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제림 「사랑을 놓치다」

…… 내 한때 곳집 앞 도라지꽃으로
피었다 진 적이 있었는데,
그대는 번번이 먼 길을 빙 돌아다녀서
보여주지 못했습니다, 내 사랑!
쇠북소리 들리는 보은군 내속리면
어느 마을이었습니다.

또 한 생애엔,
낙타를 타고 장사를 나갔는데, 세상에!
그대가 옆방에 든 줄도
모르고 잤습니다.
명사산 달빛 곱던,
돈황여관에서의 일이었습니다.

─ 윤제림 「사랑을 놓치다」 전문(시집 『사랑을 놓치다』에서)

 

그림=박경수

세상에! 내 사랑, 그렇게 놓치다니. 짓궂은 인연에 가슴이 얼얼합니다. 시가 말줄임표로 시작된 것으로 보아 이런 기막힌 일이 전에도 몇 번 더 있었던 듯합니다. 그런데 사랑을 놓친 장소가 심상치 않군요. 서역 멀리 돈황으로부터 내속리 법주사에 이르는 시적 배경은, 이 시가 보여주고자 하는 사랑이 세속을 초월한 윤회 전생에서 숙명적으로 엇갈리고 비껴가야 했던 불교적 세계관을 바탕으로 하고 있다는 증거지요.

또한 이 시는 행간에 긴 여백을 두어 절묘하게 독자의 상상력을 자극하고 있습니다. 읽는 이로 하여금 시 안에서 시인이 다 말하지 못하고 있는 애틋한 사연에 대하여 어루만지고, 들여다보고, 말을 걸게 합니다. 그러다보면 어느새 시의 내면이 우리의 경험 속에 들어와 삶의 한가운데로 육화되어 버립니다.

우리가 놓쳐버린 사랑의 속절없음에 한탄하면서도, 그것도 인생의 한자리였음을 깨닫게 되고, 더 나아가 이러한 세간의 이치를 터득함으로써 생을 이끌어가는 힘을 얻게 됩니다. 우리의 삶을 지탱하고 의지하게 하는 반려를 만나는 기쁨, 이것이 바로 시를 읽는 소이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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