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은숙 「11월」

내 안 깊은 우물의 바닥까지 다 비워낸
물기 없는 내가 스산해서
지는 해의 붉디붉은 신열 저만큼에 두고
한참을 서있는 11월

오래 앓던 정신의 밀도도 내려놓고
생의 속도마저 지워가며 낮아지는
겸허히 서늘한 계절
순한 손이 깊숙이 고요를 들이고
깊숙한 고요로 잠기고

─ 김은숙 「11월」 전문(시집 『손길』에서
 

그림=박경수

낙엽의 깊은 향기가 밟히는 만추의 11월은 그 이름만으로도 가슴 한쪽이 저미는 듯 쓸쓸함으로 차오르는 달입니다. 누군가를 떠나보내고 돌아서서 걷던 텅 빈 가로수길, 손님 없는 가을 찻집에 앉아 편지의 끝말을 쓰고 또 쓰는 한 여자, 조금 떨어진 곳에서 식은 햇살 위로 남은 잎새를 이리저리 굴리는 서리 묻은 바람 한 무리. 이렇게 쓸쓸함으로 가득한 풍경에 몸 맡겨보면 어느새 고요 속에 영락없이 표류하는 자신이 보이지요. 쓸쓸해서 아름다운 시간 속으로 들어가 진실한 자아와 나누는 고독한 육성이야말로, 이제껏 바쁜 일상 속에서 잠시 잊고 지낸 보석 같은 말씀들입니다.

시인도‘ 내 안 깊은 우물의 바닥까지 비워낸, 물기 없는 내가 스산해서, 지는 해를 저만치 두고, 한참씩 서있는 11월’처럼, 쓸쓸함으로 깊은 속내를 비워내고 참된 고요 속으로 침잠합니다.‘ 겸허히 서늘한 계절’, 순해진 자아 속으로 깊숙이 고요를 들이고 천천히 만추의 빈 길을 걸으며, 그 동안 내 마음 안에 들여놓은 무거운 가구들을 들어 내기도 하고, 아프게 새겨진 무늬를 지우기도 하지요. 그리하여‘ 오래 앓던 마음도 내려놓고, 생의 속도마저 지워가며 낮아지는’ 의미 있는 성찰에 도달하게 되는 것이지요.

쓸쓸하고 쓸쓸해서 아름다운 11월, 맑고 깊게 숙성된 쓸쓸함과 마주앉아 술이라도 한잔 나누고 싶어지는 달입니다. 좋지요! 깊어 가는 가을, 차마 뿌리치지 못하는 이 쓸쓸함과의 대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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