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민식의 ‘톡톡 튀는 청주史’

조선의 한 사람, 노긍盧兢
 

노긍이 생전 책을 말리곤 했다는 폭서암. 인근 지역은 교하노씨의 세거지다.

사철 흐르는 무심천은 대청댐의 물을 끌어온 결과다. 장암동에 가면 그 물길을 찾을 수 있다. 거기서 좀더 오르면 장군암, 폭서암曝書岩이 나온다. 장군암은 무속에서 붙인 이름이고 폭서암은 책을 말리던 바위라는 뜻이다. 이 바위에는 커다란 글자가 새겨있다. ‘한원노선생漢原盧先生 폭서암’ 문인 황득효黃得孝가 써서 1808년(순조 8)에 새긴 글이다.

한원 노선생은 누구인가. 이가환李家煥, 1742~1801이 천재라 극찬했던 노긍盧兢, 1738~1790이다. 노긍의 본관은 교하, 한원은 그의 자이다. 아버지는 진사 노명흠盧命欽이고 어머니는 광주이씨이다. 1765년(영조 41) 진사에 입격하였으나 벼슬에 나아가지 못했다. 그의 집안이 남인에 속하면서 관로가 제한됐기 때문이다. 여러 차례 문과에 응시했으나 급제하지 못하자 다른 길을 택했다. 바로 대리시험, 거벽巨擘이다. 그러나 일이 발각되어 1777년(정조 1) 정월 유배에 처해졌으나, 그해 11월 석방되었다. 그런데 그가 석방되자, 여러 신하들이 반발하였다. 그가 단지 글 파는 짓뿐만 아니라 ‘역적의 집에 드나들며 그들을 가르쳤다.’는 것이다. 당쟁 속 천재의 암울한 현실이었다.

연꽃으로 널리 알려진 장암방죽을 지나 마을 뒤쪽에 그의 묘가 있다. 같은 남인이었던 이가환은 그를 이렇게 평했다. “그가 태어나 우리나라는 한 사람을 얻었고, 그가 죽자 우린 한 사람을 잃었다.” 인물에 대한 이와 같은 극찬이더 있을까.
 

체화당사는 1701년(숙종 27) 노계원 등 4형제의 위패를 봉안하기 위해 세웠다. 1761년(영조 37) 노덕원盧德元을 추향하였다. 사당 앞에는 1719년 이우겸李宇謙이 짓고 성영成泳이 써서 세운 사적비가 있다.
한란 묘소 및 신도비(충청북도 기념물 제72호). 한란 묘소는 실전하였다가 1689년 되찾았다.

결코 물러설 수 없는 갈등, 산송山訟

장암동을 지나 고개를 넘으면 남일면 신송리다. 마을 입구부터 교하노씨 세거지란 표석이 시선을 끈다. 마을 입구에서 남쪽 좁은 길로 들어서면 끝 무렵에 체화서원棣華書院이 있다. 원래는 그저 체화당사였으나 후손들이 크게 확장하였다. 체화당사는 선조 때 노계원盧繼元, 1532~1586 등 4형제의 효행을 기려 유성룡柳成龍의 천거로 세운 것이다. 왕이 직접 ‘체화당’이라 어필을 내렸다고 한다. 체화당사와 그 내력을 적은 사적비는 충청북도 기념물 제73호로 지정되어 있다.

이곳은 공군부대가 있는 가산리의 뒷길이다. 고갯마루를 넘어서면 제법 큰 마을이 나타나고 한쪽 기슭에 커다란 무덤이 있다. 청주한씨의 시조 한란韓蘭의 묘소이다. 그런데 이곳 마을에 처음 들어온 이들은 인동장씨였다. 큰 길 쪽 입구에 인동장씨 관련 유적이 많다. 교하노씨 노유근盧有謹의 부인은 인동장씨인데, 그가 처가로 들어오면서 두 성씨가 어울려 살았다. 이곳 가산리에 또 하나의 성씨가 임진왜란 때 들어오는데, 바로 동래정씨다. 실제 지금의 가산리는 동래정씨가 다수를 이루고, 교하노씨는 신송리에 세거한다.

이렇듯 세 성씨의 동거는 혈연으로 얽혀 너른 구릉과 들에 각기 세거의 둥지를 마련하였다. 그런데 조선 후기에 들어서 청주한씨들이 자신들의 시조 찾기에 나서면서 분란이 싹텄다. 시조제단비(1605)와 무농정(1688)을 세우며 막연히 시조 전승을 이해하고 있던 한씨들이 시조 묘에 관심을 갖게 되었다. 그 과정이 한란 신도비(1768)에 자세하다.
 

한란 묘소에 오르는 한 켠에 그의 신도비가 있다. 신도비는 1768년(영조 44)에 세웠으며, 후손 한익모韓翼謩가 짓고 한광회韓光會가 썼다.
한란 묘소와 마주 보고 있는 곳에 있는 ‘체화당노선생유허棣華堂盧先生遺墟’비다. 두 문중 간의 갈등을 엿볼 수 있다. 지금은 체화당사로 옮겨 놓았다.

한란 사후 750여 년이 지난 1689년. 비로소 다른 이들이 함부로 점유하던 묘를 찾은 것이다. 타인은 바로 교하노씨를 말한다. 이때 청주한씨가 거족적인 차원에서 시조 묘 찾기에 돌입한 결과였다. 시조제단비 건립부터 중앙의 유력인사들이 대거 참여하였다. 1689년 이전 이미 50년 가까이 다툼이 있어 중앙에서 관리가 파견되면서 마무리된 것이다. 그런데 그해 9월 이 문제는 조정에서 다시 논란이 되었다. 중앙에서 파견된 관리는 청주한씨와 외가로 먼 친척이었으며, 무엇보다 같은 노론계였던 것이다. 이를 남인계 인사들이 문제 삼은 것이다. 하지만 당시 노론의 집권 하에서 더 이상 문제가 되지는 않았다.

한란 묘가 다시 기록에 보이는 것은 1906년이다. 한란 묘 가까이에 인동장씨 입향조 묘가 있는 것을 한씨 쪽에서 문제 삼은 것이다. 이때는 조정에서 인동장씨의 손을 들어주었다. 지금도 한란 묘 서쪽에 인동장씨 장덕생張德生의 묘가 내려다보고 있다.

사실 전통시대 산림에 대한 소유권은 희박하였다. 그러던 것이 이와 같이 조선 후기에 집중된 산소 분쟁인 산송山訟을 통해 점차 소유 관계가 확대되었다. 곧 자신의 선조 묘를 확정함으로써 소유권을 인정받기에 이른 것이다. 조선 후기 내내 끊임없이 제기된 산송은 바로 땅 차지의 명분이었다.
 

인동장씨 장덕생張德生의 묘소에서 내려다본 가산리. 왼쪽으로 한란의 묘소가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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