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지 적응은 ‘고장과의 전투’…변기 바로 고장나고 수도꼭지는 부서져
교통질서 안 지키고 날림공사 많은 편, 개념 없는 ‘적당주의’ 생각나

안남영의 赤道일기(16)
전 HCN충북방송 대표

작년 이맘 때 당구를 즐기는 친구한테 당구장에서 많이 쓰는 고운 사포 좀 보내달라고 한 적이 있다. 책상 등 가구는 물론 대야, 컵, 숟가락 등 사출성형 제품은 모서리를 연마하지 않으면 위험할(?)정도로 품질이 조잡하다. 책상 모서리에 손을 다쳐 봤고, 거친 니스칠로 마감된 욕실 문짝의 물기를 맨손으로 닦아내다 돌기 같은 것에 손을 벤 적이 있었다. 푸딩을 떠먹다가 1회용 숟가락에 혀끝을 베어 여럿이 피를 보기도 했다.

이런 일 겪을 때마다 거울 앞에서 예전―아니 요즘도 눈에 띄지만― 우리나라의 맨얼굴을 보는 느낌이다. 들여다볼수록 볼품없던 민낯이 오버랩 되는 거다. 이른바 ‘후진성’이겠는데, “우리도 그런 시절이 있었지” 같은 객관적 시각을 차리는 건 좋되 분수없이 선민(選民)의식이 도지기도 한다.
 

작년 이맘 때 콘크리트로 포장된 동네 입구. 두 달도 안 돼 노면이 파이더니 비포장 수준으로 돌아갔다.

열쇠를 넣고 돌릴 수 없는 자물쇠

적당주의. 교단이나 언론에서 우리의 후진적 행태를 지적할 때마다 들고 나오던 말이다. 인도네시아 공산품 품질을 보면 이 말이 자꾸 떠오른다. 단원 누구나 겪듯이 현지 적응은 ‘고장과의 전투’다. 입주한 새집에는 변기가 첨부터 고장 나 있었고, 빨래 건조대는 사오던 첫날 이음쇠가 부러졌다. 며칠 뒤 샤워수도꼭지가 (빠진 게 아니라) 부서져 황당했다. 걸레와 쓰레받기는 자루가 빠졌다. 장롱 미닫이는 열 때마다 레일에서 이탈했으며 빌려 탄 중고자전거는 휘어진 불량 받침대 때문에 세울 수가 없어서 늘 짜증거리였다. 나중엔 물탱크 모터 고장까지….

교실에선 어두워서 불을 켜려면 전등 고장이요, 문 닫고 수업하려면 경첩이나 손잡이 고장이다. 뮤직비디오 좀 보여줄라치면 불량 스피커가 소음 방출만 하고 만다. 집과 교무실에 있는 의자는 어찌된 일인지 죄다 좌판 뒤쪽이 앞보다 높은데 고칠 방법이 없다.

열쇠를 넣고 돌릴 수 없는 자물쇠, 끓인 물 부을 때마다 손잡이 쪽으로 김이 겁나게 새는 전기포트, 옷걸이를 가로 봉에 걸면 문이 안 닫힐 정도로 얕은 옷장, 플러그 삽입을 거부하는 멀티탭 등등 주변의 일화까지 꼽자면 한이 없다. 식당의 선풍기나 에어컨 고장 방치는 시빗거리도 못 된다. 물론 싸구려에만 얽힌 이야기겠지만, 우리도 그랬던, 개념 없는 적당주의를 떠오르게 한다.

기자 시절 수해나 부실공사 현장을 취재할 때마다 흔히 들었던 말 중 하나가 일본의 야무진 공사품질이다. “일제 때 만든 다리는 멀쩡한데 우리가 만든 다리만 무너졌다”느니 하면서 말이다. 또 대형사고가 나면 으레 ‘후진국형 사고’라고 자조하고 들었다. 그런데 여기 와서 보니 날림공사를 쉽게 찾아볼 수 있다. 길부터 그렇다. 동네 골목길이나 외곽도로는 물론, 웬만한 경내 도로나 주차장에 이르기까지 파손 흔적이 너무 많다. 시멘트포장의 경우 함량미달 때문인 듯싶은데, 교각이나 건물기둥의 내구성도 의심스럽다.

“집 얻을 때 누수 흔적을 반드시 살펴라.” 누구나 누수 소동을 한번쯤 겪기에 나온 당부사항 고정 레퍼토리다. 비 샌 흔적이 없는 새집을 얻어 다행이라 여겼지만 얼마 전까지 4번이나 일꾼을 불러야 했다. 하지만 안전 문제가 더 불안하다. 지반침하로 집주변에 심각한 균열이 진행 중이다. 집 문짝도 참 엉터리다. 문틈이 어찌나 정교한지(?) 도마뱀은 늘 프리패스다. 집사람이 보내 준 문풍지와 청테이프로 틀어막았어도 소용없다. 방바닥과 문 틈―보통 문지방이 없다―이 넓다 보니 주먹만 한 쥐가 방안까지 침입한다.

