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민식의 ‘톡톡 튀는 청주史’
독립로라 이름 붙일 그 길
역사에서 배웠던 당쟁이 지역에서 구현된 것은 산송이다. 역시 중앙 세력의 힘을 입은 노론계의 우세로 매듭 된다. 교하노씨와 함께 청주 남쪽 지역의 대표적인 성씨는 고령신씨이다. 같은 훈구파의 후예라 하더라도 다른 길을 간 경우이다. 지금 상당구 가덕면, 낭성면, 미원면 일원엔 다수의 고령신씨가 세거한다. 이들은 ‘노블리스 오블리제’ 자체다. 국권을 빼앗긴 후 15명의 독립운 동가를 배출한 것도 빼어나다.
가덕면 사무소와 마주 보는, 북쪽을 향해 신홍식申洪植, 1872~1937의 묘소가 있다. 묘비의 앞면은 박정희 전 대통령이 쓰고, 비는 육인수가 세웠다.
그는 3·1만세운동 33인의 한 사람이다. 35세 세례를 받은 후 1913년 서울 협성신학교를 졸업한 뒤 공주와 평양 등에서 목회활동에 나섰다. 1919년 태화관에서 체포된 후 2년 6개월 동안 복역했다. 출옥 후 인천과 원주 등에서 목회 활동에 전념하였다. 1962년 건국훈장 대통령장이 추서되었다. 2006년 3월 이달의 독립운동가에 선정된 바 있다.
중추원 의관을 지낸 신용우는 네 아들을 두었는데, 장남 신정식申廷植을 제외하고 모두 중국에 망명하여 독립운동에 뛰어들었다. 신정식은 독립운동에 투신한 동생들로 인해 주재소에 끌려가 잦은 고초를 겪었다.
신규식·신건식 형제는 청주시 상당구 가덕면 인차리에서 출생하였다. 이곳은 고령신씨의 집성촌으로 그들은 소안공의 16대손이다.
신규식申圭植, 1879~1922은 1879년 청주시 상당구 가덕면 인차리에서 신용우의 둘째 아들로 태어났다. 관립 한성어국어학교와 육군무관학교를 졸업하여 장교가 되었다. 그러나 1905년 을사늑약이 맺어지자 음독자살을 꾀했으나 가족에게 발각되어 뜻을 이루지 못한 채 후유증으로 사시가 되었다. 그 이후로 흘겨 본다는 뜻으로 호를 예관睨觀이라 하였다. 1911년 중국에 망명하여 한중연합체인 신아동제사를 조직하고 박은식과 대동보국단을 만들어 잡지 ‘진단’을 발행하였다. 1919년 상해 임시정부가 수립되자 의정원 부의장, 법무총장, 국무총리서리, 외무총장을 지냈다. 1922년 임시정부 내 갈등이 심해지자 단식을 시작하여 25일 만에 세상을 떠나고 말았다. 상해 홍교로의 만국공원에 안장되었는데, 1993년 8월 유해가 봉환되어 서울 국립묘지에 안장되었다.
신건식申建植, 1889∼1955은 관립 한성외국어학교에 입학하였으나 중도에 중국으로 망명하여 항주 절강성접의약전문학교를 졸업하였다. 1919년 상해 임시정부가 수립되자 밀서를 갖고 국내에 들어와 손병희 선생에게 전하고 돌아가던 중 신의주에서 붙잡혀 1년간 옥고를 겪었다. 출옥 후 다시 중국에 건너가 임시정부의정원 대의원이 되고 한때 황포군관학교의 무관을 지냈다. 임시정부의 재무차장을 지냈다. 중일전쟁 때 임시정부를 따라 중경으로 옮겨갔다가 해방을 맞았다. 이후 귀국하여 1955년 3월 세상을 떠났다.
신건식의 외동딸이자, 신규식의 조카인 신순호申順浩, 1922~2009는 아버지와 함께 부녀 독립운동가로 유명하다.
인차리 일원 독립운동가의 자취
가덕면 인차리에는 이들 일가의 자취가 남아있다. 인차2길 마을 안쪽에 신규식·신건식 형제의 생가가 있다. 좀더 들어서면 신규식 부부의 묘소가 있다. 원래 신규식의 부인 한양조씨의 묘소였다. 그 후 신규식의 유해를 옮겨오면서 한때 합장하였다가 다시 국립묘지에 안장하였다. 묘의 상석에는 한양조씨 홀로 모신 배경을, 묘비에는 합장 과정을 소상히 밝혀놓았다.
가덕중학교 또한 이들 일가의 자취가 있다. 학교 운동장 한켠에는 신홍식의 동상이 있다. 그리고 교사 뒤쪽엔 삼강三岡도서관이 있는데, 신순호가 아버지의 뜻을 이어 도서관 건립 비용을 희사한 것이다.
인차3길 마을 안쪽으로 들어서면 골목 안 옛 집을 만난다. 일제강점기 일경에 의해 불태워진 신형호 고가(충청북도 유형문화재 제148호)이다. 사랑과 행랑채는 없고 안채만 남아있다.
마을 안쪽을 더 들어서면 높다란 기와집이 있다. 보한재 신숙주申叔舟, 1417~1475의 초상(보물 제613호)을 보관하고 있는 구봉영당九峰影堂이다. 가덕면 일원은 독립운동의 일가를 이룬 고령신씨의 자취가 곳곳에 남아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