YS과 악연 2차례 구속수감, 대학자 집안의 서울대 '엘리트'
30년만의 귀향, 24일 엄정면 선영 장례식

지난 24일 충주 엄정면 선영에서 진행된 이택희 전 의원의 장례식 모습(이언구 도의원 제공)

3선 국회의원을 지낸 충주 출신 이택희 전 의원이 지난 22일 작고해 엄정면 선영에서 묻혔다. 제8·10·12대 국회의원을 지낸 이전 의원은 향년 84세로 가족장으로 조촐하게 장례를 치렀다. 충북에서 드문 야당 중견 정치인으로 활동하다 1988년 통일민주당 창당 방해사건(일명 용팔이 사건)으로 구속수감되면서 사실상 정치활동에 종지부를 찍었다. 이 전 의원은 야당내 비주류로 김영삼 전 대통령과 오랫동안 각을 세운 정치인이다. 결국 김 대통령 당선직후 재수사가 이뤄져 '용팔이 사건' 당시 안기부 자금 5억원이 제공된 사실이 드러났다. 이후 이 전 의원은 일체의 공식활동을 중단하고 야인으로 살아왔다. 우리 야당사에 '풍운의 정치인'으로 알려진 이택희 전 의원의 일대기를 간추려 본다. <편집자 주>

1934년 중원군 소태면에서 태어나 충주고를 거쳐 서울대학교 정치학과를 졸업했다. 이 전 의원은 유학자 집안에서 경제적으로도 유복한 환경에서 성장했다. 부친인 고 이호창옹은 제천 의병장이자 유학자인 유인석의 제자로 알려졌다. 한때 자신의 문하생이 70여명에 이를 정도로 학자적 명성이 뛰어나 충주의 마지막 선비로 평가받는다. 유학자 집안에서 성장한 이 전 의원도 한문과 동양학에 밝아 성균관에서 자문을 구할 정도의 수준이었다는 것. 또한 외국어 구사능력이 뛰어나 일본어, 중국어 대화가 가능했고 영어, 불어까지 번역했다.

서울대 대학원을 마친 이후 단국대학교 정치학과 강사로 일하다 1966년 신한당에 몸담았다. 이후 신한당이 민중당과 통합하여 신민당이 됐고 1967년 제7대 국회의원 선거(소선거구제)에서 충주시-중원군 선거구에 출마하였으나 공화당 이종근 후보에 밀려 낙선했다. 1971년 제8대 국회의원 선거(중선거구제)에서 신민당 후보로 출마해 공화당 이종근 후보도 제치고 1위로 동반당선됐다. 유신 치하인 9대 총선에는 불출마했고 1979년 10대 총선에서 재선에 성공해 신민당 원내부총무를 맡았다. 하지만 1980년 신군부에 의해 불법으로 연행되어 고문당하고 강제로 국회의원직을 사퇴했다. 1984년 정치규제에서 해금됐고 이듬해 12대 총선에서 신민당 후보로 출마해 민정당 이춘구 후보와 함께 2위로 당선됐다. 3선의 이 전 의원은 신민당 정책위 의장을 맡는등 생애 가장 화려한 의정활동기를 맞았다.

양김씨 체제 끝까지 거부

하지만 5공 정치규제에서 풀려난 김대중, 김영삼 양 김씨 진영에 끝내 가담하지 않았다는 것. 당시 이 전 의원의 비서로 일했던 임순묵 도의원(충주시 제3선거구)은 "그때 3선의 정책위 의장을 맡고 있다보니 양 김씨의 구애가 적극적이었다. DJ는 동교동으로 초대해 단둘이 아침 겸상을 하면서 의원님을 설득했었다. 하지만 그때 이 의원님은 군부독재 종말을 예감했고 양 김씨의 패거리 정치구도도 종식시켜야 한다는 소신을 갖고 있었다. 새로운 민주화 세력들이 새 시대를 열어가야 한다는 신념으로 양김을 거부하다 보니 신민당 비주류가 된 것"이라고 말했다.

86년 9월 이 전 의원은 이택돈 박한상 박해충 의원과 함께 정풍회를 조직하고 양김의 주류와 맞섰다. 이들은 양김이 "당을 사당화 하고 있다"고 반발했으나 주류측은 정풍회가 "여당의 공작에 동조하고 있다"고 비난했다. 이같은 주류-비주류 갈등에 기름을 부은 결정적 계기는 이민우 총재였다. '이민우 구상'을 통해 5공 정권의 내각제 개헌을 지지하는 입장을 밝혔다. 이철승도 내각제 지지를 선언했고 이 전 의원도 같은 보조를 취하다 주류로부터 역공을 당하게 된다.

당시 상황에 대해 임순묵 도의원은 "그때 주덕농공단지 준공식 때 이택희 의원님이 축사를 하다가 동석한 이춘구 의원을 의례적으로 칭찬한 덕담을 꼬투리 잡았다. 주류측 조종을 받은 당원이 '해당 행위'라며 중앙당 당기위에 신고했고 결국 의원제명 얘기까지 나오는 상황이 됐다. 그러다보니 이 의원을 따르는 청년당원들이 중앙당에 올라가서 점거농성을 벌였고 그 연장선에서 통일민주당 창당 방해사건까지 터진 것"이라고 말했다.

