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창의 너른 들,사람이 북적이다<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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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창의 너른 들,사람이 북적이다<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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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승인 2017.07.03 13: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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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민식의 ‘톡톡 튀는 청주史’

목령산성, 미호천을 지킨 백제 산성

선사시대를 지나, 청주 역사는 백제 때 무수한 자취를 남긴다. 와우산성에서 부모산성에 이르는 구릉 곳곳에 백제의 숨결이 살아있다. 이곳 백제의 자취는 미호천을 넘어 오창과 오송 일대로 이어진다. 청주 도심에서 북쪽, 오창을 둘러싼 산줄기에 솟은 목령산이 보인다. 산 꼭대기에 정자를 만들어 멀리서도 그 윤곽이 뚜렷하다. 목령산 꼭대기에는 백제가 쌓은 산성이 있다. 겉은 돌로 쌓고 안은 잔돌과 흙으로 채운 형식이다. 시간이 흘러 대부분의 돌은 흘러내리고 둔덕만 남은 꼴이다. 마치 말 안장 모양을 닮았다.
 

동쪽에서 바라본 목령산성. 얼마 전 산성의 제일 높은 곳에 정자를 세웠다.


목령산 남쪽 자락은 옛 유적으로 넘쳐난다. 오창과 오송에 산업단지가 들어서면서 발굴조사를 통해 많은 유적을 확인하였다. 이미 가까운 시기의 삶은 물론 그 아래에 백제의 자취, 그리고 더 아래에는 선사시대의 흔적마저 켜켜이 쌓여있다. 예나 지금이나 배산임수背山臨水는 삶의 최적지다.

기름진 터는 사람을 모으니, 여러 성씨의 세거지였다

병천천이 미호천에 합류하는 곳을 옛 사람들은 진목탄眞木灘이라 불렀다. 이곳에서 미호천 상류로는 드넓은 들판이 펼쳐진다. 그곳에 예로부터 여지없이 사람들이 살았다.

김사렴金士廉, 1335~1405은 고려 말 널리 알려진 충신이다. (구)안동김씨로 청주에 처음 들어온 이라 한다. (구)안동김씨는 김방경金方慶을 중시조로 하여 고려 말에 크게 번성하였다. 우리 지역의 (구)안동김씨는 3세 김영후金永煦, 1292~1361의 후손들이 대부분이다. 그의 손자 김사렴은 조선이 건국되자 오창 모정리로 낙향하여 고려에 절의를 지켰다. 반면 동생 익원공翼元公 김사형金士衡, 1341~1407은 개국공신이니 형제가 다른 길을 간 셈이다.
 

멀리 오른쪽에 김사렴의 묘소가 보인다.


그와 청주의 인연은 분명치 않다. 다만 고려 말 문벌이라는 권위와 할머니 청주한씨의 영향이 아닌가 싶다. 김사렴은 6남 1녀를 두었다. 그런데 5남 김약金瀹과 6남 김식金湜을 제외하면 아들을 낳지 못하거나 출가하였다. 막내 김식과 그의 아들 김자려金自麗는 진천 문백에 옮겨 살았다. 김자려의 아들 김린金鄰이 진천읍 장관리로 다시 옮겨 오늘에 이른다. 그의 증손 김효건金孝騫은 임진왜란 때 의병을 일으켰고, 그의 후예 중 무신란戊申亂 때 김천주金天柱·천장天章 형제의 분투는 지금도 전해온다. 진천읍 사석리에 김천주 2대 4충신의 충신각이 있다.
 

진천 사석 3거리에서 천안 방향으로 향하다 왼쪽에 충신문이 있다. 김천주와 김천장, 김천장의 아들 김성추金聲秋, 조카 김성옥金聲玉 등 4명의 충절을 기리기 위해 조정에서 정려를 내렸다.
김공예의 묘소 아래에 있는 아들 김점金點 묘 상석은 족보함으로 특이하다.


청주 지역 (구)안동김씨는 김약의 후손들이다. 김약의 손자 김환金丸이 여주로 옮겨갔지만 김환의 손자 김지金墀, 1455~1534 때부터 다시 오창에 세거하였다. 그의 현손 김하서金河瑞, 1551~1610는 임진왜란 의병장으로 유명하다. 김지의 아들 김공예金公藝, 1485~1537는 작은아버지 김계金堦의 양자로 들어가 청주에 터전을 잡았다.

한편 김사렴의 4남 김제金淛는 아들 없이 딸만 두었다. 그 딸이 전의이씨 이사혜李士惠에게 시집가면서 전의이씨가 청주에 자리 잡았다. 따라서 외손이 제사를 받든다. 이사혜의 아버지는 이정간李貞幹, 1360~1439이고, 그의 고모부는 청주곽씨 곽순郭恂이다. 이래저래 청주와 인연이 깊다.

