충북 음성출신 경제부총리 후보자

기고 / 이화영 전국공무원노동조합 충북본부 음성군지부장

“그분이 행정고시에 합격해 충북 음성군에 근무할 당시 우리 집에 머무셨어요. 제가 중학교 다닐 때인데 한방에서 함께 생활했습니다. 늘 선한 성품으로 영어를 비롯해 공부를 가르쳐 주시곤 하셨어요. 그분은 책을 자신보다 더 사랑하는 책벌레였습니다. 한번은 서울 구경을 시켜 준다고 하시기에 따라나섰어요. 당시만 해도 버스를 타고 비포장 길을 따라 덜컹거리면 3시간이 넘게 가야 했는데 가면서 말을 한마디도 안 하시는 겁니다. 책에서 한시도 눈을 떼지 않으시더라고요.”

판잣집 소년 가장에서 경제부총리 후보자에 오른 김동연 아주대학교 총장과 친척인 오석화(50. 음성군음성읍)씨의 말이다.
 

김동연

끼니를 걱정해야 할 정도로 가난했던 소년 가장

김동연 경제부총리 후보자의 외모만 봐선 유복한 집에서 아무 걱정 없이 자란 귀공자풍이다. 하지만, 온화한 미소 뒤에 숨겨진 유년시절은 배고픔과 시련으로 점철돼 있다.

조상 대대로 충북 음성지역에서 뿌리내리고 살던 그의 아버지는 배움이 짧았다. 젊은 나이에 미곡상 서기를 거쳐 서울 신당동에서 미곡 도매상으로 사업을 시작할 정도로 성실했다. 하지만 서른셋에 한 살 아래인 아내와 어린자식 넷을 남긴 채 심장마비로 세상을 등졌다,

가장을 읽은 가족은 가난으로 내몰려 청계천에 무허가 판잣집을 짓고 끼니를 걱정하며 하루하루를 연명했다. 어머니는 가족의 생계를 위해 채석장에서 돌을 나르고, 산에 올라 나물을 캐 길거리에서 좌판을 벌이는 등 닥치는 대로 일을 해야만 했다.

그의 가족은 살던 판자촌마저 도시정비 사업으로 헐리면서 지금의 성남시 수정구 단대동 허허벌판으로 강제 이주돼 한동안 천막을 치고 살았다. 그는 2011년 4월 <신동아>에 쓴 칼럼에서 “망해도 그렇게 망할 수가 없었다. 학업은 물론 때로는 끼니가 걱정이었다”라며 당시를 회고했다. 2012년 5월〈중앙선데이〉에 쓴 칼럼에선 “세 끼를 온전히 챙겨먹기 어려웠던 시절, 끼니로 자주 먹던 수제비, 외상 달고 됫박으로 샀던 쌀, 몇 장씩 사다 쓰던 연탄”이란 표현으로 어려웠던 삶을 풀어냈다.

그는 천막촌에 살면서 가난하지만 똑똑한 학생들이 다니던 덕수상고로 진학했다. 어려운 가정형편에 대학은 언감생심이었다. 일찌감치 취업반에 들어갔고 고교졸업 4개월 전인 1974년 11월 한국신탁은행에 취직해 열일곱의 나이로 가장의 무게를 고스란히 떠안았다.

“주경야독” 피눈물 나도록 노력했다

그는 한국신탁은행 직원이 되고 야간대학인 국제대 법학과에 진학했다. 고졸 출신이라는 현실의벽은 높고도 두터웠기 때문이다. 2011년 9월 <중앙선데이>에 쓴 칼럼에서 "어린나이에 은행에 들어갔을 땐 우쭐했지만, 고졸 출신이라는 현실의 벽은 높았고 100m 달리기 경주에서 50m쯤 뒤처진 채 출발하는 답답한 기분이 들었다"고 당시 심경을 표현했다.

그는 은행 합숙소에서 옆방 선배가 쓰레기통에 버린 고시 관련 잡지를 보고 고시에 도전하기로 결심했다. 그 전까지는 고시라는 게 있는지도 몰랐다. 1982년 입법고시에 수석 합격했고. 같은 해 행정고시(26회)에도 합격했다.

그는 2012년 1월 <문화일보>에 쓴 칼럼에서 "직장에 충실하면서 공직에 뜻을 두고 준비했다. 피눈물 나는 노력을 했다. 문제는 내 시간 만들기였다. 잠을 줄이고 15분 이상의 조각시간은 내 시간으로 만들었다"며 고시 준비 당시를 소개했다.

