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강의 물줄기를 따라, 낭성·미원면<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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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강의 물줄기를 따라, 낭성·미원면<2>
  • 충북인뉴스
  • 승인 2017.06.05 14: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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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민식의 ‘톡톡 튀는 청주史’

단재丹齋, 자란 곳에 묻히다

가덕면 고령신씨 일가의 독립운동은 낭성면에 이어진다. 낭성면 관정리의 영성군파 후손들 중에도 다수의 독립운동가가 있다. 반면 가덕면 일대는 신숙주의 넷째 고천군과 소한공 후손이 다수이고, 신규식·신건식 형제는 소한공의 후예들이다. 고천군의 후손으로는 바로 단재 신채호申采浩, 1880~1936 선생이 있다.

낭성면 귀래리는 우리가 잘 알고 있는 단재 신채호사당 및 묘소(충청북도 기념물 제90호)가 있다. 대전에서 태어나 이곳에서 유년을 보낸 후 사후 이곳에 묘를 마련하였다. 원래 남향으로 묘를 만들었다가 다시 뒤쪽 자락으로 이장하였다.
 

1978~1979년 사이 묘역을 정화하고 앞면 3칸, 옆면 1칸 맞배지붕의 사당을 새로 세웠다. 앞면에 ‘단재영각丹齋影閣’이라 하였다.


1728년 무신란, 주동자로 참가한 신천영의 직계는 거의가 살아남지 못했을 것이다. 소위 역적에게 주어진 형벌은 죽음 외에도 이후 자손들이 과거 응시가 불가능하였다. 물론 직계에 해당하지만 방계 또한 불이익을 감수해야했을 것이다.

그런데 우리 지역에서 가장 많은 독립운동가를 배출한 가문이니, 아이러니하다. 15인 이상이 독립운동가로 포상을 받았으니 그 가풍은 어디서 연유한것인지. 일제강점기 이들에게 또 차별과 억압이 끊이지 않았다. 단재 선생이 그랬고, 임정의 주축을 이루었던 인물들. 독립군을 숨겨주었다는 이유로 고가를 불태운 왜경들의 횡포까지.

가덕에서 미원에 이르는 길은 새로운 세상을 꿈꾸던 이들이 걷던 길이다.

미원 삼거리, 머뭇거린 신라군

대중교통을 이용하여 보은이나 상주로 향하면 꼭 미원을 거친다. 이 길에서 국도 19번과 만난다. 강원도 홍천 쯤에서 수직으로 내려온 국도가 충주와 괴산을 거쳐 다시 남으로 향한다. 국도의 끝은 경남 남해다. 거꾸로 섬진강을 따라온, 혹은 백두대간을 넘어온 남쪽 사람들이 북으로 향하던 길이다.

그 옛날 삼국이 서로 길을 찾아 나서던 때 이 길은 번잡했다. 처음 백제가 남해안으로 가던 길이었고, 가야 또한 이 길로 백제와 교류했다. 반면 신라가 영토를 넓혀갈 때도 이 길을 놓지 않았다. 470년 보은 삼년산성을 쌓은 신라군은 불과 4년만에 문의에 산성을 쌓아 금강에 닿았다. 또 곧바로 북진하여 미원을 거쳐 진천으로 향했다. 미원 3거리는 삼국의 갈림길이다. 북으로, 남으로 향하던 이들이 거쳐간 곳이다.

신라는 교통의 요충에 성을 쌓았으니 미원면 소재지 남쪽의 낭성산성이다. 어떤 이는 여기서 우륵이 가야금을 연주했다고 하고, 청주의 첫 거점이라고도 한다. 낭성면의 유래가 이 산성일 수도 있으나, 지금은 미원면에 속한다.

문의 양성산성과 낭성까지 다다른 신라군은 지척의 청주를 그저 바라보고 있었다. 물론 이때 백제와 신라는 동맹관계를 맺어 고구려군의 남하를 막아내고 있었다. 백제의 입장에서는 신라군을 최대한 전선 가까이 끌어들여 연합군을 이루려 하였다. 신라 입장에서는 싫지 않은 조건이었다. 마침 475년 장수왕의 공격으로 한성이 함락된 후 피난 수도로 옮긴 곳이 웅진, 공주였다. 문의에서 30여 km에 불과한 반나절 거리다. 어쩌면 온전한 신라군이 의도한 것일지도 모른다. 그래서 꽤나 오랫 동안 백제는 신라군에 이끌려 전선을 전전했는지도 모른다. 거점을 차지한 신라와 더 이상 물러설 곳이 없던 궁색한 백제의 현실이었다. 그래서 신라군이 근 70~80년 가까이 목전의 청주를 그저 바라보기만 하고 차지하지 않은 이유인가 보다.
 

사당 뒤에 있던 묘소를 옮겨온 것으로 어린 시절 살던 집터이다. 묘소에는 한용운 등이 세운 묘표석과 1972년 세운 사적비가 있다.


다시 옛길에서

고속도로가 놓이고, 고속철도가 전국을 연결하면서 이제 옛길은 불편함으로 기억된다. 미원의 3거리는 삼국시대의 큰 길이었고, 왕건이 이 길에서 후백제를 막고 신라와 통했다. 또 이후 중앙과 지역을 연결하는 주요 교통로였다. 임진왜란 때 왜군도 이 길로 갔다. 특히 백두대간의 준령을 쉽게 넘을 수 있는 곳이었다. 자연 이곳은 끊임없는 소통의 공간이었다. 산길이 트인 곳을 물길이 지나듯 자연에 의지해 살던 사람들의 수많은 자취를 이야기할 수 있는 공간이

다.

옛길은 불편하다. 그러나 산과 물을 따라 크게 어긋나지 않게 뼈대와 심줄을 엮었다. 이 길도 어김없이 확장공사가 한창이다. 빠른 만큼 효율이 앞선다. 무엇보다 땅값[地價]을 겨냥한다. 그러니 빠른 속도는 재화일 뿐이다. 그곳에 사는, 살아왔던 사람들은 오히려 땅값 상승에 걸림돌이 될 뿐이다.
 

볼록 솟은 봉우리에 낭성산성이 있다. 남북으로 오가는 요충지에 신라가 쌓은 둘레 575m의 석축 산성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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