협치 중시한 민주주의 확인, 프렌도서관에서 받은 감동도 벅 차

윤송현의 세계도서관기행
(9)북유럽 편

스톡홀름에 머물던 어느 날, 아무런 사전 계획도 없이 하르프순드(Harpsund)를 향해 길을 나섰다. 스톡홀름 중앙역에서 기차를 타고 1시간 정도 가서 프렌(Flen)에서 내리고, 그곳에서 한참을 기다리다 하루에 몇 편 없는 버스를 타고 7~8km를 가서 내린다. 그리고 숲속으로 난 인적이 드문 길을 따라 5km 정도 걷는다. 구글링에서 찾아낸 정보다. 돌아오는 길은 버스 시간을 맞추지 못하면 프렌역까지 걸어야 한다. 그 정도는 감당하고 싶었다.

하르프순드. 타게 에를란데르 총리가 매주 목요일이면 사회의 지도층들을 불러 대화를 했던 곳이다. 특히 대립관계인 노총(LO)과 경총(SAF)의 지도자들을 같이 불러 대화를 주선해서 산업평화를 유지하는데 크게 기여했다. 전후 스웨덴이 비약적으로 발전하는 가운데 노사간의 대립을 협력으로 이끌어낼 수 있었는데, 이를 하르프순드 민주주의(Harpsund democrati)라고 부르기도 한다.

프렌역에서 내려 버스 시간을 확인하니 한 시간 정도가 남았다. 마을 안내도를 살펴보니 제일 먼저 눈에 들어온 것이 Bibliotek(도서관)이다. 생각지도 않았던 곳에서 도서관을 살펴볼 수 있게 됐다. 이렇게 자그마한 자치단체의 도서관은 어떤 모습일까?
 

하르프순드 별장.

인구 6000명 마을에 이런 도서관이…

아무런 사전 지식도 없이 들여다본 도서관이지만 예상했던 시골도서관이 아니었다. 우선 도서관이 마을의 중심 광장 앞에 자리잡고 있다. 도서관 내부는 최근에 아주 잘 만들어진 우리나라 도서관 정도. 아니 그보다 더 좋다. 자료를 살펴보니 인구 6000명인 프렌에서 이곳이 본관이고 분관이 네 곳이나 더 있었다. 프로그램은 더 놀랍다. 이곳에서 어플을 다운받으면 전세계의 신문 6000여 가지를 열람할 수 있는 프로그램을 제공하고 있었다.

인터넷을 통한 이용이나 와이파이 제공은 기본이고, 오디오북을 이용할 수 있고, 많은 다국어 자료를 이용할 수 있고, 다국어 프로그램을 운영하고 있다. 저자와의 대화, 뮤지컬 공연 등 다양한 행사도 개최하고 있다. 이 작은 마을의 도서관에서. 관장인 칼손은 그래도 예전보다 예산이 줄어들어서 어렵다고 아쉬움을 털어놨다. 그동안 사민당이 정권을 다시 잡았으니 좀 나아졌는지 모르겠다.

프렌에서 버스를 탔더니 승객이 몇 명 없다. 혹시나 지나칠까봐 기사에게 멜로사(Mellosa)에서 내리겠다고 하며 말을 걸었더니, 하르프순드를 찾아가는 외국인은 처음 봤다고 한다. “거기를 왜 가니?”“거기는 일반인이 그냥 들어갈 수 있는 곳이 아닌데.” 돌아가는 버스는 없을 거라고 했지만 그래도 가보고 싶다고 했다.

6월의 스웨덴은 참 상큼하다. 넓은 목초지가 지평선을 이루고, 듬성 듬성 심심하지 않을 만큼 숲이 자리잡고 있다. 하늘은 푸르고, 공기는 상쾌하다. 습도가 낮기 때문이다. 들판을 걸으며 심호흡을 하면 폐부 구석구석에 맑은 공기가 휘도는 느낌이 든다.