편리성과 동떨어진 디자인을 보자. 조리대와 개수대를 몇m 떨어뜨려 놓고 변기와 샤워기 위치를 바꿔 놓은 발상이 궁금하다. 현관문 열쇠 구멍이나 선풍기 스위치는 손잡이와 날개에 각각 가려져 있어 그걸 찾으려면 늘 고개 숙여 들여다봐야 한다. 공항이나 호텔, 은행, 쇼핑몰 등 번듯한 건물의 화장실을 봐도 의문이 생긴다. 변기가 어디는 높아서, 어디는 낮아서 문제다. 세면대 수도관은 벽에서 길게 빠져 나와 세면볼 중앙을 향해야 할 텐데 그게 짧아서 손 씻고 나면 세면대 주변으로 물이 다 튄다. 자카르타의 롯데쇼핑몰 내부가 그런데, 미안하게시리 그걸 기다렸다 닦아내는 직원과 마주쳐야 하는 일도 불편하다.
 

주변에서 버린 온갖 쓰레기로 너겁을 이룬 학교 교문 앞 도랑. 이걸 걷어내고 나면 가끔 낚시꾼이 찾기도 한다.

지역별, 계층별 편차 심한 나라

한때 코미디언 이경규가 ‘양심냉장고’를 걸고 모범시민을 찾아내는 TV프로가 있었다. 한밤중 신호등이나 정지선을 지키는 양심가가 드문 우리나라와는 달리 미국·일본에서는 완벽하게 지켜지는 모습을 보며 “저게 선진국이구나”를 통감한 적이 있다. 인도네시아는 어떨까? 우리도 예나 지금이나 “나하나 쯤이야” 하는 의식이 사라지지 않고 있지만 여긴 좀더 심한 것 같다.

신호는 잘 지키는 편이나 차선은 있으나 마나다. 쓰레기 무단투기. 그게 시내 어느 도랑이든 너겁을 이뤄 아주 혐오스럽다. 자전거를 타다 보면 역주행하는 오토바이, 골목길에서 무조건 코부터 들이밀고 진입하려는 운전자들 때문에 놀랄 때가 한두 번 아니다. 끼어들기를 난폭운전으로 보는 외국인 이야기가 기억나서인지 괘씸해진다. 언젠가 손 씻기 캠페인 홍보물에서 접한 “화장실 다녀와서 손을 안 씻는 한국인 이해 안돼요”라는 말은 이들에게 꼭 돌려주고 싶다. 손을 잡는 인사법과 맨손으로 밥 먹는 습관을 감안하면 더 철저해야 할 위생관념이거늘. 또 요리하면서 한손으로 담배피우는 걸 보면 할 말을 잃는다.
 

마당 쪽 지반침하로 현관 발코니 밑의 벌어진 틈과 담벼락의 균열이 선명하다. 안방과 거실에 는 구석에 수직 균열이 생겼다.

이곳 사람들은 대체로 여유 있고 차분하며 화를 내지 않는다. 성숙한 인격의 단면임엔 틀림없다. 생활화된 기도가 그런 내공의 원천일까? 정말 부럽기도 하면서 어쩌다 짜증에 겨워하는 자신이 부끄러워지기도 한다. 아무튼 이런 의식구조는 문화적 자산으로서 국가적 에너지로 승화되면 다행이겠는데 현실은 무망해 보인다. 분노를 모른다는 건 장점일 수 있겠지만 열정이나 오기가 부족하다는 해석도 가능하니 말이다. 여기에선 교육열이나 선의의 경쟁이란 말을 못 들어 봤다. “하늘은 스스로 돕는 자를 돕는다”는 격언대로라면 하늘이 이들을 도울 일은 없을 것 같다. 경제계를 중국계가 석권한 이유를 보면 딴은 그렇다.

이곳 사람들의 행태를 들여다볼수록 선명해지는 이미지가 있다. 50~60년 전 미국인 평화봉사단에 비쳤을 우리나라 모습이나, 1세기 전 민족 개조를 외치신 도산 안창호 선생의 현실 인식이 아마 그랬을 듯싶다. 도산 선생은 일찍이 무실역행이나 신용자본, 지식자본, 금융자본을 쌓을 것을 강조하셨다. 지금 이 나라에도 유효하다는 생각인데, 맞는지 모르겠다. 어쨌든 무한봉사를 다짐했던 초심이 후진성을 겪으면서 애증으로 변질돼 가는 느낌인데, 이들의 선망처럼 조국 ‘코레아’가 진정한 선진국이었으면 좋겠다.

사족 : 인도네시아에도 엄연히 21C 고도 산업사회가 존재하고 세련된 엘리트들도 있다. 다만 지역별, 계층별 편차가 심할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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