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사 격외도리/ 한덕현 충청리뷰 발행인

한덕현 충청리뷰 발행인

문재인 대통령의 탈권위적인 행보가 계속 화제를 일으키고 있다. 지난 12일의 국회 시정연설 역시 지금까지와는 달랐다. 본회의장 스크린에 파워포인트가 등장하고 각종 이미지와 그래프, 도표등도 가미돼 딱딱하기 그지없던 전임 대통령과는 극명하게 대조를 이뤘다. 연설이 끝나고 나서는 야당 의석까지 일일이 찾아가 의원들과 악수를 나누기도 했다.

이날 청와대는 한 술 더떠 취임 후 대통령의 서민적인 행보를 4가지 일화로 묶어 페이스북을 통해 공개했다. ‘친절한 대통령’이라는 제목을 단 이 내용은 문 대통령이 청와대 직원식당과 청와대 뒷산길, 청와대 본관 2층, 청와대 앞 분수광장 등에서 참모와 직원, 그리고 일반시민들과 격의없는 스킨십을 한 것을 일목요연하게 소개한 것이다.

이처럼 친절한 대통령을 만나게 된 것은 국민들로선 분명 행운이다. 과거 권위주의적인 정권에선 꿈도 못꾸던 시츄에이션이 아닌가. ‘인간 문재인’은 자타가 공인하는 선한 사람이다. 이는 대통령이 아니라 그보다 더한 자리에 오른다고 해도 변하지 않을 것이다. 정치인이 되기 한참 이전인 모교 경희대학교 고시반에서 함께 공부했던 이들이 문 대통령에 대해 최우선으로 꼽는 것도 예외없이 ‘인간성’이다. 후배들에게 문재인은 무슨 선배나 동문이 아닌 여전히 ‘재인이 형’으로 남아있다.

하지만 이런식의 대통령 신변 얘기는 이제 언론에서 사라졌으면 한다. 지금까지는 이른바 임기 초기의 ‘허니문 기간’ 때문이라고 하더라도 더 이상은 식상하다는 것이다. 청와대 또한 앞으로도 이런 보도자료에 집착한다면 촌스러울 뿐이다. 청와대가 할 일은 대통령의 주변이나 좇아가며 미담을 만들어내는 게 아니다.

안타깝게도 나라를 이끄는 지도자의 리더십은 선(善)보다는 악(惡)의 요소를 더 필요로 하는 경우가 많다. 역사가 이를 증명한다. 인류 문명사에 큰 족적을 남긴 그 어떤 지도자도 선한 인간성 즉 착한니즘만으로 자신의 뜻을 이루지는 못했다. 끝없이 투쟁하고 때로는 정적을 죽이기까지 했다. 어차피 권력이란 것은 나눔과 분배, 공유의 대상이 될 수 없다. 원초적인 속성이 그렇다. 사람 두명만 모여도 거기엔 반드시 갈등과 반목이 생겨나는 게 인간사다.

문재인 대통령이 전임 대통령 누구보다도 야당과의 협치,소통을 강조한 것은 백번이고 맞다. 지역으로 갈리고 이념으로 두동강 난 나라의 현실에서 어쨌든 서로가 반쪽을 포용하지 않고선 어떤 통치행위도 성공할 수 없다. 그렇다고 해서 권력이 나눠지고 공유되는 건 아니다. 그 것을 빙자한 타협과 양보, 담판이 있을 뿐이다.

국회 청문회 앞에서 번번이 발목이 잡히는 작금의 문 대통령을 보면 국가 현안에서 모든 걸 포용하고 또 이해를 구하겠다는 선의의 리더십이 얼마나 공허한지를 실체적 사실로써 확인시켜 주고 있다. 권력의 세계에서는 착한 사마리아인은 애초부터 없다.