안기부 공작에 정치깡패 등장

이 전 의원은 YS를 상대로 당권 업무 개입 금지 가처분 소송을 내며 저항했고 신민당 주류 지도부는 이 전 의원에 대한 징계에 실패했다. 신민당의 당내 분열이 깊어지자 결국 양김을 지지는 의원 74명은 87년 4월 신민당 분당과 신당 창당을 선언하게 됐다. 신당인 통일민주당은 중앙당 창당을 위해 지구당 창당작업을 벌였는데 이때 정치깡패의 방해공작인 '용팔이 사건'이 일어난 것이다. 정체불명의 괴청년들이 각목 등을 들고 나타나 지구당 창당대회를 쑥대밭으로 만드는 행위를 저질렀고 경찰은 수수방관하는 입장이었다.

이에대해 야당의 반발이 최고조에 달했고 분노한 민심은 6.10 민주항쟁의 도화선이 됐다. 이후 직선제 개헌과 대통령 선거 국면에 접어들면서 '용팔이 사건'은 뒷전으로 밀려났다. 또한 양김씨의 단일화 실패로 민정당 노태우 후보가 대통령에 당선됐다. 하지만 이듬해 88년 서울올림픽이 한창이던 9월 정부는 '용팔이' 김용남을 전격적으로 검거했고 놀랍게도 신민당 청년부장을 맡았던 이선준도 잡아들였다. 또한 당시 검찰은 양김씨에 대한 반감이 컸던 이택희 이택돈 의원이 배후에서 사주해 정치조폭 김용남이 저지른 사건으로 일단락 지었다. 이 전 의원은 해당 사건으로 징역 2년의 실형을 받았다.

하지만 '용팔이 사건'은 1993년 김영삼 대통령 당선과 함께 재조사가 시작됐다. 문민정부의 검찰은 '용팔이 사건'의 새로운 배후로 5공 실세였던 장세동 안기부장을 지목했다. 87년 3~4월 장세동은 이택희 이택돈 두 의원을 서울 궁정동 안가로 수차례 불러 통일민주당 창당 행사 저지를 모의했다는 것. 또한 증권회사 등의 안기부 비밀계좌에서 5억원을 인출해 돈 세탁과정을 거친 뒤 두 이씨의 가명계좌에 입금시킨 사실을 검찰이 확인했다는 것이다. 당시 장세동은 "내가 모든 것을 책임지겠다"는 말과 함께 구속돼 징역 1년 6월을 선고받았다.

이 사건에 대해 임순묵 도의원은 "이 의원님이 자존심이 아주 강한 분이라 사건에 대해 세세한 말씀은 하지 않았다. 하지만 안기부로부터 "돈을 받은 건 없다"고 분명히 말씀하셨다. 아마도 사건 시점에 안기부의 야당관리용 정치자금으로 지출된 내역을 뭉뚱그려서 창당 방해사건 자금이라고 덧씌운 게 아닌가 싶다. 이 전 의원에 대한 YS의 보복은 이 사건이 끝이 아니었다. 종친회 사업과 관련해 횡령죄로 다시 구속시켰다"고 말했다. '용팔이 사건'으로 출감한 뒤 정치를 접고 경주 이씨 종친회장 일에 전념하게 됐다. 이때 경기도 포천 종중부지에 삼성에버랜드 같은 대규모 위락시설을 건설하려고 대기업을 접촉하고 다녔다. 그런데 갑자기 검찰에서 체포해 종중자금 횡령죄로 기소했고 다시 2년간 수감생활을 해야했다. 이후 이 전 의원은 대외활동을 모두 접고 은둔자가 됐다.

1987년 4월 '용팔이 사건' 폭력배들이 통일민주당 서울 관악지구당을 습격한 모습

종친회 횡령혐의 재구속 당해

충주에서 언론인으로 일하며 이 전 의원을 접한 이언구 도의원(충주시 2선거구)은 "고인은 스케일은 크지만 돈 욕심은 거의 없는 분이었다. 85년 충주댐 건설과 관련해 당신이 겪은 에피소드를 하나를 소개하겠다. 댐 건설회사가 현금을 '박스'에 담아 가져왔는데 당신이 건설부장관에게 전달하면서 '난 이것만 있으면 된다'며 1억원만 챙겨 나왔다는 얘기였다. 고인이 생전에 정치깡패 '용팔이 사건'에 덧씌워져 왜곡된 이미지가 고착된 것이 안타깝다. 결과론이지만 80년대말 고인이 주장한대로 양김씨 퇴진론이 받아들여졌다면 군사정권 연장은 불가능했을 것"이라고 말했다.

이 전 의원과 김영삼 전 대통령의 악연에 대한 이 도의원은 에피소드 한토막을 덧붙였다. "YS가 서울대 동문회에 들어오는 걸 대놓고 반대한 사람이 고인으로 알고 있다. 공개석상에서 청강생 논란을 제기하며 동문 자격을 운운했으니, YS가 얼마나 속이 불편했겠는가" 60대 중반부터 은둔형 야인으로 생활한 이 전 의원은 마지막 10년간 암투병을 했던 것으로 알려졌다. 후두암이 발병해 전이되면서 일산병원에서 오랜 투병생활을 했다. 고향이자 정치적 텃밭이었던 충주에도 거의 발걸음을 하지 않았다. 결국 '풍운의 정치인' 이택희 전 의원은 '영원한 정적' 김영삼 전 대통령의 서거 2년뒤에 고단한 생을 접고 귀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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