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사 격외도리/ 한덕현 충청리뷰 발행인

한덕현 충청리뷰 발행인

지난 18대 대선을 앞두고 문재인은 <문재인의 운명>이라는 책을 내고 전국을 돌며 북콘서트를 가졌다. 이 책의 표지에 이런 말이 있다. “운명같은 것이 나를 지금의 자리로 이끌어 온 것같다. 노무현 변호사를 만나고 지금에 이르게 된 것도 마치 정해진 것처럼 느껴진다. (노무현)대통령은 유서에서 ‘운명이다!’라고 했다. 내 삶도 그런 것같다.”

사실 문재인이 대통령이 되기까지는 가히 운명의 조화라고 말해야 자연스러울 것같다. 사법연수원을 차석으로 수료하고서도 대학시절의 시위전력 때문에 판사임용이 좌절되자 부산으로 내려가 평생 동지 노무현을 만난 것이나, 또 노무현의 갑작스런 죽음을 계기로 지지자들에 의해 대권도전의 길로 내몰린(?) 것이나, 적어도 그가 대통령을 거머쥐기까지는 이 책에서 언급한대로 어느덧 자신에게 다가오는 ‘운명’을 거역하지 않고 힘들게 받아들인 측면이 강하다.

문재인이 정치에 입문할 당시 그를 아는 거의 모든 사람, 특히 대학에서 형님동생하며 동고동락했던 이들조차 “결코 정치할 사람이 아닌데...”라는 반응을 보인 것도 예의 운명론을 뒷받침하고도 남는다. 신의도 없고 의리도 없다는, 그리하여 인간관계의 가장 저열함으로 상징되는 정치판은 평소 그의 품성에 비춰볼 때 절대로 어울리지 않는다는 예단에서 비롯됐겠지만 어쨌든 문재인의 정치인생은 이처럼 스스로의 의지보다는 주변으로부터 더 최촉되었음은 부인할 수 없다. 바로 운명이었던 것이다.

이랬던 그가 끝내 대통령이 되었다. 그 것도 나라가 가장 위기에 처했을 때 선거전의 처음부터 끝까지 국민들로부터 흔들리지 않는 지지를 받아 선택된 것이다. 최순실이라는 사인(私人)에 의한 국정농단과 그로 인한 대통령 탄핵 또한 어찌 보면 문재인에겐 하루라도 빨리 나라를 책임지라는, 회피할 수 없는 운명으로 다가 온지도 모른다. 어차피 운명이란 것은 나의 뜻과는 상관없이 불가역적(不可逆的) 영역으로 주어진다.

문제는 지금까지의 ‘문재인의 운명’과 앞으로 대통령으로서 그가 마주할 운명은 분명 다르다는 것이다. 이제까지는 주변과 외적 요인으로부터 주어지는 운명이었다면 앞으로 운명은 그저 맞아들여 순응하기보다는 스스로 개척하거나 극복해야 하는 대상이라는 것이다. 누가 뭐래도 오늘까지의 ‘문재인 정치’는 그야말로 조건없이, 어느 땐 맹목적일 정도로 그를 지지하는 사람들이 만들어 주고 가꾸어 왔다고 해도 틀리지 않다.

거기엔 정치인답지 않은 그의 남다른 인간미가 배경이 되었을 수도 있고, 아니면 그가 썩어문드러진 국가리더십에 대한 유일한 대안으로서 국민기대감을 대책없이 부추겼을 수도 있다. 분명한 것은 이번 대선의 결과는 보수와 진보라는 흑백의 이념은 물론이고 망국병이라는 영호남 지역감정까지도 넘어선, 대통령이라는 자리가 더 이상 거짓과 기망으로 망가져서는 안 된다는 국민적 절박함의 발로라는 사실이다. 이를 문재인이 명심한다면 앞으로 그가 맞이할 운명은 오롯이 본인의 몫이고 또 철저하게 본인이 책임져야할 문제다.

그런데 당선되자마자 대통령직을 수행해야 하는 문재인을 기다리는 운명은 하나부터 열까지가 참으로 냉혹하다. 당장 여소야대의 족쇄가 채워지면서 선거과정에서도 확인됐지만 정적들 뿐만 아니라 보수와 기득권세력들의 어깃장은 상상을 초월할 것이다. 정치권력만 잡은 것이지 그 외 언론과 기관·재벌·경제권력은 고스란히 대립각으로 살아 있다는 유시민의 지적은 맞다.

