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기만료 2개월 전…교사 체험·한국어교재 제작·수필가 등단 등 ‘성과’
현지어 숙달·현지인 친구 만들기·밀림오지 체험·기타외국어 수련은 ‘미흡’

안남영의 赤道일기(20-마지막회)
전 HCN충북방송 대표

399만 루피아. 이곳에서 쓴 월평균 생활비다. 한화로 약 36만여 원인데, 출장과 휴가 낀 달을 빼면 평균 26만 원이다. 16만 원으로 한 달을 난 적도 있다. 저물가에다 절약의 결과이기도 하지만 교유가 그만큼 적었다는 반증이기도 하다. 모쪼록 빈승인 양 ‘최저 생활’에 만족하려 애썼다.

혹자는 월급을 받는 줄 알지만 코이카 지급 월비는 미화 510달러가 전부. 처음엔 “그걸 갖고 어떻게 사나?” 싶었는데, 막상 살아 보니 “돈 모으는 사람도 있다”는 선배의 말을 실감한 뒤 저축에 욕심이 다 났다. 돈 절약을 위해 식당에서 물도 안 마시고―여기는 차나 물도 따로 사먹어야 한다―파출부는 한 번도 안 불렀다. 좀 비싼 쇠고기나 두리안은 2번 먹은 것으로 끝. 6개월 지난 식품도 먹어 보고 냉장고 빨리 닫기도 습관화했다. 그 결과 1년반 만에 2500달러 이상 모았다.
 

동네 골목의 꼬마들. 카메라를 들이대면 시키지 않아도 ‘창조적 포즈’와 표정으로 천진난만함을 유감없이 보여줘 아주 사랑스럽다.
오염된 물웅덩이에서 밤이면 피는 연꽃을 잠재력 큰 이 나라의 도광양회 이미지로 읽고 싶다.

명품도시 보고 생각 ‘복잡’

이 돈으로 명품 도시 수학여행을 생각했다. 사실 도시의 발전과정과 스토리 창작에 관해 평소 관심을 가져온 터라, 낡은 도시 반자르마신의 재생력에 의문이 들수록 멋진 도시를 가슴 뛸 때 둘러보고 싶었다. ‘가장 깨끗한 도시’ 상위 랭킹을 추려 자유여행 스케줄을 짰다. 공유민박집을 예약하고 국외휴가 승인을 받은 건 3월 초.

드디어 6월 라마단 기간에 10박11일 일정으로 싱가포르, 코펜하겐, 암스테르담, 비엔나, 취리히, 베른, 루체른 등을 둘러봤다. 겉핥기였지만 자연미에다 디자인·질서·환경·콘텐츠까지 갖춘 청정도시의 ‘작품성’에 입을 다물 수가 없었다. 한데 감명과 부러움보단 억누를 수 없는 답답증에 시달렸다. 내 고향 청주의 ‘몰비전’과 이곳의 남루함이 수시로 오버랩 돼서다.

파견 초기, 규모가 비슷한 청주와 어떤 교류가 가능한지를 유심히 살펴보다 태만한 환자 같은 이곳 모습에 실망하고 결국 ‘무망’ 결론을 내린 바 있다. 그럼에도 그 일류 도시의 풍광이 떠오를 때마다 이름값도 못하는 청주가 한심하게 생각되면서 으레 반자르마신에 대한 연민도 덩달았다. 정들어서라기보다는 그저 이곳 환경의 지속가능성에 대한 안타까움에서다. 하나 이것도 어쩌면 같잖은 고정관념, 우월의식의 발로랄 수 있겠다. 아니면 “가야 할 길이 먼 청주여!”를 “반자르마신도 있는데…”로 위안 삼으려는 건지도 모르겠다.

여기라고 긍정적 이미지가 왜 없을까? 발랄하고 천진무구한 동네 꼬마들의 눈빛을 보면 발등의 땟물조차 사랑스러울 때가 있다. 오염된 물웅덩이에서 아침마다 활짝 피는 연꽃을 볼 때면 어떤 도광양회가 연상되고…. 스승을 공경하는 문화, 프로축구 연고팀의 존재도 청주보다 낫다. 특유의 낙천성, 종교생활은 미련해 보여도 괜한 선입견으로 깔볼 게 아니다. 또 석굴암을 무색케 하는 세계문화유산 보로부두르 사원에 복식과 악기까지 찬란한 전통문화도 놀랍지만, 300여 종족의 다문화 속에서 통합을 유지해내는 걸 보면 ‘갈등천지’인 한국이 외려 딱하다.

그러니 슈퍼마켓, 식당, 학교 그리고 행정당국 등의 ‘무개념’에 관한 나의 통찰이 아무리 쓸모 있다 해도, 훈수 따위는 애초에 부질없는 일이리라. ‘낮은 데로 임한다’는 초심, “뭘 고치려 들지 말라”는 선배들 귀띔에 비춰 그건 오버하는 것이기도 하다. 그러나 한편으로 마음 한 구석에서는 봉사활동의 지평을 넓히고픈 욕심이 있던 만큼 현실 안주냐, 발굴 헌신이냐가 늘 고민거리였다. 한데 그걸 청산시킨 것은 언제부턴가 생긴 타성이었다.
 