그는 은행에 첫발을 내디딘 지 8년 만에 사표를 냈다. 고시에 붙어 첫 출근을 하기 전날까지 가족의 생계를 위해 출근했다. 국회 예산결산위원회 입법조사관(사무관)을 거쳐 경제기획원에서 공직생활을 시작해 기획예산처 재정정책기획관, 대통령 경제금융비서관, 기획재정부 예산실장, 기획재정부 2차관 등 주요보직을 역임했다. 국무조정실장(장관급)을 마지막으로 32년 간의 공직생활을 마감하고 아주대학교 총장으로 자리를 옮겼다. 상고와 야간대 출신 이라는 '비주류' 핸디캡을 극복하고 요직을 두루 거쳤다.

그는 뿐만 아니라 국가장학금과 미국 정부에서 주는 풀브라이트 장학금을 받아 미국 미시건 대학에서 3년9개월이라는 최단기간에 석사와 박사 학위를 받은 기록도 보유하고 있다.

지금의 어려움 '위장된 축복' 일뿐

그는 어려운 환경에 놓인 청소년에 대해 관심이 많다. 2012년 6월에는 학생 수가 모두 21명인 강원도의 중학교를 찾기도 했다. 가정상황이 너무 어려워 꿈과 희망을 갖지 못하는 학생들에게 희망을 심어달라는 이 학교 수학교사의 편지를 받고 나서였다.

그는 각기 다른 책 21권을 구입해 학생 한명 한명 이름을 써서 직접 전달했다. 자신의 성장 과정을 소개하며 "주어진 어려움을 원망하지 말고 큰 꿈을 가져라. 지금의 어려움은 '위장된 축복'이며 참 행복을 느끼는 단계에까지 가려면 정말 열심히 노력해야 한다"며 학생들을 다독였다. 이 자리에 있던 몇몇 학생은 눈물을 보이기도 했다.

소외계층인 차상위 이하 가정의 우수 고등학교 졸업생 해외 유학 사업인 '드림장학생'도 그의 작품이다. 사업의 제안에서부터 예산편성까지 주도했다. 예산실장으로 있으면서 2조5000억 원의 재원을 마련해 가정 형편이 어려운 청소년들에게 기회를 주기 위한 '교육희망사다리' 사업에 많은 공을 들였다.

대통령에게 직언할 줄 아는 공직자

그는 인사권자인 대통령에게까지 직언할 줄 아는 몇 안 되는 공직자였다. 기획재정부 예산실장(차관보급)으로 있으면서 당시 이명박 대통령에게 세 차례나 직언을 하면서 영유아예방접종 지원 확대 등 다섯 가지 재정사업을 관철한 일화가 있다

또한 대통령선거판이 달아오르던 2012년 12월 고위관료들이 낮은 자세로 숨죽이고 있을 때 <중앙선데이>에 쓴 칼럼에서 새 대통령에게 '진정한 용기'를 주문했다. 기득권층에 맞서고 많은 국민이 반대하는 인기 없는 정책을 펴는 용기, 선거공약에 솔직할 수 있는 용기, 경쟁 후보의 공약을 수용해 사회통합의 큰 걸음을 떼는 용기 등이 그것이다.

그는 몇 해 전 개인 싸이월드 홈페이지에 '스스로 공직생활에서 물러나야 할 때'에 대한 경구를 남겼다. 감사할 줄 알고 물러설 때를 아는 공직자가 되고 싶다고 했다. 비전을 제시하지 못하거나 스스로 비전이 없어질 때와 일에 대한 열정을 느끼지 못하고 문득 무사안일에 빠지자는 유혹에 굴할 때, 문제를 알면서도 침묵할 때 등을 공직에서 물러나야 할 때라고 밝혔다.

그는 충북 음성군 금왕읍 무극리가 고향이다. 1983년 사무관 수습을 받을 당시 행정고시 동기들은 대부분 서울근무를 원했지만, 고향인 충북도청 근무를 자원해 당시 도청 지방과에서 일했다. 또 음성군청 근무를 지원해 근무하기도 했다.

김 후보자는 성공한 공직자였지만 가정적으론 불우했다. 어린 나이에 부친을 여의었고 국무조장실장이던 2013년에는 28세이던 아들을 백혈병으로 잃었다. 일벌레이던 그는 아들 장례식 당일에도 출근해 국무조정실에서 만든 원전비리 종합대책을 직접 발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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