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의 직언직썰/ 정석 서울시립대 도시공학과 교수

정석 서울시립대 도시공학과 교수

55년 삶을 살아오면서 하길 참 잘했다 싶은 게 몇 가지 있는데 그 중 하나가 텃밭농사의 경험이다. 손바닥만 한 작은 땅에서 뭔가를 키우고 돌보면서 아주 귀한 것들을 발견했다. 값진 보물을 찾았으니 텃밭은 내게 보물창고였고, 인생을 살아가는 지혜를 깨닫게 해주었으니 텃밭은 내 삶의 스승이었다.

텃밭의 기억은 꽤 오래 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초등학교 2학년 때 이사 가서 30여년을 내내 살았던 전주 진북동 우리 집, 마당의 대부분은 텃밭이었고 너른 밭에 온갖 동물들이 함께 살았다. 강아지는 말할 것도 없고 칠면조와 꿩을 키우기도 했다. 시골에 사시던 외삼촌이 두꺼비를 잡아와 마당에 풀어 놓은 적이 있는데, 느릿느릿 걷던 두꺼비가 번개처럼 파리나 곤충을 낚아채는 걸 보는 재미는 영화보다 더했다.

어렸을 적 우리 집 텃밭은 내게 그저 구경거리였다. 풀을 뽑거나 농사를 도와야 할 때는 마지못해 했을 뿐이다. 대학시절 잠실 4단지 아파트에 살 때, 손자손녀들을 돌보려 서울에 올라오신 외할머니께서 지금 롯데월드 자리의 빈 땅에서 늘 텃밭농사를 지으셨는데 그때에도 낼름낼름 받아먹을 줄만 알았지 농사에는 관심이 전혀 없었다.

내손으로 농사를 처음 지어본 건 2004년 고양시 덕이동에서였다. 발달장애아 부모들의 모임 <기쁨터>에서 작은 텃밭을 분양해 처음 참여했고, 그 뒤로 돌풍농장과 신안농장에서 이웃들과 함께 주말농장 경험을 이어갔다. 서울 강남으로 이사 온 뒤에도 자곡농장, 다둥이농장, 신촌농장에서 농사를 지었고, 2012년 율현동 방죽마을의 마당이 있는 집으로 이사 온 뒤에는 마당 한구석에 밭을 갈았으니 얼치기 농부로 살아온 게 10년을 넘겼다.

텃밭에서 내가 발견한 첫 번째 보물은 ‘세상에서 가장 맛난 음식’이었다. 처음 농사를 지어 거둔 어린 새싹들로 비빔밥을 만들어 먹던 날 제왕의 밥상이 부럽지 않았다. 황홀했다. 채소를 좋아하지 않던 아이들도 제 손으로 씨 뿌려 거둔 것들이 특별했는지 밥 한 톨 남기지 않고 그릇을 비웠다.

어린 새싹들을 수북이 손에 올려 쌈을 싸서 드시는 걸 좋아하는 아버지께 손수 기른 상추, 쑥갓, 열무, 얼갈이배추의 어린 싹들을 가져다 드리는 재미도 쏠쏠했다. 가을배추를 심고 벌레와의 전쟁을 치른 뒤 쑥쑥 자라는 배추밭에 물을 줄 때는 덩실덩실 춤을 추었다. 70여 포기 배추를 거두어 김장을 할 땐 날을 꼬박 새어도 힘든 줄 몰랐고, 세상에서 제일 맛난 김치를 먹는 호사를 누렸다.

텃밭에서 얻은 두 번째 보물은 ‘삶의 지혜’다. 씨앗을 뿌려놓고 언제 싹이 나올지 몰라 매일같이 밭에 갔다 실망해 돌아오곤 했는데, 어느 날 그 어린 싹들이 두꺼운 땅거죽을 가르고 고개를 내밀며 세상에 나오는 걸 보고 깜짝 놀랐다. 작은 씨앗과 모종들이 수십 배 수백 배 크기로 자라는 걸 보며 생명의 힘을 깨달았다. 농부와 아빠와 선생의 공통점이 있다는 걸 그때 알았다. 작은 몸 안에 숨겨진 놀라운 생명력에 대한 바위 같은 믿음, 때가 이르면 쑥쑥 자랄 것이라는 든든한 소망, 모자라지 않게 흠뻑 주는 칭찬과 격려와 사랑이 농부에게도, 아빠에게도, 선생에게도 필요하다는 걸 몸으로 배웠다.

텃밭에서 얻은 세 번째 보물은 ‘쉼과 놀이 그리고 치유와 자유’였다. 아침 일찍 밭에 가면 그저 좋았다. 고요한 아침 밭, 뻐꾸기 소리, 쑥갓 향, 잔잔히 불어오는 바람이 마냥 좋았다. 밭에 가서 일을 하고 온 게 아니라 쉬고 왔다. 밭에서 했던 건 일이 아닌 놀이였다. 세상에서 가장 재미있는 놀이다.

땅을 찢고 밀어 올리며 고개를 내미는 새싹을 봐라. 이만큼 재미있는 드라마가 있을까. 마음앓이가 심하던 때 밭에 오면 마음이 편했다. 마음 흔들어대던 것들이 사라져 고요하고 잠잠해졌다. 쪼그려 앉아 풀 뽑고, 일어나 물주면 한 시간이 금방 흘렀다. 내가 밭을 돌본 게 아니라 밭이 나를 돌봐주었다. 텃밭은 치유의 장소였고, 밭은 내게 자유를 주었다.

내가 밭에서 발견한 보물들은 아주 많다. 세상에서 가장 맛난 음식들을 얻었고, 농사짓는 법만이 아니라 생명을 돌보고 키우는 지혜를 배웠다. 텃밭에서 편히 쉬었고, 가장 재미있는 놀이를 즐겼다. 아픈 나를 치유하고 해방시켜준 텃밭. 텃밭의 보물들을 이제 그대와 나누고 싶다. 당신을 도시텃밭으로 초대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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