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진항-봉포항-용촌리-장사항-동명항-속초항

오늘도 걷는다마는<5>

다섯째 날, 모텔 인근에서 육개장으로 아침을 먹고 시내버스를 탔다. 어제 걷기를 끝내고 버스를 탔던 켄싱턴리조트를 지나 봉포해수욕장에 내려 걷기를 시작한다. 바닷가 즐비한 펜션 건물 뒤로 들어가니 갈매기들이 백사장을 차지하고 뭔가를 찾아 먹는지 열심이다. 어제 저녁 스치듯 지나온 천진항 방향을 돌아본다. 카메라를 들어 렌즈를 한껏 당기니 천진항 뒤로 청간정이 잡힌다.
 

봉포해수욕장의 아침. 갈매기들이 백사장에 몰려 있다.
봉포항 원경.

워밍업을 마치고 남쪽을 향해 출발이다. 봉포해수욕장 끄트머리 백사장에 바위가 천학정에서 보았던 것과 같은 계통의 비슷한 모양새를 한 암석이 제법 멋지다. 바위에 오른 길동무 사진을 찍어주며 봉포항 가까이 가니, 파도에 갈리며 소리를 낸다는 맷돌바위가 있다. 안내문을 읽고 귀를 기울여 보지만 맷돌소리는 들리지 않는다.

맷돌바위를 지나니 금새 봉포항이다. 활어센터 앞을 지나 방파제로 나아가 봉포항 모습을 카메라에 담는다. 봉포항은 꽤나 큰 어항이다. 주변에 커다란 건물도 많고 해양경찰, 아니 이름이 바뀌어 해양경비안전서 봉포출장소가 있다. 봉포항이 이제까지 스쳐간 다른 어항보다 번다한 것은 아마도 속초시가 가까운 영향도 있을 것이라 짐작해본다. 방파제 끝에는 누군가 텐트를 쳐놓고 낚시를 하고 있다. 다정하게 손을 잡고 방파제를 걷는 중년부부의 모습도 보기가 좋았다.
 

파도에 갈리는 맷돌바위라는데 가까이 다가가지는 못하고 안내판 설명만 보았다.

방파제를 돌아 나와 항구 안으로 가니, 이제 막 들어 온 듯 고깃배 한 척에서 어부 부부가 잡아 온 생선을 내리고 그물을 정리하고 있다. 그들이 잡아 온 물고기라야 고작 배불뚝이 생선 한 대야에 불과하니 어찌 신명나서 일할까. 밖에서 한 컷 잡았으나 가까이서 한 번 더 담으려 카메라를 드는데 “사진 찍지 마세요!” 아주머니의 말씀에 황급히 카메라를 내린다. 죄스런 마음이 왈칵, 미안하다는 말 한마디 못하고 자리를 뜬다.

머쓱해져서 발걸음을 재촉한다. 항구를 벗어나자 해변에 재밌는 수영금지 플레카드가 있다. “바다의 왕자 ‘박명수’도 못 들어가요”가 뭔 얘긴지 몰라 검색을 해보니 개그맨 박명수가 부른 노래 제목이 ‘바다의 왕자’였다. 궁금증을 유발하는 데는 성공했는지 몰라도 뭔 소린가 싶다.
 

고기잡이에서 돌아와 그물을 정리하고 있는 어부 부부와 뱃전에 보이는 생선함지박(아래).

고성8경 중 6경 답사 마무리

곧 이어 해수욕장이 나타나는데 여기저기 사람들이 꽤 나와 있는 것은 아마도 커다란 리조트와 카라반 같은 시설이 있기 때문이지 싶다. 광포호에서 흘러나온 개울물이 바다 끝까지 미치지 못하고 모래톱에 묻히고 만다. 고성군이 설치한 동해안 국토종주 자전거길 종합안내도가 커다랗게 세워져 있다. 이곳이 금강산 방향으로 북상하는 고성군 구간 출발지점이기 때문일 것이다. 안내판에 소개되어 있는 고성8경과 주요관광지를 살펴보니 딱 두 군데, 해변에서 멀리 떨어진 울산바위와 마산봉 설경만 가보지 못했을 뿐 나머지는 다 보았다.
 

광포호에서 흘러 온 냇물이 바다 가까이 와서 멈추었다.

울산바위 쪽에서 흘러오는 용촌천 또한 바다 가까이 철조망 근처에 물길이 그치면서 호수처럼 물이 고여 있고 철새들이 놀고 있다. 큰길로 나와 용천교를 건너니 용촌리 시내버스정류장이다. 한 남학생이 한 여학생을 바라고 서 있는 광경을 보면서 문득 중학교 때 고향 가는 버스에서의 일이 떠올랐다. 중간 중간 승객들이 다 내리고 차 안에는 나와 초등학교 동기인 여학생만 남았었다. 나는 왼쪽 좌석에 그녀는 오른쪽 좌석에 앉아 서로 창밖을 바라보기만 할 뿐 말을 걸어보지 못했다. 어지간히 숫기가 없었던 숙맥이라서 여자 반 교실에 심부름도 가지 못할 정도였으니 더 말해 무엇하랴. 활달하지 못한 제자에게 숫기를 틔우려고 담임선생님은 웅변을 가르치기까지 했었다. 시내버스정류장 건너편으로 지나면서 속으로 외쳤다. “용기를 내, 말을 걸어! 어서 말을 해~”
 

동해안 국토종주 자전거길 고성군 구간 안내도.

