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영범 「연필 깎는 남자」

반듯하게 비질을 끝낸
눈밭처럼 하얀 사각의 정원
마당을 가로질러 선을 긋는 그 남자
언제나 평행이 되도록
하나가 다른 하나에게 다가가지 않도록
다른 하나가 저 혼자 멀어지지 않도록
뭉툭하게 깎은 몽당연필 선 긋는 소리

찬 눈 속을 뚫고 나오는 복수초 하나를 그려 넣고
보도블록 작은 틈을 비집고 나온 민들레를 그려 넣고
눈물 많은 물봉선을 그려 넣는다.
박봉에 시달리는 가장을 그려 넣고
세상의 모순과 싸우는 이들을 그려 넣고
늘 당당하지만 여리디여린 그녀를 그려 넣는다.
한 밤 잠 못 들고 질주하는 자동차의 경적 소리를 그려 넣고
새벽녘 현관 앞 신문 놓이는 소리를 그려 넣고
아침 안개를 뚫고 출근하는 발소리를 그려 넣는다.

한 땀 한 땀 수를 놓듯 소리를 모아 기둥을 세우고, 지붕을 올린
음표로 만든 그녀의 집
방 한 칸 세 들어
연필을 깎는 남자

─ 김영범 「연필 깎는 남자」 전문(계간 <딩하돌하> 2011년 봄호에서)
 

그림=박경수

‘음표로 만든 그녀의 집 / 방 한 칸 세 들어 / 연필을 깎는 남자’는 바로 젊은 시인이지요.‘ 한 땀 한 땀 수를 놓듯 소리를 모아 기둥을 세우’는 시인의 아내는 음악을 해서 가세를 꾸려갑니다. 박봉에 시달리는 가장은 늘 그런 것이 안쓰러워, 삶에 스미는 비애가 오히려 아름다운 하얀 사각의 풍경(원고지) 속에 앉아 시 쓰기에 몰두합니다.

눈 속에 핀 복수초도 그리고, 보도블록 틈새를 비집고 나온 민들레도, 눈물 많은 물봉선도 그리고, 세상의 모순과 싸우는 이들도 그리지요. 한결같이 곤고한 생의 깊은 균열과 상처를 지닌 대상들입니다. 그래서 더욱 그들에 대한 시인의 연민과 사랑이 돋보이는 것이지요. 이런 시 쓰기야말로 순결하고 당당한 젊은 시인의 새로운 삶의 구원을 향한 언어의 눈물이며, 그가 꿈꾸는 세상으로 가는 결코 포기할 수 없는 고통의 수용인 것이지요.‘ 반듯하게 비질을 끝낸 / 눈밭처럼 하얀 사각의 정원’은 바로 시인 자신이자 세계를 바라보는 가치의 전부입니다.

언제나 그러했던 것처럼, 그가 외로운 삶에 기대어 그의 세계를 하나씩 둘씩 사각의 정원에 진지하게 그려 가기를 기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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