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민식의 ‘톡톡 튀는 청주史’

문의의 역사는 우리에게 남겨진 과제

2014년 청주시와 청원군의 통합 과정에서 여러 곡절이 있었다. 그런데 통합의 당위성을 주장하는 이들이 줄곧 하나의 역사를 강조하곤 하였다. 그렇지만 이와 같이 문의는 엄연한 독립 군현이었다. 가까운 괴산이 청안과 장연을, 제천이 청풍을, 단양이 영춘을 품듯 복수의 군현이 합친 결과였다. 그렇다면 1914년 일제 당국은 왜 군현을 통폐합했을까. 100년 뒤의 통합론자들이 주장하듯 행정의 효율성이었을까. 많은 이들은 일제가 전통성을 없애 저항의식을 없애려 하였다고 한다. 예로부터 군현 단위로 이루어지던 우리의 향촌의식, 하물며 의병조차도 그러했기 때문이다.

나는 문의 사람이다, 송시열

조선시대의 문의는 여러 명현名賢들의 거주지로 자주 언급되고 있다. 조선 전기의 송인수宋麟壽, 1499~1547를 비롯하여 많은 인물들이 사화를 피해 낙향한 곳이다. 그리고 조선 후기 문의의 인물로 송시열宋時烈, 1607~1689과 송준길宋浚吉, 1606~1672 등이 유명하다. 송시열이 성장한 회덕과 문의는 인접해 있고, 또 한 때나마 문의에 거주했었다.

그것은 1660년 5월 『현종개수실록』에 ‘문의현 우찬성 송시열’이라 하여, 당시 송시열은 문의에 살고 있었다. 또 송준길은 만년에 부강 금호리의 보만정保晩亭에 은둔하였다. 1695년(숙종 21) 후학들이 그곳에 검담서원黔潭書院을 세워 오늘에 전한다.

사실 문의지역에서 송시열의 자취는 자주 발견된다. 그의 선조가 이곳에 일찍부터 자리 잡았기 때문이다.
 

송인수 묘소 및 신도비(충청북도 기념물 제131호). 부인과 봉분을 따로 쓴 쌍분이며, 각기 묘표가 있다. 신도비는 1578년(선조 11)에 세웠는데, 송기수가 짓고 송인宋寅이 썼다. 뒷면에 송시열이 쓴 음기가 있다.
검담서원 터에 남은 보만정과 묘정비. 묘정비를 제외하면 서원의 자취는 찾아볼 수 없다. 담장 바깥에 위패를 묻은 무덤이 있다.

감추고 싶은, 혹은 드러내려는 의지

남일면 화당삼거리에서 남이면 척산리로 가는 길에 은진송씨의 여러 유적이 있다. 이곳은 남일면 화당리와 문의면 남계리, 남이면 문동리가 서로 잇닿은 곳이다. 먼저 남일면 화당리 문오 마을에 들어서면 을사사화(1545) 직후 죽임을 당한 송인수의 수명유허비受命遺墟碑(1985)가 있다. 이곳에서 사약을 받았다고 한다. 마을 입구에 들어서면 동쪽으로 커다란 글자를 새긴 비석이 보인다. 바로 삼현려三賢閭다. 어진 선비 세 분이 사는 곳이란 뜻이다. 그 글자는 송시열이 정읍에서 사약을 받고 운명하기 직전 쓴 글이라 한다.

삼현三賢이란 송시열의 증조부 송귀수宋龜壽, 1497~1538와 송인수, 성제원成悌元, 1506~1559을 말한다. 송귀수는 송인수의 형이다. 송인수는 인종 즉위 후 윤원형을 탄핵하여 밉보인 후, 1545년 명종 즉위 후 파직되어 청주에 은거하던 중 사약을 받았다. 선조 때 복권되었고 문충文忠이라는 시호를 받았다. 성제원은 공주 사람으로 송귀수·송인수 형제의 매제이기도 하다. 보은현감으로 부임 중 우리나 라 두 번째 서원인 상현서원象賢書院을 세웠다.
 

삼현려비는 입향조 송세량宋世良, 1473~1539과 송시영 宋時榮 묘소 아래에 있다. 음기는 송시열이 짓고 김수증金壽增이 썼다.

삼현려는 원래 한양의 반송방盤松坊 유점동鍮店洞이다. 그후 이곳 화당리에 고조인 송세량宋世良이 노년을 보내고 그의 아들 송귀수·송인수의 묘와 함께 있어 이름 붙인 것이다. 그런데 1578년경 간행된 『삼현주옥三賢珠玉』에는 송귀수 대신 정렴鄭磏, 1506~1559이 대신 들어가 있다. 정렴의 본관은 온양溫陽, 호는 북창北窓이다. 명종 즉위의 공으로 위사공신 1등에 오른 정순붕鄭順鵬의 아들이다.

위사공신衛社功臣은 1545년 8월 명종이 즉위한 직후 윤임尹任 등 대윤大尹 일파와 사림을 대거 제거한 을사사화의 주역이다. 당초 보익공신保翼功臣이라 하였다가 그해 9월 위사공신으로 바꿔 불렀다. 이때 많은 사림이 죽임을 당하여 사림이 집권한 명종 후반기부터 없애자는 이야기가 끊이지 않았다. 결국 1577년(선조10) 공신은 삭훈削勳되고 공신들은 벼슬이 강등되었다.

