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지성 「꽃 진 저 자리」 전문

누구냐
온 들녘을
일깨워 뒤흔드는

꽃들이 절로 핌을
환생幻生이라 이른다면

또 한 해 새봄맞이를
섭리라고 하는가.

동안거冬安居다 떨치고
만행으로 가는 길이

어디 마음 따로
몸 따로 있겠는가

사과 꽃
켜든 등불이
햇살보다 밝구나.

꽃들이 미쁜 것은
내일 있기 때문이다

나이테, 또 한 가닥
세월을 감으면서

저것 봐
꽃 진 저 자리
초록열매 하나 둘.

─ 장지성 「꽃 진 저 자리」 전문(시집 『꽃 진 저 자리』에서)
 

그림 박경수

한 그루 오래된 사과나무를 가진 사람은 그저 나무 한 그루 꽃 한 송이를 소유한 것이 아니지요. 그는 우주의 섭리와 조화라는 커다란 깨달음의 나무그늘에 안좌한 것입니다. 시인은 70이 가깝도록 과목을 가꿔온 농부 시인이지요. 오랫동안 사과나무 곁에 산 자만이 도달할 수 있는 이 고귀한 묵언을 또한 오래 묵히고 삭혀온 정형의 율에 넣어 완성시킨,‘ 초록 열매’만큼이나 빛 좋은 시입니다.

눈보라 속, 동토의 긴 터널을 뚫고 아름다운 영혼처럼 꽃은 봄을 앞세우고 기어코 환생하지요. 그것이야말로 험한 세상을 끌고 가는 자연의 순리요, 동안거 떨치고 나서는 만행의 길섶이지요. 겨울의 끝에서 비로소 몸을 비운 영혼처럼, 그 영혼을 환히 비추는 햇살처럼 꽃은 피지요. 이 개화의 순간을 향한 고요한 평화와 분별 있는 인내와 사려 깊은 열정과 세상의 모든 소중한 것들을 일깨우는 충일한 합일이 어디 몸 따로 마음 따로 이겠습니까. 그래서‘ 사과 꽃 켜든 등불’은 생명의 들끓는 정처를 향한 함성이며, 또한 꿈을 수행해야 하는 고단한 정신의 열대이기도하지요.

이즈음에서 나무는 엄숙한 숙명처럼 오롯이 나이테로 한세월 감아 돌아 새로운 바람 속에 꽃을 떨굽니다. 이‘ 꽃 진 자리’야말로 숙련된 고통의 잔망 속에 얻어지는 초록빛 결실의 발아지점이 되고요. 대자연의 섭리와 섬세한 시인의 영혼이 겹쳐진 자리에 밀어올린‘ 초록 열매’, 그것은 바로 시인이 밝히고자 하는 기품 있는 우주의 내밀한 말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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