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후기에 나온 소설 ‘배비장’전은 판소리 소설로 오늘날까지 연극 무대에 자주 오르내리는 작품이다. 비장(裨將)이란 조선시대에 감사, 병사(兵使) 등을 수행한 관원으로 중간 계급에 해당한다.

서울에서 제주도로 부임하는 배비장은 여자를 멀리하겠다고 아내와 굳게 약속한다. 어떤 관기(官妓)에도 눈길조차 주지 않던 배비장은 제주 목사(牧使)와 이방의 골탕먹이기 작전에 넘어가 아내와의 약속을 저버리고 애랑을 연모하게 된다.

봄나들이 수풀 속에서 애랑은 갖은 교태를 부리며 배비장을 유혹하고 상사병을 앓던 배비장은 이방을 통해 애랑과 러브레터를 주고 받는다. 어느날 배비장은 이방의 지정대로 개가죽을 쓰고 개구멍을 통해 애랑의 방으로 잠입한다.

이방은 느닷없이 애랑의 남편행세를 하며 고함을 친다. 급한 김에 배비장은 피나무 궤짝에 숨고 이방은 이 궤짝을 불을 지를까, 톱으로 켤까, 바다에 띄울까 겁을 준다. 가까스로 궤짝에서 나온 배비장은 알몸으로 동헌 마당에서 헤엄을 친다. 당시 시대상황을 풍자한 해학 소설이다.

역사의 행간 속에는 개 취급을 당한 사람이 여러 명이다. 노(魯)나라 출신으로 춘추전국시대 말기에 태어나 유교의 개조(開祖)가 되는 공자는 제나라, 정나라, 초나라 등 여러 나라를 돌며 치세를 논하고 사람 됨됨이와 학문을 가르쳤다.

3천여 명의 제자가 따랐다 해도 공자의 행차는 그리 화려하지 않았다. 또 제후들은 공자의 학식과 인품을 인정하면서도 이를 잘 따라주지 않았다. 초라한 유세(遊說)는 계속되었으나 적지 않은 사람들은 오히려 그를 손가락질하였다. 그래서 그에게 붙은 명예롭지 못한 별칭이 ‘초상집 개’였다.

초상집에의 개가 무슨 대우를 받겠는가. 개밥을 제때 챙겨주는 사람도 없다. 축 쳐진 허기진 모습,

의지할 데 없이 동가숙서가식 하는 사람을 흔히 ‘초상집 개’에 비유한다. 대원군도 야인시대에는 ‘초상집 개’에 곧잘 비유되었다. 대원군은 초상집이나 잔치집에서 술과 안주를 얻어먹고 툭하면 행패를 부렸다. 사대부들은 그를 멸시하고 때로는 봉변을 주었다. “왕족의 체통이 그게 뭐냐”는 식이었다.

대원군이 그 수모를 참은 것은 훗날을 도모하기 위함이었다. 당시 조정은 김좌근 등 안동 김씨 외척세력이 크게 득세하여 똘똘한 왕족이면 살아남기가 힘들었다. 살기 위한 철저한 위장전술이었고 인내였던 것이다.

개는 포유류 중 인류의 역사와 가장 가까운 짐승이다. 제일 먼저 길들인 야생동물이 바로 개였다. 페르시아 동굴에서는 BC,9500년경 개 뼈가 나온 바 있다. 이로 보아 신석기 시대부터 개는 가축화 된 것 같다.

한자로도 견(犬)자가 들어가면 별로 좋지 않은 뜻이 된다. 범(犯), 옥(獄), 광(狂)이 그 대표적 한자다. 우리말로도 마찬가지다. ‘개 같다’ ‘개차반’ ‘개지랄’ ‘개판’ ‘개수작’ 등 접두어 ‘개’자가 붙은 낱말은 대개 상서롭지 못하다. 영어에서도 선 오브 비치(Son of bitch)하면 ‘암캐 새끼’를 뜻하는 격한 욕설이 된다.

공무원노조가 근무 시간을 둘러싸고 한 대수 청주시장을 ‘개’에 비유하여 말썽이 일고 있다. ‘시장을 행자부의 개’라는 둥, 또는 강아지에 옷을 입혀 한 시장을 빗대는 문구를 써서 끌고 다녔다. 여기에 대해 네티즌의 비난 글도 폭주하고 있다. 아무리 민주화 시대라지만 우리 손으로 뽑은 시장을 ‘개’에 비유한 것은 지나친 처사다. 매사가 과유불급(過猶不及)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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