세계문화유산인 보르부두르 사원. 정교하고 경이로운 조각, 축조 기술에서 저력을 본다.
작년 한국 선수 1명이 소속돼 인기를 끌기도 했던 반자르마신 연고 프로축구팀 ‘바리토 푸트라’가 홈구장에서 사마린다 팀과 경기를 하는 장면.

임기만료 전 생활 정리해보니

임기 만료 2개월 남짓한 지금 아쉬운 일을 꼽자면 손가락이 모자란다. ▷현지어 숙달 ▷학습진도 견인 ▷한국문화 체험수업 ▷현지인 친구 만들기 ▷밀림오지 체험 ▷기타외국어 수련 등에 목표 관리가 미흡했다. 반면 객수와 질병을 모르고 지낸 게 감사할 따름이다. ▷자취 수행 ▷교사 체험 ▷한국어 교재 제작 ▷수필가 등단 ▷한국문화축제 주최 ▷국제감각 습득 측면에서는 자못 성취감을 얻을 수 있었다. 일기와 가계부를 매일 쓴 것도 뿌듯하다.

그렇지만 여전히 처음처럼 설레는지, 달라진 건 뭔지 등 스스로 따져볼 게 많다. ‘세계로 떠난 조선의 지식인들’이란 책에 “인간은 자신이 살고 있는 경계 밖으로 나감으로써 비로소 주체가 되는 경험을 한다”는 대목이 있다. 그들의 웅지를 닮아 보려 했지만 주체 확립은 고사하고 느림의 미학과 게으름을 분간 못했다는 심증이 없지 않다.

평생의 화두 “겸(謙)을 어쩔 것인가”에 대해서도, E.프롬 때문에 이고 살았던 질문 “소유냐, 삶이냐?”에 관해서도 아직껏 주체적 결론을 못 내렸다. “단원 자체가 메시지”라고 교육받았거늘 은연중 현지인의 몽매를 탓하고 드러낸 짜증이 무릇 기하며, 이 타향살이가 소유 욕구보다 존재론적 실존을 택한 것임에도 못 버린 소유욕 때문에 삭이지 못한 불만이 얼마인고?

자평컨대 해외봉사 동기는 사 줄 만하되 활동과정은 ‘보통’이다. “이게 최선입니까?”에 “예”가 안 나온다. 연재 첫 회의 해외봉사 목적 5가지 중 ▷한국어 교수 경험축적과 ▷애국심 재충전은 ‘대체로 만족’이다. 나라꼴은 우스워졌지만 한류와 조국의 발전 덕에 사뭇 과분한 부러움을 샀다.

▷삶의 변화 ▷나만의 시간 확보 ▷가족애의 재발견 부분은 ‘글쎄’다. 변화를 낙으로 삼아 인생관까지 흔들어 볼 작정이었다. 유연하면서도 단단해지고 싶었다. 하지만 성찰이 무뎌선지 규범주의를 덜어내지 못한 채 영혼과 가치관 등에서 개조할 것들 목록만 작성 중이다. 몇몇 가외 목표는 시작도 못했다. 또 사랑하는 아들딸에게 어떤 가치와 영감을 타전하고 그리움도 교신하기 위해 시도된 나의 엉뚱함이 어떤 메시지로 전달됐는지 궁금하다.

밤에 TV로 유럽 축구를 즐겨 본다. 필사적 볼 다툼, 프로다움이 참 인상적이다. 그때마다 있지도 않은 내 각고면려 이력을 복기하게 된다. 그러다 ‘멍때리기’의 효용을 생각한다. 현대에는 잠이 부족한 게 아니라 어둠이 부족하다 했던가? 워렌 버핏은 멍하니 천장을 보며 하루를 시작하고, 잭 웰치는 매일 30분씩 일부러 창 너머를 물끄러미 보았다고 한다. 그와는 달라도 내겐 지금이 인생의 뒤안길에서 멍때리는 시간인지도 모른다. 귀국하면 시계태엽을 새로 감아야 하니 말이다.

어쨌든 여기서 버킷리스트 작성과 실행계획에 차분히 몰두할 수 있어서 좋았다. 문득 돌아보니 모범생도, 신사만도, 다독하는 서생도 아니었다. 그런 자아와 마주친 기분이 묘해져 묘비명까지 생각해 뒀다. “멋모르고 멋부리려다 멋없이 살았도다”가 그 후보작이다. 아직 변화가 어설프기에. 고로 지난 2년을 정의하자면 ‘짝퉁 서생의 멍때리기’ 쯤 되겠다. <끝>
 

교내 행사인데도 화장까지 한 무용 동아리 ‘단스르’ 회원들과 함께. 한류가 있어 이들의 활동이 있다는 점에서 늘 뿌듯했다.

안남영 전 HCN 충북방송 대표는 이 글 말미에 “그동안 지극히 개인적이고 주관적인 신변잡기를 참을성 있게 읽어 주신 독자 여러분과 장기간 지면을 할애해 준 편집진께 깊은 감사의 말씀을 올립니다”라는 소감을 덧붙였다. 안 전 대표는 코이카 봉사를 끝내고 오는 10월 귀국할 예정이다. 한국인에게는 낯설지만 어딘가 친근한 인도네시아의 문화를 예리하게 그러면서도 따뜻한 시선으로 전해준 필자께 감사의 말씀을 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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