하르프순드는 스웨덴 총리의 별장이다. 그러니 느닷없이 일반인이 찾아들어갈 수 있는 곳이 아니다. 다 알고 갔기 때문에 문전박대를 당해도 서운하게 생각하지 않았겠지만, 아무리 둘러보아도 대문 안으로 사람을 찾아볼 수가 없었다. 그저 별장 앞에 적힌 기록들을 살펴보며 상념에 젖어드는 것만으로도 충분하다.
 

프렌도서관의 잉게르칼손 관장과 함께.

기업가의 기부를 받아야하나?

하르프순드 별장은 17세기에 이 지역의 영주에 의해 지어졌다. 이후 스웨덴의 산업화 과정에서 부를 쌓은 기업가인 비칸데르(Carl Wicander)의 손에 넘어갔고, 비칸데르는 1952년 스웨덴 총리의 별장으로 쓰이길 바란다는 유언을 남겼다. 이 유언이 공개되자 스웨덴 정계는 떠들썩해졌다. 당시 스웨덴 정부에는 별장이 없었기 때문에 기증은 매우 뜻깊은 일이었다.

그러나 사민당은 기업가로부터 막대한 가치 자산 기부를 받는다는 것을 흔쾌하게 동의하지 않았다. 많은 논의를 거친 뒤에야 에를란데르 총리는 기증을 받아들였다. 그리고 별장을 정부와 산업계, 그리고 스웨덴의 여러 사회 단체간의 비공식적인 회의장소로 사용했다. 특히 노총과 경총의 지도자들을 수시로 초청해서 이야기를 나눴다. 세계 노사관계에서 가장 획기적인 정책인 연대임금제가 도입되었고, 스웨덴 노사관계의 가장 중심적인 정책으로 자리잡은 것도 그의 재임 초기에 있었던 일이다.

에를란데르는 무려 23년간 사민당의 당수로서 스웨덴 총리로 재직하였다. 사람들은 그에게 계속 당과 나라를 위해 일할 것을 원했지만, 마지막에는 그가 그만두겠노라고 말하고 후임으로 팔메를 지명한 뒤에야 물러날 수 있었다. 그만큼 에를란데르는 평소에 늘 대화를 중시했고, 협의를 통해 정책을 추진하는 협치의 모범을 보였다.

하르프순드에서 돌아오는 길. 프렌역까지 3시간을 걸었다. 스웨덴의 6월은 낮이 길다. 저녁 8시가 되었어도 아직 어두워질 기미를 보이지 않는다. 돌아오는 길에 에를란데르와 많은 이야기를 나눴다. 복지국가로 가는 길에서 제일 중요한 것이 무엇인가? 중요한 것은 신뢰이다. 서로를 존중하고, 다름을 인정하고, 끊임없는 대화를 통해 서로에 대한 신뢰를 차곡차곡 쌓아나가는 것. 그런 신뢰를 바탕으로 새로운 것들을 추진하면서 서로 협력하고, 또 신뢰를 더 튼튼히 하고. 그렇게 사회적 신뢰를 차근 차근 쌓아나가는 것이야 말로 복지국가로 가는 길이다.

분실물을 내주며 환하게 웃는 스웨덴철도(SL)의 직원. 스톡홀름에서 1백Km 이상 떨어진 베스테로스행 기차에 놓고 내린 책을 스톡홀름중앙역에서 찾아주었다.

돌아올 때는 베스테로스행 막차를 타고 에스킬스투나에서 갈아탔는데, 졸다가 엉겁결에 내리는 바람에 책과 자료를 놓고 내렸다. 말하자면 오송역에서 갈아타면서 책을 기차에 놓고 내렸는데 책을 실은 기차는 제천행이고, 나는 서울역으로 간 것이다. 주위 사람들에게 하소연을 하니 스톡홀름 중앙역에 있는 분실물센터에 신고를 해놓으란다. 그 믿음을 시험하는 마음으로 시간을 내서 등록을 해놓았는데, 며칠 뒤에 갔더니 직원이 웃으면서 책과 노트를 꺼내주었다. 역시 사회적 신뢰가 높은 나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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