결코 태어나지 말았어야 할 후보와 정당이 선거판을 휘저은 결과는 지금으로선 예측불가능한 정계개편 소용돌이로 그 후유증을 몰고 올 것이다. 게다가 인수위라는 절차적 과정도 없이 정권을 떠안게 됨으로써 어차피 문재인을 둘러싼 당내의 권력다툼은 초장부터 피할 수 없게 된다. 그 낯뜨거운 광경을 두려워하는 지지자들로선 그렇더라도 제발 ‘진보는 분열로써 망한다’는 불문율만큼은 피해주기를 바랄 뿐이다.

문재인의 공약인 ‘적폐청산’과 ‘통합’은 우선 그 의미부터가 서로 대척을 이룬다는 점에서 이 또한 그로선 헤쳐나가기가 힘든 운명이 될 것이다. 적폐청산은 사람에 대한 정리가 없이는 말장난에 불과하다. 문재인은 끊임없이 주변으로부터 이를 위한 결단과 행동을 요구받게 될 것이고 자칫하면 한국정치의 악질병인 정치보복으로 변질될 수도 있다.

지금까지 역대정권에서 했던 것처럼 개혁의 명분을 정치세력의 피아(彼我)를 가리는 데서 찾는다면 이는 100% 정치보복으로 점철된다. 때문에 새 정권의 적폐청산이 네편과 내편의 적대적 이분법으로 시도된다면 기다리는 건 실패와 좌절밖에 없다.

이 것의 답은 광화문의 촛불에서 찾을 수 있다. 법과 원칙 그리고 국민의 공감, 여기에다 상식까지를 준용한다면 어떠한 정치개혁도 가능하다. 적폐청산은 절대로 정적과 불편한 사람들을 내치거나 죽이는 게 아니다. 정상적인 국가시스템을 회복하는 것, 국민이 이 나라의 주인으로서 그 긍지와 책임감을 갖게 하는 것, 이렇게만 되면 문제의 적폐는 알아서 청산된다.

‘이게 나라냐’로 상징되는, 냉정하게 따지면 박근혜 정권이 국민 모두를 아나키스트(무정부주의자)로 변질시켰지만 역사적으로 세계의 아나키스트들이 간절히 바란 건 인간 이성의 본질과 기본·상식이 통하는 사회, 그리하여 예측가능한 국가를 세우는 것이었다. 그들이 추구하는 절대적인 개인 자유와 해방은 결국 이 것이 보장되지 않는데 따른 불신의 발로일 뿐이다.

어린 학생을 떼죽음으로 수장시키고도 대통령은 보톡스와 올림머리에만 정신이 팔려있고, 대통령의 말 한마디에 멀쩡한 국가공무원이 옷을 벗는 이런 야만의 ‘국가폭력’을 깨지 못한다면 국민들은 앞으로도 끊임없이 “이게 나라냐”를 외쳐댈 것이다. 광장의 촛불민심은 제왕적 대통령의 폐해를 응징하면서도 이를 막으려면 대통령도 중요하지만 국민부터 바뀌어야 한다는 걸 역사의 가르침으로 남기고 있다.

때문에 실패한 역사는 결코 없다. 역사속의 실패는 필연적으로 다음 세대의 유산으로 남는다. 이명박의 사기정권과 박근혜의 최순실 아바타정권도 ‘대한민국’에겐 두고두고 교훈으로 각인될 것이다. 앞으로 문재인이 맞게 될 가장 절박한 운명은 바로 여기에 있다. 전임자들의 질곡을 타파하고 나라를 올바르게 세우는 일, 그 역사적 소명을 조금이라도 흩트리면 안 된다는 것이다. 반드시 싸워서 이겨내기를 바란다.

이제는 운명을 받아들이는 대자적(對自的) 정치인에서 벗어나 그 운명을 스스로 개척하고 극복하려는 국가지도자로서의 카리스마, 이를 확실하게 곧추세울 것을 국민의 이름으로 주문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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