고성군 - 속초시 경계인 고개를 앞두고 길은 다시 해변으로 간다. 멋진 외관을 한 카페를 지나니 또 다른 카페가 앞을 가로 막는다. 어쩔 수 없이 길은 다시 큰길 쪽으로 꺾어 언덕을 오른다.

“어서오십시오! 대한민국 제일의 관광도시, 시민과 함께 하는 행복도시 속초”

아치 광고탑이 손짓을 한다. 마침내 고성군 전 구간을 주파하는 순간이다. 속초시 경계에 들어 와 뒤를 돌아보니, 같은 광고탑에 이번에는 “금강산은 부른다. 웰컴, 살기 좋은 고장, 살고 싶은 행복 고성”이 배웅을 한다.

해양경찰충혼탑을 지나 장사항으로 들어간다. 일요일이라서 그런지 장사항에는 관광객이 꽤 많다. 어? 청주에서 온 관광버스가 좁은 길을 지나 장사항 활어회직판장 앞 광장에 사람들을 부려 놓는구나. 멀리도 오셨네. 요란번쩍한 간판으로 장식한 물회집 앞 장사항 바다숲공원은 아직 나무들이 어려서 숲공원이란 말이 무색하지만 말끔하니 단장을 해 손님맞을 준비태세를 갖췄다. 잠시 쉬면서 화장실도 다녀오고 생수도 새로 챙겨 속초항으로 향한다. 인도에 바짝 붙여 주차한 자동차커피숍의 테이크아웃커피 카피가 그럴 듯하다. “아메리카노를 들고 그대가 있는 그곳을 향해”
 

방책이 설치된 용촌천 끄트머리에 철새가 노닐고 있다.
속초시 – 고성군 경계에 서 있는 환영 아치를 사이좋게 공유하고 있다.(위, 아래)

속초 동명항, 길동무와 이별주

오른편으로는 영랑호를 멀리 바라보며, 왼편 바다 쪽으로 등대해수욕장에 이르자 T장형으로 된 모래톱 끝 방파제 근처까지 자동차를 몰고 들어가는 차량들이 보인다. 속초 등대가 가까워지면서 길가에서 생선을 말려 팔고 있고, 그 뒤로 흰색의 등대가 산위로 우뚝 솟아 있다. 강원도지사와 속초시장이 공동명의로 세운 ‘낭만가도 종합안내판’을 보니 강원도 전 구간을 걷자면 이번처럼 4박5일정을 세 번쯤 더 해야 될 것 같다. 비파 조형물이 있는 데크에서 잠시 쉬었다가 등대 아래를 돌아서 영금정으로 올라간다. 영금정 정자에서 바다를 바라보니, 저 아래 너른 바위에 나가 바다를 즐기는 사람들, 영금정 해돋이정자에서 바다를 향해 사진촬영을 하는 사람들, 모두들 즐거워 보인다. 영금정에서 내려와 해돋이 정자 데크길에 삼각대를 세우고 여자친구를 추켜안고 촬영을 하는 커플이 재미있다. 그들을 카메라에 담고 있는 사이 길동무는 동명항 좌판에서 생선튀김과 소주를 사온다. 한켠으로 비껴 앉아 주거니 받거니 시장끼를 달랜다. 수협건어물매장에서 북어 두 쾌를 산다. 아내와 딸에게 바칠 뇌물이다. 걷기를 계속 이어가려면 정지작업을 게을리 해선 안 되지. 첫 출행 4박5일 일정을 성공적으로 마무리 할 순간이다.
 

영금정.
수복기념탑 주위가 전선줄과 전봇대로 어지럽다.

한산한 속초항국제여객선터미널을 지나 시내로 접어드니 수복기념탑(收復紀念塔)이 전봇대와 전선줄이 아슬아슬하게 지나고 있어 불안해 보인다. 속초항 앞을 지나 금강대교를 건너 가을동화 촬영지 아바이마을을 발아래로 보며 다시 설악대교를 건너 왼편으로 청초호를 보며 고속버스터미널 근처 큰길까지 나왔는데, 아뿔사! 잘못 왔다. 시외버스터미널로 가야하는 것을! 아까 속초항 초입에서 조금만 걸어가면 시외버스터미널이었는데….

대낮에 마신 소주가 문제였다. 그동안 길동무와는 정치에 관한 대화를 자제해 왔었는데, 마지막 순간에 그만 사회문제가 도화선이 되어 정치 쪽으로 비화되고 말았던 것이다. 지독하게도 수구적인 길동무와는 대화가 곤란할 정도였다. 서로 간 열이 오르다보니 길거리 토론에 방향을 잃었던 것이다. 인터넷 예매한 버스 출발 시각이 촉박해 도리 없이 택시를 탔다.

시외버스터미널에 내려 차표를 받고나니 시간이 좀 여유가 있다. 이제 길동무와 작별을 고할 순간이다. 그는 친구를 찾아 원주로 가기로 했고, 나는 동서울로 가서 청주행 버스를 타야한다. 대합실 내 서서 먹는 우동가게에서 한 그릇씩 시켜 늦은 점심을 때우고 헤어진다. 2박3일이지만 그새 정이 들었던가, 내미는 손을 잡으며 누구랄 것도 없이 부등켜 안고 석별의 정을 나누었다.
 

속초등대 전망대에 사람들이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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