오창읍 양지리의 송천서원松泉書院은 이들 성씨들이 실타래처럼 얽혀있다. 송천서원은 1695년(숙종 21) 옥산면 환희리 송촌마을에 7분을 모셔 처음 세웠다. 이후 1723년(경종 3) 이제신 등 3명을, 1798년(정조 22) 남구만 등 4분을 추향하였다. 서원은 1871년(고종 8) 훼철된 후 1976년 오창면 양지리 은행정마을에 다시 세우고, 김여량金汝亮, 1603~1683을 추향하였다. 처음에는 문중서원으로 출발하였지만, 1723년과 1798년 두 차례 추향한 인물은 대체로 소론에 속한다.

옮겨 세운 송천서원 옆에 전의이씨 사당인 목양사鶩陽祠가 있다. 목양사 뒤로는 이정간 등 3대의 단비가 있다.
 

송천서원(좌)과 목양사. 목양사 뒤에는 이정간 등 전의 이씨 3위의 단비가 있다. 이로 인해 송천서원의 주도 성씨를 엿볼 수 있다.


한편 이사혜는 김후金珝를 사위로 맞았다. 그는 본관이 청풍으로, 이로 인해 청풍김씨의 청주 세거가 시작되었다. 김후의 손자는 김윤金潤인데 일찍 부모를 여의었다. 이때 노비 삼월三月이 주인집 젖먹이인 김윤을 안고 진외가인 오창 양지리로 들어온 것이 계기였다. 김윤 또한 18세에 죽으니 삼월은 유복자를 키워 가문을 잇게 하였다. 청풍김씨 문중에서는 노비 삼월의 노고를 잊지 않고 1796년(정조 20) 비를 세워 그 뜻을 기렸다.
 

삼월비三月碑(문화재자료 제14호)는 청풍김씨 묘역 내에 있다. 비문은 좌의정 김종수金鍾秀가 짓고 김치희金致熙가 썼다. 높이 105cm.


청풍김씨의 뿌리는 괴산군 불정면에 있다. 6세 김관金灌, ?~1417의 묘가 최근 충청북도 기념물 제146호로 지정되었다. 그의 네 아들 중 둘째 김의지金儀之는 다시 다섯 아들을 두었는데, 둘째가 김후이다. 첫째 김리金理의 5대손 김효백金孝伯의 묘가 강내면 탑연리에 있다. 김효백의 후손은 대대로 무신 가문으로 성장하였다. 김효백의 동생 김인백金仁伯의 후예는 문신으로 크게 현달하였다. 김인백의 증손 우의정 김구金構, 1649~1704, 다시 그의 증손 좌의정 김종수金鍾秀, 1728~1799가 유명하다. 이들은 노론 중 호론湖論 계열로 정조 때 낙론과 크게 충돌하였다.

김효백과 그의 세 아들, 김익후金益厚·익성益聲·익건益健의 묘가 탑연리에 나란하다. 더불어 오창읍 양지리와 강내면 탑연리의 세 정려는 청주 지역에 뿌리내린 청풍김씨의 외연을 보여준다.
 

오창읍 양지리에 있는 청풍김씨 쌍효각은 김호철金好哲과 김호열金好說의 효행을 기리기 위해 세웠다.
강내면 탑연리에 있는 청풍김씨 김봉노金鳳魯, 1679~1748의 효자문이다.
강내면 탑연리에 있는 청풍김씨 쌍효각이다. 현종 때 쌀을 하사받은 김연金演, 1615~1687의 정려에 동생 김제金濟, 1617~1698를 1713년(숙종 39)에 합설하였다.


한편 청풍김씨 김윤의 유복자는 우후를 지낸 김숭의金崇義다. 그의 딸이 인천채씨 채무이蔡無易에게 시집갔다. 채무이가 처가에 들어와 살면서 인천채씨의 청주 세거가 시작되었다. 또 그의 딸이 한산이씨 이덕사李德泗에게 시집갔으니, 이제 막 청주에 터를 잡은 한산이씨와 혼맥으로 연결된 셈이다. 나아가 이덕사의 사위는 송시열宋時烈이니, 여기에 은진송씨를 보탤 수 있다.

채무이의 현손은 채지홍蔡之洪, 1683~1741이다. 그는 강문8학사江門八學士의 한 명으로, 송시열의 고제 권상하權尙夏의 제자이다. 채지홍은 일찍이 진천 문백 봉암으로 옮겨가 학문에 힘쓰고 제자를 길렀다. 제천의 황강黃江에 드나들며 스승 권상하에게 배우며 학문의 일가를 이루었다. 지금 진천 봉암에 그를 모셨던 사당 터가 남아있다. 그의 묘는 청원구 외남동, 오창과 진천을 바라보는 곳에 있다.역시 이들 성씨는 (구)안동김씨의 터전에 뿌리 내린 것이다.
 

청원구 주성동의 주성강당酒城講堂(문화재자료 제17호). 청주에 자리 잡은 한산이씨의 대표적인 인물인 이색李穡의 영정을 모신 곳이다. 가까운 내수읍 묵방리에는 한산이씨 묘역이 있다. 최근 이덕수李德洙, 1577~1645의 신도비(높이 337cm)를 비롯하여 이덕수 묘역이 충청북도 기념물 제159호로 지정되었다. 이덕수 신도비는 1663년 김상헌金尙憲이 짓고 송준길이 썼다.
강문8학사의 한 명인 채지홍의 묘소로 청원구 외남동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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