비슷한 유형의 전설과 마찬가지로 하늘의 도움을 통해 위기를 극복하였던 것이다. 적의 포위 속에 고립된 산성이 함락되기 직전 짙은 안개와 비바람은 이곳 산성에 웅크린 많은 백성들의 바람을 외면하지 않았던 것이다.

그런데 부모산성은 6~7세기의 삼국 항쟁기에 주로 사용된 이후 거의 폐성이 된 듯하다. 이곳에서 발견되는 유물이 그것을 말해준다. 다만 모유정과 관련된 전설은 한 차례 더 부모산성이 그 역할을 한 것으로 볼 수 있다. 가장 유력한 시기는 바로 고려 때 몽골과 연이은 이민족의 침입이 거듭되던 시기였다. 곧 1290년 합단哈丹이 침입하여 청주를 지나 연기로 쫓겨가던 합단 부대와의 대치상황을 반영한 것 같다.
 

부모산성 모유정은 원래 신라군이 만든 둥근 모양이었으나 토사가 쌓이며 작은 우물 모양으로 줄여 사용했었다.

모유정은 이후 옹색한 우물로 유지되어 왔으나 최근의 발굴조사에서 원형의 신라 집수시설로 밝혀졌다. 산성에서 가장 필요한 물을 가두어 두던 곳으로 지름 7m에 3단의 계단 모양으로 쌓았다. 모유정은 얼마 전까지 자그마한 우물로 다시 만들어지기 이전에 한 차례 좁혀 썼던 흔적도 있었다. 그리고 넘친 물을 밖으로 내보내던 시설도 확인하였다.

비록 허구이지만 후대에도 부모산의 가치를 발하기 위해 재생산된 전설의 배경은 바로 모유정이다. 지금 새로이 옛 집수정을 드러내 놓았지만 옛 작은 우물이 오히려 전설을 떠올리기에 적합하였을 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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