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남야 「보리밟기」 전문

나는 보리밟기가 아주 좋아서
外叔네서 닷새를 지내는 동안
내처 보리밟기만 하였어요
투명한 햇살을 등에 지고
잔설의 흔적이 쬐끔씩 남아있는
가파른 산등의 몇 십 평쯤은
아주 재미난 일이었어요
첫돌 지난 놈의 잠지처럼
봉곳이 솟아오른 푸른 靑보리
초장이 웃자라면 안 된다고
엽수를 잘 가려야 한다고 해
짧은 섣달 한나절을
사방팔방으로 돌아다니며
삐죽이 쳐들은 초움들을
싹수부터 암팡지게 밟았지요
外叔은 여러 번 말했어요
보리는 그렇게 밟으면 밟을수록
보송보송한 속살이 오르고
동토를 헤집고 솟아오르는
강한 힘력이 길러진다고
그러니 폭설이 언 땅을 내리치고
만산이 길게 동면을 해도
보리만은 쑥쑥 솟아올라
이 땅의 산천을 누비고 누비며
그 푸르른 힘력을 자랑하지요
나는 그것이 참 신기하여
外叔네서 닷새를 지내는 동안
내처 보리밟기만 하였어요

─ 조남야 「보리밟기」 전문(시집 『미발표』에서)
 

그림=박경수

선운사 동백이 피었다 지고, 질마재 너머 선술집 주모의 육자배기 가락이 구성진 미당의 고장 고창에선 5월이면‘ 청보리 축제’가 열린다는군요. 드넓은 벌판에 푸른 보리 이삭이 물결처럼 출렁이는 풍경을 보러 많은 사람이 모인다지요. 옛날 같으면 5, 6월이 보릿고갠데, 보리밭이 관광 상품이 되다니. 세월 참 많이 변했습니다.

예전부터, 보리 싹이 겨울을 나는 동안 서리의 피해를 막고 내한성을 높이기 위해 보리밟기를 했지요. 뿌리의 발달을 촉진하고 동상의 피해를 막을 수 있어 보리농사에 꼭 필요했고요.

평생 인문 고등학교에서 국어를 가르쳤고, 또 그 학교의 교장이 되어 많은 제자들을 길러낸 시인은, 줄곧 최고의 스승으로 칭송 받았습니다 그 많은 학생들의 이름과 가정 환경을 지금도 기억하고 있을 정도로 학생들에게 집중했으니까요. 그래서 가정환경이 어렵거나 넉넉하거나, 공부를 잘하든 못하든 그에게 가르침을 받은 학생 대부분이 가장 존경하는 스승으로 여기지요. 그는 학생들을 참‘ 암팡지게 밟아주고, 보송보송한 속살이 동토를 헤집고 솟아올라 강한 힘력이 길러질’ 때까지,‘ 보리밟기’ 하는 심정으로 온 힘을 다해 이 땅의 동량들로 길러냈습니다.

청보리 쑥쑥 올라올 때 한줄기 바람이 일어 천지의 푸르름을 뒤흔들면 우리는 정말 살고 싶어집니다. 그런데 그토록 눈에 익은‘ 보리밭 사잇길’은 지금 어디 있나요. 마음의 풍경 속에나 두고 살 일입니다.

저작권자 © 충북인뉴스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