위사공신 1등에 정렴의 아버지 정순붕이 있고, 3등에는 송귀수와 송인수의 사촌 동생인 송기수宋麒壽, 1507~1581가 있다. 사촌 간에 공신과 역적으로 나뉜 순간이었다. 정렴은 아버지의 전횡을 피해 처가인 청주로 낙향하였다. 그의 아들 정지임鄭之臨의 묘가 현도면 노산리에 있는 까닭이다.

정렴의 자취는 현도면 하석리에 있는 노봉서원魯峯書院 터에서 찾을 수 있다. 이곳에 정렴과 송인수를 배향하였다. 이 서원은 1610년(광해군 2)에 창건하여 1658년(효종 9) 사액되었다. 1695년(숙종 21) 송시열을 추향하였으나 훼철된 후 다시 세우지 못했다. 지금은 그 터에 1806년(순조 6) 세운 묘정비만 남아있다. 묘정비는 송시열의 후손 송환기宋煥箕, 1728~1807가 썼다.

정렴 대신 자신의 증조부를 내세운 삼현려비에는 두 가지의 속뜻이 있다. 첫째, 송시열 직계 조상을 현창하는 일이다. 지역에서 명현으로 이름 난 종증조부 송인수와 함께 증조부 송귀수를 드러내는 일이다. 둘째는 송인수가 을사사화로 죽임을 당한 반면 그의 사촌인 송기수는 공신이 된 모순을 극복하는 길이다. 당시 사촌 간에 공신과 역적으로 나뉜 현실을 어떻게 이해하는가의 문제이다.
 

옛 문의 땅이었으나 남일면 화당리에서 가까운 남이면 문동리에 있는 송귀수의 묘. 묘갈의 앞면에, ‘유명조선국효자승의랑종묘서봉사송공귀수기수지묘有明朝鮮國孝子承議郞宗廟署奉事宋公龜壽耆叟之墓’라 하였다. 그리고 한쪽에 후대에 다시 ‘추증자헌대부이조판서겸지의금부사오위도총부도총관追贈資憲大夫吏曹判書兼知義禁府事五衛都摠府都摠管’이라 새겼다.
노봉서원 묘정비(1806). 노봉서원은 1615년(광해군 7) 옛 석암사 터에 건립하였다. 처음 정렴과 송인수를 제향하였고, 후에 송시열을 추향하였다.

순절로 의를 실천한 야은 송시영

삼현려비를 뒤로 하고 오르면 송시영宋時榮, 1588~1637의 묘가 보인다. 송시영은 누구인가. 병자호란 때 오랑캐의 굴욕을 피해 강화도에서 목숨을 버린 이다. 여기에 다른 장면이 떠오른다. 누군가는 죽음을 회피했던 순간이다. 이 사건은 서인이 권력을 차지한 경신환국 이후 이들은 노론과 소론으로 나뉘었다. 소론의 영수는 바로 송시열의 제자이기도 한 윤증尹拯, 1629~1714이다.

이들 노·소가 나뉜 이유의 하나로, 윤증의 아버지 윤선거尹宣擧, 1610~1669의 처신이 문제시되곤 하였다. 윤선거는 남인 등 다른 당파에 대해 온건적이었고, 무엇보다 강화가 함락되는 순간 부모를 봉양하기 위해 미복으로 갈아입고 피난하였다. 물론 그는 평생을 자책하며 은둔하였다.

송시열은 자신의 사촌형 송시영이 자진하던 순간 누군가는 구차히 모면했다고 생각할 수도 있었다. 송시영은 서인, 혹은 노론이 주장한 대의명분을 실천한 인물로 부족함이 없었다. 또한 소론을 공격할 수 있는 정치적 빌미이기도 하였다. 역사에서는 노론과 소론의 갈등, 송시열과 윤증의 논쟁을 회니시비懷尼是非라 한다. 두 인물이 살던 회덕과 이성尼城, 논산에서 딴 이름이다. 멀리 우리 역사에 커다란 사건으로 기록된 이 시비가 좁게는 화당리에서 구현된 것이다.

남일면 화당리에는 송시영의 충절을 기리는 부조묘인 충현묘忠顯廟가 있다. 결국 화당리는 을사사화 이후 송인수라는 명현과 그의 형 송귀수, 그리고 송시영에 이르기까지 그들 가문의 충절이 깃든 곳이다. 잘 알려지지 않은 한적한 시골 마을에 커다랗게 차지한 묘소와 부조묘, 그 속에 조선 후기를 주도한 정신이 있다.
 

충현묘는 강화에서 순절한 송시영의 충절을 기리기 위해 1682년(숙종 8) 건립한 부조묘不祧廟다.
문의중학교 뒤편의 송환기유허비. 1898년(광무 2)에 세웠다.

그들에게 문의는 고향이었다

문의중학교 뒤편 한쪽에 허름한 비석이 있다. 가까이 살펴보면 성담性潭 송선생의 유허비란다. 성담 송선생은 송시열의 6세손 송환기다. 생전에 높은 벼슬에 오르지 않았지만 송시열의 학문을 계승한 정조 때의 학자로 유명하다. 그의 묘는 옛 취수탑 뒤 소이산 봉수 남쪽 기슭에 있다.

 

대청댐 취수탑 뒤에 있는 송환기 묘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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