통합과 포용의 길, 북이면의 옛 길
신라의 북진로, 그리고 강화학파江華學派의 자취<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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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합과 포용의 길, 북이면의 옛 길
신라의 북진로, 그리고 강화학파江華學派의 자취<1>
  • 충북인뉴스
  • 승인 2017.06.12 13: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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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민식의 ‘톡톡 튀는 청주史’

신라군, 징검다리 건너듯 북으로 향하다

낭비성에 올랐다. 북이면 부연2리 은선 마을 끝 과수원까지 닿은 농로에 차를 세우고 낭비성에 올랐다. 낭비성 남쪽 과수원 끝자락에 흘러내린 성돌이 답사객을 맞는다. 멧돼지의 출몰 소문에 산길은 인적이 끊긴 지 오래다. 그나마 성벽 가까이의 희미한 인적을 따라 가면 가까스로 성 한바퀴를 돌 수 있다.

해발 255.5m의 산 정상을 두른 둘레 733m 이상의 산성. 성벽은 대부분 무너지고 북쪽 일부에 무너진 성돌 틈에 약간씩 남아있다. 대부분 성돌이 흘러 내려 토성처럼 보였던지 남동쪽 마을이 토성리土城里다. 분명 돌로 쌓은 높은 성벽이 있었을텐데 세월이 지나며 산성의 자취가 희미한 둔덕만 남아있다. 마을 가까이 낮은 곳의 무너진 성돌은 마을 주민들이 쉬 가져다 쓸 수 있었고, 땅꾼들이 파헤쳐 훼손도 심하다.
 

부연리 은선 마을을 통해 산성에 오르면 무너진 성돌이 먼저 드러난다. 북쪽으로 성벽을 돌면 제법 남아있는 낭비성의 모습을 만날 수 있다.


보은 삼년산성을 출발한 신라군은 미원 낭성산성을 거쳐 구라산성謳羅山城·九女城에 올랐다. 구라산성에서 바라본 북쪽 너른 들녘 건너 저만치 병풍 같은 두타산이 있다. 그곳 꼭대기에도 신라가 쌓은 산성이 있다. 낭비성을 징검다리 삼아 북으로 내달았을 신라군.

산성을 쌓은 이들은 산꼭대기와 남쪽의 높은 계곡을 끼고 성벽을 쌓아 안쪽에 많은 공간을 확보하였다. 많은 인원이 들어설 수 있고, 물을 확보하려는 의도였다. 신라 산성의 전형이 이와 같다. 교통로를 지키려는 의지였다.

삼국이 다투던 전장터

이곳에 전하는 이야기가 있다. 낭비성은 신라가, 노고성은 백제가 차지하여 서로 다투었다고 한다. 혹은 낭비성 맞은쪽의 노고성을 낭비성에 딸린 창고성 정도로 보기도 한다. 남쪽으로 1.5km 거리에 비슷한 크기의 노고성이 있으니 이 인근의 가치를 새삼 느끼게 한다. 낭비성에 대한 최초의 기록은 일제강점기의 『조선보물고적조사자료』이다. 여기에 북이면 부연리의 낭비성狼臂城을 간략히 정리하였다. 무너진 성벽과 둘레 430간間의 둘레, 그리고 629년 김유신(595~673)의 참전 기사이다. 낭娘·狼 자를 달리 쓰긴 했어도, 신라의 명장 김유신의 데뷔전인 낭비성娘臂城 전투를 이곳으로 비정한 것은 주목할 만하다.

“629년(진평왕 51) 가을 8월 왕이 대장군 용춘龍春과 서현舒玄, 부장군 유신庾信을 보내 고구려의 낭비성을 공격하여… 여러 군사가 승세를 타고 북을 치며 진격하여 5천여 명의 목을 베어 죽이니 그 성이 항복하였다.” 『삼국사기』 진평왕 51년.

백제가 멸망할 때 등장했던 관창처럼 김유신도 선봉에 서서 적을 무찔렀다. 낭비성 전투에 김유신과 함께 참전한 아버지 김서현도 보인다. 사실 김해가야의 왕족 출신인 이들 김씨 3대의 생존기는 눈물겹다. 역사에 그러하듯 항복한 왕족은 목숨을 부지하기 어려웠다. 언제든 반란을 일으킬지 모른다는 혐의와 그들이 가지고 있던 재화를 그냥 둘리 없었다.

김해가야의 마지막 왕, 구해왕. 그의 셋째 아들 김무력은 다른 형들과 달리 신라군의 전투에 적극 참전한다. 우리 고장, 단양의 적성비에 그의 이름이 있다. 사량부 무력지 아간지沙喙部 武力智 阿干支. 신라의 17관등 중 6위에 해당하는 벼슬로 550년경 단양 전투에 참전하여 공을 세웠다. 그리고 한강 하류의 신주新州 군주軍主로 최전선에서 싸웠다. 554년 관산성 전투가 벌어져 신라군이 크게 패하자 멀리 옥천까지 달려가 신라군을 구하고 성왕을 목베었다. 이후 승기를 잡은 신라는 결국 백제를 멸망시킬 수 있었다.

