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세기 몰락한 조선 양반의 자화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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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세기 몰락한 조선 양반의 자화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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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승인 2017.06.29 13: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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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학자 조병덕의 편지를 분석한 하영휘의 <양반의 사생활>

나는 읽는다 고로 존재한다
류정환 시인, 충북작가회의

양반의 사생활 하영휘 지음 푸른역사 펴냄

“요즘 네 종제 문필을 보니, 너희 형제보다 훨씬 낫더라. 너는 마음속으로 부끄럽지 않으냐?”
“양식이 떨어지고 양식 살 돈이 없으면 전적으로 볏섬을 빌려 먹는데, 볏섬 수가 금년에는 작년보다 많고, 작년에는 재작년보다 많고, (…) 금년에는 꼭 20여 섬이 되고도 오히려 모자랄까 걱정이니, 내년 사정 또한 알 수 있다. 장차 반드시 살을 베어 배를 치우고, 배는 부르나 살이 다하고, 살이 다하여 죽을 뿐이다. 죽으면 죽었지, 누가 다시 돌아보고 동정이라도 하겠느냐? 양식이 이미 이러하니, 다른 일은 오히려 무슨 말을 하겠느냐.”

앞엣것은 누가 보아도 아들의 공부를 염려하는 양반가 아버지의 편지로 읽힌다. 그런데 뒤엣것을 양반이 쓴 편지라고 하면 믿을 사람이 몇이나 될까 싶다. 유교적 도덕과 명분을 목숨같이 내세우고 살며, 세속적인 모습을 남에게 드러내는 것을 수치로 알고, 겉으로는 금전을 만지는 것은 물론 입에 올리는 것조차 꺼리고……, 그것이 우리가 일반적으로 이해하고 있는 조선시대 양반의 모습 아닌가? 양반으로서 이렇게 궁색하고 구차하고 남우세스러운 사정을 시시콜콜 누구에게 써 보냈단 말인가. <양반의 사생활>은 유학자 조병덕이 쓴 1700여 통의 편지를 통해 조선 양반의 ‘사생활’을 적나라하게 보여준다.

조병덕(1800~1870)은 구한말 세도정치기에 이은 대원군 집정 시기의 유학자다. 노론 화족(華族)의 후손이었으나 부친과 조부까지 3대가 과거에 오르지 못하매 가문의 몰락을 피할 길이 없었다. 경제적 토대 없는 서울생활을 버티지 못하고 솔가하여 낙향한 부친을 따라 지금의 충남 보령군 미산면 삼계리에 터를 잡고 은거했다.

그는 당대의 거유(巨儒)로 명망이 있어 조정에서 음보(蔭補)로 벼슬을 내리고 불렀으나 응하지 않은 것으로 보인다. 조경모독(朝耕暮讀)과 자식기력(自食其力)을 이상으로 하여 스스로 생활을 닦아보려 했지만 현실의 벽에 부딪쳐 고전을 면치 못했다. 격변하는 세상은 기댈 곳 없이 유학의 이상만 품은 양반이 어찌해 볼 수 있는 지경이 아니었던 것이다.

‘도덕적 네트워크’에 의존한 양반생활

“보리는 벌써 떨어지고, 오직 동곡 이자우에게 꾼 벼 예닐곱 석으로 근근이 연명하는데 이것도 오늘내일 끊어지려 한다. 남원(남원 부사로 간 장조카 조봉희를 말한다)이 보낸 돈 중 서너 냥으로 장시에서 피보리를 살 계획이지만, 이것도 몹시 어렵다고 한다. 그밖에 다시는 입을 떼어볼 곳이 없으니, 햇곡을 먹을 때까지 가다리지도 못하고 굶어 죽을까 걱정이다.”

“종계전 200냥과 이자를 올 10월 10일 전까지 반드시 360냥을 채우고 난 후라야 비로소 종중의 큰 죄인이 됨을 면할 수 있다. 또 달마다 이자가 붙는 60여 냥 화급전이 있는데 8월이나 9월 사이에 구하면 난처함을 면할 수 있으나 역시 옴짝달싹할 수 없다.”

한두 명의 객은 그만두고라도 집안 식구만도 25명에 달했으니 기본 생활비가 만만찮은 데다 제사·장례·혼인·과거 등 양반의 신분과 체면을 유지하는 데 지출되는 비용이 벅차다 보니 나날이 빚이 늘어난 것이다. 이럴 때마다 조병덕은 벼슬살이 하는 친척, 재력 있는 제자 등에게 도움을 청했다. 요즘 식으로 말하자면 카드 돌려막기 수준인데, 알다시피 그런 방법의 끝은 파산이다. 결국 일이 생길 때마다 소와 농토를 팔아 감당하며 경제적 몰락의 길을 걸었음을, 편지는 말해준다.

또 생활비 외 문방사우, 육촉(초의 일종), 부채, 역(歷) 같은 물품이 필요할 때마다 구해 보내줄 것을 독촉하는 경우도 많았다. 시장보다 도덕적 네트워크에 경제를 의존한 것인데, 지방 수령의 청렴을 이상으로 여기면서도 집안 자제로부터의 증여와 선물을 관행으로 여기는 이율배반을 보이고 있는 것이다.

편지는 경제뿐만 아니라 사회·정치·교육 등을 생활의 모든 문제를 망라하여 소통하고 해결하는 ‘거의 유일한 수단’이었다. 도무지 아비의 말을 듣지 않고 토호질을 일삼는 아들을 나무라거나 부인과 며느리의 고부갈등을 하소연하는 것부터 관장과의 갈등을 조정의 요직에 있는 족숙(族叔)에게 청하여 무마하는 것까지 편지 말고는 달리 방도가 없었다. 흉년이 들면 양반은 편지로 살고 아전은 포흠(逋欠)으로 살고 기생은 웃음으로 산다던 옛말이 헛말이 아님을 실감할 수 있다.

수많은 편지들은, ‘죽일 수는 있어도 욕보일 수는 없다’는 기개로 사회를 쥐락펴락하던 절대 계급이 노도와도 같은 변화요구를 그저 ‘변괴’라고 탄식하며 속수무책으로 무너지던 때의 사회 흐름을 ‘측은하게’ 전해 준다. 한편으로, 편지를 맡아 전하고 답장을 받아오던 인편·전인의 왕래를 통해 관계망을 구축하고 유지하던 통신 시스템을 확인하는 재미 또한 쏠쏠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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