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민식의 ‘톡톡 튀는 청주史’

진천 가는 길

지금 내수 읍내는 장이 서고 충북선 철도역이 생기며 큰 도회를 이룬다. 그렇지만 예전에는 비중리 석조삼존불좌상과 낭비성·노고성을 지나 반탄磻灘을 건너거나 초평으로 갔다. 지금도 대길리를 지나 북이면 사무소 앞에서 증평IC 앞으로 통하는 옛 길(지방도 511번)이 있다. 아니면 옛 국도를 따라 북이초등학교 앞을 지나 내추리를 거쳐 갈 수도 있다. 이 길에서 청주의 진면목을 만날 수 있다.

『세종실록』 지리지에 청주의 토성 13개 성姓이 있다. 청주를 본관으로 하는 성씨를 말한다. 그중 지금도 청주 지역에서 두드러진 성씨는 청주한씨 정도이다. 그런데 고려 때 가장 빈번히 사서에 보이는 성씨는 바로 청주곽씨이다. 이들 청주곽씨의 발생지가 북이면 내추리이다. 그리고 이로부터 지금도 득세하는 여러 성씨들이 처가 혹은 외가로 들어오며 세거하기 시작하였다.
 

북이면 내추리 마을 북쪽, 청주곽씨의 발생지에 커다란 세거공원을 만들어 놓았다.

청주곽씨의 발생지에는 문중에서 자랑하는 대형 기념비를 만들어 놓았다. 세계기록에 올랐다는 자랑이 끊이지 않는다. 그러나 이곳에 살고 있는 청주곽씨는 거의 없다. 일찍부터 인근 지역으로 옮겨가고* 지금은 오히려 파평윤씨의 비중이 높다.

내추리 쟁골 마을로 들어서기 전 기와집이 연이어 있다. 파평윤씨의 사당인 세덕사世德祠와 문숙영당文肅影堂이다. 세덕사는 파평윤씨 입향조인 윤형尹炯, 1388~1453의 위패를 모신 사당이다. 그리고 문숙영당은 호남사湖南祠라 하는데, 바로 고려 때여진 정벌로 유명한 윤관尹瓘의 영정을 모신 곳이다.

윤형이 청주곽씨 13세 곽순郭恂의 딸에게 장가들어 청주로 오며 파평윤씨의 청주 세거가 시작되었다. 그러니 파평윤씨 후손들은 자연 자신들의 입향조이며 세조 때 좌익공신에 오른 윤형을 드러낸 것이다. 그러나 이후 두드러진 인물은 없었던 듯하다. 그것은 우리 역사에 이름을 남긴 윤관의 영정을 그려 모신 연유이기도 하다. 오히려 파평윤씨의 자취는 미원면 옥화리 일대에서 찾을 수 있다.

이들 파평윤씨는 다시 안정라씨와 연안김씨, 그리고 초계변씨와 연이어 혼맥을 이룬다. 앞의 비중리 석조삼존불좌상의 소유도 초계변씨 종중이다. 내수읍 비중리 안정라씨와 초계변씨의 뿌리는 바로 청주곽씨에 있는 셈이다. 한편 청주곽씨는 고려 말 전주최씨가 청주에 살게 된 터전이었다. 8세 곽예郭預는 최득평崔得枰, 1260~1334을 사위로 맞았다. 그의 인물 됨됨이에 반해 그를 청주로 불러 살게 하였다. 이로써 가까운 대율리에 전주최씨가 뿌리내리게 되었다.
 

북이초등학교에서 내추리로 들어서면 호남사와 세덕사를 만날 수 있다. 길가에 홍살문을 세우고 ‘문숙공 윤관장군 영정 호남사, 공간공 윤형 불천지위 세덕사’란 표석을 세웠다.

무엇이 대의大義인가

과거 군사정권 시절 우리 역사에선 극명한 평가를 서슴지 않았다. 무능한 조정과 뛰어난 무장 이순신, 그리고 의병이 그러했고, 직후의 병자호란 때도 마찬가지였다. 특히 병자호란 때는 척화파와 주화파를 떠올리는 경우가 많을 것이다. 청에 굴복하지 않았던 김상헌이나 삼학사, 홍익한·윤집·오달제는 충忠의 상징이었다. 반면 일부는 주화파라 하여 마치 매국인 양 서술하였다.

