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강의 물줄기를 따라, 낭성·미원면<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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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강의 물줄기를 따라, 낭성·미원면<1>
  • 충북인뉴스
  • 승인 2017.05.24 11: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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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민식의 ‘톡톡 튀는 청주史’

상당산성은 한강 발원지의 하나

청주는 금강 수계지만, 2개 면面은 한강 수계에 속한다. 낭성면과 미원면엔 한강이 흐른다. 낭성면 산성리, 상당산성에서 발원한 물이 낭성과 미원을 거쳐 미원면 운교리에서 달천에 합류한다. 속리산에서 시작한 한강의 물줄기는 법주사 앞을 지나 보은 산외면과 내북면을 지나 이곳에 이른다. 물길을 이으면 한남금북정맥 산줄기의 뜻을 알 수 있다. 옛 사람들에게 물길은 터전을 일구고 서로 교유했던 인문학적 공간이기도 하다.

어떤 이는 상당의 당黨을 무리의 뜻으로 풀어, 무리는 곧 물이라 하였다. 곧 상당은 윗물이란다. 한강의 물길이 가장 높은 곳이라는 뜻이다. 상당산성에서 물길을 따라가면 낭성에 닿는다. 옛길이다. 지금은 국도 25번을 따라가다 남일면 두산리에서 나뉜 지방도 32번을 많이 이용한다. 옛 사람들은 이 길을 따라 남으로 향했을 것이다. 자연 많은 자취들이 남아있다.
 

지방도 32번을 따라 낭성에 이르기 전 추정재가 있다. 한강과 금강의 분수령 중 하나이다.


한강의 물줄기에서 찾은 보물

가덕면을 지나 낭성면 경계에 이르면 낮은 고개가 있다. 해발 260m의 추정재다. 옛 기록 속 무심천의 발원지로 이야기한 적현赤峴인 듯하다. 여기부터는 한강 수계다. 물길은 말과 풍속을 달리 한다지만 그다지 차이를 찾을 수 없다. 같은 행정단위로 묶인 결과이다. 그러나 물길을 따라 지향하는 바가 다를 수도 있을 것이다.

이중환李重煥, 1690~1756은 『택리지擇里志』에서 낭성면과 미원면을 이렇게 적었다.

“동쪽으로 거대령을 넘으면 상당산성이 있고, 그 동쪽에는 청천창靑川倉이 있다. 창 서쪽은 신씨申氏 마을이고, 남쪽으로 작은 고개를 넘으면 인풍정引風亭, 옥류대玉流臺가 있는데 변씨卞氏들이 사는 곳이다. 큰 산 사이에 시내와 바위가 자못 그윽한 경치를 이룬다. 또 동쪽으로 커다란 골짜기를 건너면 귀만歸灣인데, 골짜기와 산이 아주 아름답다. 상당과 청천을 아울러 산동山東이라 하는데, 지대가 산 위에 있으므로 바람이 차가워 청주 들판보다는 못하다.” (팔도총론, 충청도)

지금도 이곳에 세거하는 고령신씨를 달리 산동신씨라고 하니, 그 말의 연원을 알겠다. 동쪽의 청천창은 지금의 청천면 소재지를 말한다. 1757년(영조 33) 송시열의 묘를 옮겨오기 전까지 이곳은 청주목에 속한 창고가 있었을 뿐이다. 청천면 소재지에서 남쪽으로 고개를 넘으면 미원면 금관리다. 고갯마루에 ‘옥화9경’을 알리는 표지가 있다.

고개를 내려서면 굽이돌아 흘러온 한강을 만난다. 이곳에 펼쳐진 절경을 9경景, 9곡曲으로 꼽는다. 9경은 청석굴, 용소, 천경대, 옥화대, 금봉, 금관숲, 가마소뿔, 신선봉, 박대소. 9곡은 만경대, 후운정, 어암, 호산, 옥화대, 천경대. 오담, 인풍정, 봉황대다. 상류에서 아래로 9경을, 하류에서 오르며 9곡이란다. 만경대가 청천에 속해서인지 9곡보다는 9경을 앞세운다. 아무튼 옥화대와 천경대가 겹치는데, 연이어 절경을 이루는 곳이다. 『택리지』에서 말한 옥류대는 옥화대일테고, 인풍정은 9곡에만 속한다. 8곡 인풍정引風亭은 마을 이름으로 남아있다.
 

옥화대에 있는 옥화서원. 1717년(숙종 42) 세웠다고 하나 의문이다. 함양박씨 박곤원朴坤元, 경주이씨 이득윤李得胤, 파평 윤씨 윤승임尹承任․윤사석尹師晳을 제향하고 있다. 위차 시비가 지금도 여전하다. 옥화대 주변에는 이득윤 관련 유적이 많다.


인풍정과 옥화대 인근에 변씨들이 많이 살았다고 한다. 그 사이 변화가 있었나 보다. 지금은 함양박씨와 파평윤씨가 세거한다. 그들의 자취는 옥화9경을 따라 적지 않다.

