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조 때 실학자 이중환은 그의 저서 ‘택리지(擇里志)’에 조선 팔도에 대한 평을 하는 가운데 ‘충청도는 물산(物産)이 영남, 호남에 미치지 못하나 산천이 평평하고 예쁘며 서울인 한양 남쪽 가까운 위치라서 사대부들이 모여 사는 곳이 되었다. 누대로 서울에 사는 사람 치고 이곳에 전답과 주택을 마련하지 않은 이가 없고 또 한양과 가까워서 풍속에 심한 차이가 없으므로 터를 고르면 가장 살만 하다’고 적고있습니다.

그는 그러나 민심에 대해서는 ‘충청도는 오로지 세도와 재리(財利)만을 쫓는다’고 매우 부정적으로 혹평하고 있기도 합니다. 전자가 풍수설에 근거한 것이라면 후자는 사람에 관한 것이니 좋은 평이야 그렇다 치고 오늘 충청도에 적을 두고 사는 사람으로서 ‘세도와 재리 만을 쫓는다’는 것에 대해서는 결코 동의할 수가 없을뿐더러 불쾌감 또한 금할 수가 없습니다.

옛날의 평가가 어떠했건 해방이후 60년대까지 충청도에 대한 일반 국민의 인식은 그리 호의적인 것은 아니었지 않나 싶습니다. 물론 인성(人性)이 순박하고 인심이 좋다는 긍정적 평가가 있었긴 하지만 ‘야∼’, ‘왜 유∼’, ‘몰라 유∼’로 상징되는 느린 말투, 농업도로 도세가 약한데다 낙후된 고장이라는 인식이 전부였습니다.

50, 60년대 논산훈련소에는 “아∼버∼지∼돌∼굴∼러∼가 ∼유”라는 웃기지도 않는 유머가 유행했던 적이 있습니다. 산 위의 아들이 굼뜨게 소리치는 사이 돌이 먼저 굴러 내려가 아버지를 쳐죽인다며 충청도입소병들을 모욕적으로 놀려댔던 것입니다.

그뿐인가요. 70년대까지만 해도 라디오나 TV홈드라마의 식모역은 어김없이 충청도 말씨를 썼습니다. 숙맥 같은 연기, 느려 터진 말투의 모자란 듯한 시골뜨기 충청도 색시가 식모로는 적역이었던 것입니다. 작가나 연출자의 고약한 심보가 괘씸했지만 사회 인식이 그랬었기에 달리 어쩔 수도 없었습니다.

다행히 70년대 들어와 충북이 소년체전 7연패의 위업을 달성하면서 “말은 느려 두 행동은 빨라 유”로 바뀌었고 서울과 지방의 문화 격차가 좁혀 지면서 이제는 그러한 일화들이 흘러간 옛 이야기가 되었습니다.

이번 충북에서 열렸던 85회 전국체전은 일부 우려에도 불구하고 아무 탈없이 무사히 잘 치렀습니다. 사상 최대의 선수단이 참가한 대회였지만 충북은 훌쩍 뛰어 올라 3위에 입상했으니 일석이조의 성과를 올린 셈입니다. 대회를 주관한 충북도는 종합 1위 욕심마저 갖고 우승을 공언까지 했던 터라 실망이 큰 모양이지만 ‘만년 10위 탈피’가 철천지 소원이던 과거를 돌아본다면 그야말로 격세지감을 금할 수 없습니다.

기개와 포부가 아무리 야무지다 한들 도세로 보아 종합우승이 그리 녹록한 것은 아닙니다. 우승한 경기도는 인구 1천만에 연 예산이 10조원입니다. 서울이야 말할 것도 없고요. 그런데 인구150만, 예산 1조5천억의 ‘꼬마충북’이 그 거대한 도 경기, 서울을 꺾고 우승을 한다? 그건 애당초 과욕이었습니다.

잘 했습니다. 그만하면 대회운영도 합격점이었고 경기결과도 서운할 게 없습니다. 처음 보는 성화대도 인상적이었고 어둠 속에서 성화 주자가 스포트를 받으며 입장할 때 베토벤의 ‘환희의 송가'가 울려 퍼지는 장면도 극적이었습니다. 게다가 금강산 불마저 가져 왔으니 큰 성공 아닙니까.

우리도 할 수 있습니다. 문제는 패배주의의 극복입니다. 충북의 힘, 그것은 바로 그런 자신감에서 나온다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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