그의 아들 김서현은 또 어떤가. 사랑하는 만명부인을 임신시키고도 결혼하지 못하고 흑양군, 지금의 진천 태수로 부임하였다. 결국 갇힌 광을 뚫고 탈출한 부인을 만나 그곳에서 김유신을 낳았다. 김유신의 태는 태령산胎靈山 꼭대기에 묻었다. 같은 진골이라도 항복한 가야 출신 귀족의 신분 차별은 이처럼 극적인 만남이 필요했는지 모른다.

차라리 김유신은 때를 잘 만났을 지도 모른다. 왕위 계승 후보에서 밀려난 김춘추와의 만남. 그들은 선덕과 진덕 여왕을 도와 백제와 고구려의 공격을 막아내며 재기를 꿈꿀 수 있었다. 그래서 전해진 이야기가 여동생의 꿈이다.

꿈을 산 동생이 결국 왕비에 오르며 그의 아들 문무왕이 삼국 통합을 이룰 수 있었다. 의혹의 눈초리 속에서 최전선을 전전하던 3대의 생존기는 신라의 삼국 통합의 역사다. 그리고 그들은 낭비성 앞길을 따라 북으로 향했다. 할아버지는 고구려와 접경인 한강 이북으로, 아버지 김서현은 여러 전장을 거쳐 진천에, 그리고 김유신은 전방위적인 활약을 펼쳤다.

낭비성은 어디인가

한편 낭비성은 이곳이 아니라 경기도 포천 지역으로 보는 견해가 있다. 김유신이 고구려의 낭비성을 공략했다고 하니 고구려의 남쪽 경계를 주목한 것이다. 이미 진흥왕 때 신라가 한강 유역을 차지한 후 고구려는 더 이상 내려오지 못했다고 한다. 따라서 고구려 낭비성은 한강 하류 근처라 한다. 게다가 포천의 옛 이름마저 비성군臂城郡이다.

그러나 7세기 때 고구려의 반격으로 함경도까지 올라갔던 신라가 후퇴하고 있던 상황에서 그리만 볼 수 있을까 싶다. 또한 김유신의 활동 반경은 고구려는 물론 백제와 거듭 전투를 벌여 가늠하기 힘들 정도다. 따라서 신라왕이 나서서 당나라의 원군을 청할 정도로 신라가 위기에 빠졌다함은 곧 고구려의 남하를 예상할 수 있다. 옛 기록에 등장하는 낭비성을 처음 우리 지역에 비정한 연구자들은 고민이 없었을까. 물론 이곳 낭비성에서 고구려 유물이 나온다면 더할 나위가 없겠지만.

다시 옛 길에 서서

옛 사람들은 구라산성을 내려와 초정에서 목을 축이고 다시 북쪽으로 길을 재촉했다. 짧지 않은 여정. 그래서 사람들은 안녕을 바라며 절대자를 찾았을 것이다. 마침 그곳에 우리나라에서 보기 드문 부처 세 분이 길을 지키고 있다.

청주 비중리 석조삼존불좌상(충청북도 유형문화재 제114호)이다. 하나의 돌에 세 부처를 모셨다 하여 일광삼존불一光三尊佛이라 불렀다. 깨어진 것을 모아 놓았으니 엉거주춤한 모양이다. 지금 왼쪽의 보살은 없다.
 

비중리 석조삼본불좌상은 불상을 만든 주체에 대해 여전히 논란이 있지만 6세기 중엽 이후 북진하던 신라가 만든 것으로 보고 있다.


가운데 불상은 머리가 깨어지고 그나마 희미하게 남아있는 두 손은 시무외施無畏 여원인與願印을 하였다. 결가부좌한 다리 밑엔 작은 크기의 삼존불과 두 마리의 사자가 본존불을 받치고 있다. 네모꼴의 커다란 광배와 머리 뒤의 두광頭光이 있다. 바깥쪽으로 작은 불상인 화불化佛을 대좌 부분까지 5기씩 배치하였다. 아래쪽을 잃은 오른쪽 보살은 머리칼이 양쪽으로 늘어지고 허리 아래에 X자형의 띠와 늘어진 옷자락이 특징이다. 이러한 특징으로 6세기 중반 이후 신라가 만든 불상으로 보고 있다.

삼존불좌상은 보호각 안에 있고, 그 앞쪽에 석조여래입상과 광배가 있다. 훼손이 심한 여래입상은 광배도 함께 한 돌에 조각하였다. 윗부분은 마멸이 심하다. 함께 서 있는 광배는 앞쪽에 입불상이 있었을 것이다. 윗부분에 화불 하나, 좌우 2기씩 조각하였다.

1978년 처음 발견 당시부터 깨어져 흩어진 채 발견되어 참혹한 과거를 말하는 듯하다. 이곳에 대한 두 차례의 학술조사가 있었지만 절터를 확인할 수 없었다. 시간이 오래되어 자취를 잃은 것인지, 아니면 다른 곳에서 옮겨온 것인지 알 수 없다. 불상을 만든 나라가 어디든 적어도 고려시대까지는 불상이 온전할 수 있었을 것이다. 아무래도 불교를 탄압했던 조선시대에 혐의를 둘 수 밖에 없다. 가운데 불상의 머리에서 어깨 부분은 의도적인 파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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