옥화대에서 자주 언급되는 이는 이득윤李得胤, 1553~1630이다. 본관은 경주, 호는 서계西溪로 우리에게 서계 선생으로 널리 알려졌다. 아버지 이잠李潛은 은둔하며 제자를 길러낸 인물이다. 이시발의 아버지, 이대건도 이잠에게 배운 것이 인연이 되어 청주에 정착하였다. 또 이득윤은 이시발을 가르쳤다.

이득윤은 1588년(선조 21) 진사시에 오른 후, 1624년 괴산군수를 지냈다. 첫 부인이 파평윤씨이고, 딸이 변시망卞時望에게 시집갔으니, 터전과 가까운 사람들이다. 일찍이 서기徐起, 1523~1591와 박지화朴枝華, 1513~1592에게 배워 역학과 음악에 조예가 깊었다. 스승이 선가仙家의 일가를 이루었으니 그 맥을 이은 셈이다. 서기와 박지화는 이지함, 정렴 등과 함께 호서지역 학문의 뿌리가 되었다. 그들에게 배운 이득윤의 위상을 엿볼 만하다. 청주 신항서원과 구계서원龜溪書院에 배향되었다. 미원면 가양리는 경주이씨들의 세거지로, 수락영당과 여러 인물 관련 유적이 많다. 이곳 가양리 안쪽 길을 따라 산에 오르면 바로 이득윤의 묘가 있다.
 

구계서원은 원래 청안에 있었으나 훼철된 후 청주 분평동으로 옮겨 다시 세웠다. 박지화와 이득윤 등을 제향한다.
미원면 가양리 수락영당을 지나 산자락에 위치한 이득윤의 묘소. 최근 석물을 새로이 갖추었다.


참으로 묘한 인연, 영조와 고령신씨

산성을 나온 물길은 갈산리와 무성리를 지난다. 무성리 태봉말 뒷산에 영조태실(충청북도 기념물 제69호)이 있다. 마을 북쪽 능선을 오르면 태실과 태실비가 나온다.

흔히 고향은 ‘태胎를 묻은 곳’이라 한다. 곧 태어난 곳을 이른다. 그런데 옛 왕자나 공주(옹주)가 태어나면 전국의 명산을 찾아 태를 묻었다. 그들에게 태를 묻은 곳은 직접적인 인연은 없으나, 왕위에 오르면 새로 단장을 하는 등 그 의미가 작지 않았다.
 

영조(재위1724~1776)의 태를 봉안한 곳이다. 1694년(숙종 20) 9월 이곳에 자리를 정하고 이듬해 9월 태를 안치하였다. 영조 즉위 후 1729년(영조 5) 숙종의 태실을 모방하여 새로 꾸몄다. 태실비도 함께 세웠다. 1928년 일제의 훼손 이후 방치되다 1982년 지금의 모습으로 복원하였다.


영조가 태어난 이듬해인 1695년(숙종 21) 이곳에 태실을 마련하였다. 영조가 왕위에 오른 후 1729년(영조 5) 태실을 새로 만들었다. 계란 모양의 태실을 꾸미고 바깥쪽에는 돌 난간을 둘렀다. 그리고 태실 앞에는 태실비를 세웠는데, 앞면에 ‘주상전하태실主上殿下胎室’이라 하였다. 태실 수리보고서인 영조태실석난간조배의궤英祖胎室石欄干造排儀軌(충청북도 유형문화재 제170호)가 전한다. 태실 조성경위와 동원한 인력과 물자를 기록하여, 사회·경제사적 의미가 크다. 일제강점기인 1928년 조선총독부는 전국의 태실을 크게 훼손하였다. 태항아리만 꺼내 창경궁으로 옮겼다. 그 후 그 자리에 민묘가 들어서고 1982년 새로 복원하였다.

그런데 자신의 태를 묻은 이곳에서 왕위에 오른 지 불과 4년만에 반란이 일어났다. 1728년 무신란戊申亂. 우리 지역에선 신천영申天永의 난이라고도 한다. 신천영은 곧 고령신씨로, 낭성면 일원에 살고 있었다. 영조도 태를 묻은 곳에서 자신을 부정하는 반란이 일어났으니 기가 막힐 노릇이었을 것이다. 난이 진압된 뒤 고령신씨 일가에 불어 닥친 피바람은 예견된 것이다.

낭성면 관정리에 자리를 튼 고령신씨는 영성군파로 나뉜다. 신숙주의 일곱째 아들인 신형申泂의 후예들이다. 흐르는 물이 너른 들을 만나기 직전, 산 아래 작은 정자가 있다. 호서 지역의 여느 정자처럼 산에 의지해 들판을 바라보고 있다. 옛 사람들은 청주에 들어서기 전 이곳에 들러 풍광을 읊었으리라. 이 정자의 이름은 백석정白石亭(문화재자료 제83호)으로, 1676년(숙종 2) 신교申攪, 1641~1703가 세웠다. 이곳에서 영남 선비들을 맞이하곤 하였다.
 