그 주화파의 대표 인물인 최명길崔明吉, 1586~1647의 묘가 이곳에 있다. 불과 몇 해 전 『남한산성』이라는 소설을 통해 비로소 대중적 명예를 회복하였다. 한 몸 죽어 절의를 지키는 것은 쉬워도 진정 나라와 백성을 위하는 것이 무엇인지 고민했던 그였다. 그리고 그의 손자가 숙종 때의 유명한 영의정 최석정崔錫鼎, 1646~1715이다. 당쟁의 혼란 속에서 포용의 정치를 펼친 인물이다.

옛 길에서 만난 독립운동의 산실, 강화학파江華學派의 자취 

최석정의 묘는 찾기가 쉽지 않았다. 일체의 석물을 꾸미지 말라는 유언에 따라 제대로 비조차 세우지 않았다. 그나마 최근 후손들이 세운 작은 표석으로 묘의 주인을 알 수 있다. 그 뒷면, 그의 학문은 조부 최명길로부터 이어진 양명학陽明學의 전통이었다는 글귀. 양명학은 명나라 때의 유학으로 잘 알려져 있다. 그렇지만 성리학적 교조주의는 그마저 사문난적斯文亂賊으로 몰기 일쑤였다.
 

북이면 대율리 마을 안쪽에 최석정의 묘소가 있다. 유언에 따라 묘비를 세우지 않아 찾기 어렵다. 다행히 후손들이 작은 표석을 마련하여 주인공을 확인할 수 있다.
진천 초평에 있는 지산서원芝山書院의 터. 지금은 초평초등학교가 들어서 있다. 지산서원은 1722년(경종 2) 그의 제자들이 최석정의 학문을 기리기 위해 세웠다.

양명학은 조선에서 그를 발전시킨 정제두鄭齊斗, 1649~1736가 살던 곳을 빗대어 강화학, 강화학파라 부른다. 강화도라는 궁벽진 곳을 택했던 당시의 분위기를 엿볼 수 있다. 그의 스승 박세채朴世采, 1631~1695와 함께 새로운 세상의 가치를 고민했다. 이 양명학은 우리가 잘 아는 이시영李時榮 형제와 이상설李相卨 등 독립군 기지의 토대를 이룬 독립운동가의 정신적 지주이기도 했다. 또 위당 정인보鄭寅普는 어떤가. 경주이씨 이하곤李夏坤이 세운 초평 완위각宛委閣에 모인 양명학자들의 발자취는 독립운동사의 큰 줄기였다.

최석정의 부인은 초평 경주이씨였다. 이시발의 아들, 좌의정 이경억李慶億, 1620~1673의 사위였다. 그리고 일찍이 단종 복위사건으로 목숨을 잃은 금성대군錦城大君의 부인이 전주최씨였다. 그 후손들이 진천 초평과 북이면 용계리에 세거한다. 초평 용기리 수의 마을에 금성대군의 사당이 있는 까닭이다. 미호천의 반탄磻灘은 소론의 명문 세 가문을 잇던 물줄기였다.
 

북이면 대율리의 최명길 묘소와 신도비. 묘소는 3기의 봉분이며 묘표는 영의정 남구만南九萬이 썼다. 신도비는 1702년(숙종 28)에 세운 것으로 박세당朴世堂이 짓고 최창대가 썼다. 높이 410cm.

대율리 대밤이 마을 안쪽 낮은 산자락에 전주최씨의 묘가 있다. 입향조의 아들인 최재崔宰로부터 최명길과 최석정, 그리고 최창대崔昌大로 이어지는 명문가의 무덤이다. 이곳은 마을 입구에 그들의 세거를 알리는 표석과 8세 최유경崔有慶의 효자각이 방문객을 맞는다. 그러나 마을에 들어선 공장이 순례의 길을 막아선다. 용케 찾은 최명길의 묘소(충청북도 기념물 제68호)와 신도비(충청북도 유형문화재 제59호)에서 남한산성의 치욕을 되새긴다. 그리고 다시 최석정 부자의 묘 앞에서 시대를 고민했던 옛 사람을 그려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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