이를 안다면 문재인 대통령이 택할 길은 분명해졌다. 우선 시대 변화에 맞춘 대통령의 권위를 확실히 곧추세우는 것이다. 전임 대통령의 비극은 이 권위를 잘못 이해하고 또 그릇되게 받아들인 데서 출발했다. 참된 권위는 당사자의 의지나 의도로 세워지는 게 결코 아니다. 국민들이 감동하고 스스로 이를 받아들일 마음이 전제될 때 비로소 국가 지도자로서의 진정한 리더십은 확보된다. 이를 보장하는 첫번째 조건은 정직과 기본 그리고 원칙을 벗어나지 않으려는 지도자의 자발적 내성인 것이다.

박근혜의 추락은 이 것들과 반대되는 처신에서 비롯됐다. 대통령의 권위를 국민의 감동이 아닌 스스로의 작위적 발상에서 찾으려 했고 국가운영의 기본과 원칙은 국가권력을 아예 최순실이라는 사인(私人)에게 위임함으로써 일찌감치 종을 치게 했다. 청와대 참모회의에선 “참 나쁜 사람”이라고 일갈해 멀쩡한 고위공무원을 쫓아냈는가 하면 장관들에게는 레이저 눈빛을 쏘아대며 대통령 권위를 반(反)이성의 권위주의로 변질시키는 바람에 나라를 힘들게 했다.

이같은 인위적 권위에 대한 집착은 리더가 아닌 우상(偶像)을 만들다가 끝내 종언을 고하는 사례를 우리는 수도없이 보아왔다. 권좌에서 쫓겨나 토굴속에 숨어있다가 끌려나와 비참한 최후를 맞은 후세인이 그렇고 하루만에 대통령에서 도망자 신세로 전락, 지하 하수구로 숨어들었다가 성난 군중들에게 붙잡혀 무참히 살해된 카다피가 그렇다.
 

문재인 대통령이 청와대 경내를 거닐며 참모진과 대화하고 있다. / 뉴시스

‘친절한 대통령’ 문재인은 이미 국민들에게 많은 감동을 안기고도 남는다. 대통령도 어차피 사람이 하는 일이기에 이미 지난 정치역정을 통해 인간성을 검증받아 온 문 대통령은 누구보다도 국민을 위하고 국민과 함께할 수 있는 대통령의 조건을 갖췄다.

하지만 이것이 전부는 아니다. 이 시점에서 정작 국민들이 바라는 것은 친절한 리더십보다도 새로운 나라를 세우겠다는 대통령으로서의 굳건한 의지, 카리스마와 결단력이다. 그저 자신을 낮추고 권위를 없앤다고 해서 좋은 대통령이 되는 건 아니다. 박근혜의 실패는 친박 윤상현이 공적인 자리에서조차 ‘누나’라고 부를 때 이미 예고됐다. 손주에게 오냐 오냐만 했다가는 종국엔 할아버지 수염까지 뜯긴다는 옛 사람들의 얘기는 틀리지 않다.

어차피 정부와 여당의 입장에선 늘 권력을 다퉈야 하는 야당은 전략적 파트너는 가능할망정 절대로 선의적 파트너가 될 수는 없다. 이는 현실이다. 그러기에 꽉막힌 인사청문회를 푸는 방법 또한 전략적이어야 한다. 관철시킬 건 대차게 밀어붙이되 양보할 건 과감하게 양보하는 대통령으로서의 결단력이다. 이런 선제적 결기를 보여주지 못한다면 착한 대통령 문재인은 앞으로도 끊임없이 야당의 어깃장에 휘둘리게 된다.

한가지 바람이 있다면 이번 청문회 과정에선 장관 후보들의 자질 뿐만 아니라 목소리를 높이는 국회의원들의 실체도 밝혀졌으면 하는 것이다. 그들 중엔 참으로 추잡하고 비열하고 부도덕한 이들이 있다. 누구(?)처럼 말이다. 이들을 가려내고 응징하는 일은 역시 광화문의 무혈혁명을 가능케 한 국민들의 몫인 것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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