백석정. 낭성면 관정리 감천甘川가에 북쪽을 향해 있다. 지금의 정자는 1927년 후손들이 다시 세운 것이다. 앞면 2칸, 옆면 1칸의 홑처람 팔작지붕 기와로, 뒤쪽 가운데 기둥은 다듬지 않고 그대로 썼다.


백석정을 지나면 머그미[墨井] 마을이다. 마을 앞쪽, 커다란 은행나무와 효열각이 보인다. 전형적인 사족 마을의 배치다. 은행나무는 마을의 역사를, 효열각은 마을의 주인을 말한다. 마을 높은 곳에 이들의 사당이 있다. 묵정서원墨井書院이라 부르며, 고령신씨 윗대 여섯 인물들을 제향한다. 대원군 때 여러 곳에 모신 서원이 훼철된 후 1971년 새로 만들었다.

묵정서원 남서쪽으로 앞면 3칸 크기의 사당이 있다. 신숙주의 영정을 모신 묵정영당(충청북도 유형문화재 제108호)이다. 1888년(고종 25) 가덕면 인차리에 있는 영정을 본떠 새로 그려 모시고 있다.

머그미 마을 뒷산은 이곳에 들어온 입향조를 비롯한 선대의 묘역이다. 신형의 아들로 처음 이곳에 들어온 신광윤申光潤을 비롯, 3대가 나란히 한 능선씩 차지하고 있다. 신광윤은 1540년경 북이면 석성石城에서 이곳으로 옮겨왔다고 전한다.

묵정영당. 1830년(순조 30) 처음 세운 후 보한재 신숙주의 초상을 모시고 있다. 영당은 앞면 3칸, 옆면 2칸의 겹처마 맞배 지붕이다.


영당과 서원 사이에 신중엄申仲淹 신도비(충청북도 유형문화재 제161호)가 있다. 신중엄은 임진왜란 때 군량미를 내어 벼슬을 받기도 하였지만, 실제 두 아들이 문과에 급제하며 영예를 얻었다. 둘째 아들 신식申湜은 선조 때 대사헌을 지냈고, 동생 신용申涌은 황해도 관찰사를 지내다 그곳에서 죽었다. 아들들이 현달하면서 아버지에게 영광이 미쳐 신도비를 세우게 된 것이다.

신식의 묘는 낭성면 현암리에 있던 것을 최근 옮겨왔다. 그곳을 능골이라 부를 정도로 묘역이 크고 넓었다. 1728년 반란을 주도한 신천영은 바로 신식의 현손이다. 신식은 훗날 남인으로 나뉘는 여러 인물들과 널리 교유하였다. 실제 혼인으로 연결된 면면은 여주이씨, 전주이씨, 안동권씨 등이다. 무신란의 주동자인 이인좌와 그들이 왕으로 추대한 밀풍군 탄도 혼맥으로 연결된다.

신중엄1522~1604의 묘소 앞에 있다. 효행이 뛰어나고 임진왜란 때는 군량미를 내어 군사를 도왔다. 비는 1609년(광해군 원년) 심희수沈喜壽가 짓고 이산뢰李山賚가 썼다. 1619년에 세웠다. 높이 171cm.


난이 일어나기 전 신식을 내세워 지역 남인계가 결집하는 모습을 보였다. 신항서원에 배향하려는 시도도 있었으나 좌절된 후 따로 서원을 세웠다. 낭성면 무성리에 있는 쌍천서원이 그것이다. 1695년(숙종 21) 미원면 수산리에 세웠던 것을 옮겨온 것이다.

서원은 마을 뒤쪽에 겨우 터를 잡았다. 삼문을 들어서면 사우가 보이고 그 처마 밑에 긴 편액이 걸려있다. 효자 정표다. 어쩌면 후손의 반란 가담으로 위기에 처했을 때 명맥을 유지할 수 있었던 연유일 지도 모른다.

지금은 감천이라 부르는, 예전 산성과 인경산에서 발원한 물길이 서로 만나 쌍천雙川이라 불렀다. 한자 표기가 다르지만 서원 이름이 여기서 유래한 것은 아닐까.
 

쌍천서원은 가파른 경사 위에 있는데 삼문을 지나면 3칸 크기의 사우가 있다. 가운데 칸에 현판을 달았는데, ‘효자孝子 증자헌대부이조판서겸지경연의금부춘추관성균관사홍문관대제학예문관대제학오위도총부도총관贈資憲大夫吏曹判書兼知經筵義禁府春秋館成均館事弘文館大提學藝文館大提學五衛都摠府都摠管 행가의대부사헌부대사헌겸동지춘추관사行嘉義大夫司憲府大司憲兼同知春秋館事 신식지문申湜之門’이라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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