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인국 / 신부. 천주교 청주교구 민족화해위원장

예수는 만인이 공경하는 인류의 스승이다. 백범 김구는 온 겨레가 존경해마지 않는 민족의 지도자다. 두 분 모두 제 명을 못 채우고 가셨다. 오늘 우리와 함께 사신다 해도 마찬가지의 험한 종생을 겪으실 것이다. 겉으로야 이구동성으로 공경과 찬양을 드리지만 속으로는 어림없다. 두 분은 ‘연대’의 가치를 중시했다는 점에서 꼭 닮았다. 그래서 두 분 모두 연대성의 가치에 저항하는 세력의 총탄을 맞고 죽임 당하셨다.

예수 시대의 사회에서 돈 다음으로 으뜸가는 주요 관심사는 파벌의 결속이었다. 고래로 유대 민족은 탁월한 단결심을 보였다. 특히 위기에 처할 때 결속의 힘이 더욱 빛났다. 그러나 예수 당대에는 이방인 세계에 대항하여 민족이 굳게 뭉치는 온 겨레의 통합보다 민족 내부에서 각 집단이 이루는 연대를 더욱 중시하였다.

연대와 결속의 기본단위는 혈통과 가문이었다. 가족은 나와 동일시되었다. 가족의 한 사람이 해를 입으면 온 가족이 함께 그것을 느꼈다. 친척이 모욕을 입으면 가문 전체가 다 함께 분노하여 복수의 의무를 나눠 가졌다. ‘눈에는 눈, 이에는 이’라는 원칙이 선으로 고수되었다. 이런 특별한 방식의 연대는 가족과 가문을 넘어 친구나 동업자 같은 동료 관계에도 적용되었고, 특히 엘리트 그룹 사이의 종파까지 확장되었다.

그러나 그 이상을 넘지 않았다. 배타적인 연대의 사회는 ‘네 이웃을 사랑하라’는 보편 계명을 수용하되 이웃의 개념을 같은 인간이 아니라 네가 ‘너 자신’으로 여기는 너의 일가와 친척, 그리고 네가 속한 집단의 구성원으로 한정시켰다. 자기네끼리 똘똘 뭉치는 패거리의 미덕으로 환치시킨 것이다. 흉 볼 것 하나 없다. 무슨 일이든 제가 속한 집단의 실익을 먼저 계산하여 그 이기심을 온갖 논리로 포장하는 우리 사회의 교언영색은 이에 조금도 뒤지지 않는다.

그러나 예수는 제 아버지와 어머니, 아내와 자녀, 형제와 자매를 ‘미워하라’고 가르쳤다. 미워하라는 말은 다름 아닌 그 유치한 ‘파벌의 연대’를 제발 좀 넘어서라는 호소였다. 아무도 갈라놓지 않는 만인의 연대를 제창한 것이다. 구성원의 8할 이상을 죄인으로 낙인찍고 그 위에서 편하고 손쉽게 특권과 우월감을 누리던 배타적인 연대의 우두머리들이 그를 가만둘 리 없었다. 예수의 십자가 죽음은 통합과 연대라는 당연하고 상식적인 가치가 좌절된 사건이었다.

김구 선생은 이승만의 단독정부 수립에 반대하며 “삼팔선을 베고 쓰러질지언정” 통일정부 수립을 위해 북행을 감행하였다. 그 결과 남북 양쪽의 유력한 집권 세력에게 미움을 샀다. 겨레의 통일보다 개인의 집권을 더 크게 여겼던 이승만은 온 겨레의 연대를 주창하는 김구를 심각한 걸림돌로 여겼다. 결국 겨레를 한 동아리로 묶는 연대의 꿈 또한 십자가 위에서 숨이 끊어지고 말았다.

쥐 떼가 거함의 파선을 예감한 것일까? 여당의 4대 개혁 법안이 확정되자 한나라당과 수구언론들이 일제히 결사항전의 포문을 열었다. ‘자기들만의 연대’가 심각한 타격을 받고 붕괴될 조짐을 읽었기 때문이다. 여당이 초안한 사립학교법 개정안에 대해 천주교회 주교회의 마저 체면 불구 반대표를 던지고 나섰다. 집단의 이익이 걸렸으니 가만히 참지 못하고 속마음을 끄집어 내 보인 것이다.

어떤 이가 짜증을 내며 개혁이 뭐 길래 이토록 사람들을 불안하게 만드느냐고 묻는다. 예수의 꿈과 김구의 소망으로 돌아가는 아주 단순한 길이라고 답하련다. 미신과 파벌의 연대를 넘어 이성의 상식과 효율의 사회로 건너가자는데 그렇게 불안하실까? 나는 일제 식민지와 군사독재 속에서 평온을 찬양했던 자들이 혼란을 호소하는 오늘, 도리어 삶의 생동감을 느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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