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월이 가고있습니다. 영화제목처럼 봄날은 가고 있습니다. 지난주 우리는 ‘4월혁명’ 42주년을 맞았습니다. 세월은 덧없어 1960년 4월, 그로부터 마흔 두 성상(星霜)이 지났습니다. 피로 얼룩졌던 그 산하엔 꽃들 다투어 피고 무심한 새들 하늘을 날며 지저귑니다.
‘4월혁명’의 직접적인 계기가 된 것은 1948년 집권이래 숱한 정치파동을 일으키며 영구집권을 획책하던 자유당정권이 4대 정부통령선거에서 패색이 짙자 관권을 총 동원해 전국적인 대규모 부정선거를 자행한 것이 발단입니다.
부정선거를 규탄하는 시위가 서울에서 지방으로 확산된 가운데 마산에서 시위 중 실종되었던 고교생 김주열군의 시체가 최루탄이 눈에 박힌 채 부두에서 물위로 떠오르자 경찰의 만행에 대한 전 국민적 분노는 순식간에 폭발합니다.
경찰의 무차별 발포로 19일 하루 동안 시위 중이던 젊은이 185명이 목숨을 잃었고 부상을 당한 사람도 6026명이나 됐습니다. 결국 국부(國父)로 떠받들여 지던 독재자 이승만은 이 나라 역사상 최초로 국민에 의해 권좌에서 끌어내려지고 말았습니다.
평소 아무 힘도 없어 보이던 국민들이었지만 한번 일어서면 그것이 얼마나 무서운 존재인가를 보여준 ‘민(民)의 혁명’이었던 것입니다. ‘4월혁명’은 위대한 학생혁명, 위대한 민중혁명이었습니다. 하지만 ‘4월혁명’은 불행하게도 꿈을 펴기도 전에 권력을 탐낸 정치군인들의 5·16쿠데타로 짓밟히고 맙니다.
그리하여 ‘4월혁명’은 30년이 넘도록 그 이름조차 얻지 못한 채 ‘4·19의거’ ‘4·19학생의거’ ‘4·19’ ‘4·19혁명’등으로 그때마다 제 각기 불려 오면서 군사정권들의 의도적인 홀대를 받아야 했습니다. 정통성이 없는 군사독재자들은 하나같이 국민에 의한 정권전복이라는 사실 자체를 두려워했던 것입니다. 다행히 ‘4월혁명’이 제 이름을 찾은 것은 1993년 4월19일 김영삼 대통령이 현직 대통령으로는 처음으로 서울 수유리의 4·19묘지를 참배하면서부터 입니다.
세월은 흘러 당시 교문을 박차고 나와 거리를 누볐던 젊은이들은 지금 이순(耳順)의 60대가 되었고 그 해 세상에 태어난 4·19동이들도 40대가 되었습니다. 나라는 민주화되고 경제는 좋아 졌지만 사회는 여전히 시끄럽고 어수선합니다. 정치권은 백년하청으로 이전투구를 일삼고 힘을 가진 자들의 부정과 부패는 예나 다름이 없으며 지역 간, 세대 간, 계층 간의 갈등은 날로 더 해만 갑니다.
4·19혁명의 숭고한 정신이 자유민주주의의 쟁취와 부정부패의 척결이었다면 그 혁명은 끝난 것이 아니라 지금도 진행중인 ‘미완의 혁명’일 수밖에 없습니다. 그렇다면 그때 그 4·19정신은 지금 어느 누가 잇고 있으며 어디에서 찾아볼 수 있을 것인지, 이 사회에 묻지 않을 수 없습니다.
42년 전 그때 목이 터져라 독재타도를 외치며 거리를 내 달렸던 한 사람으로서 오늘의 이 부패한 사회를 보는 심정은 한 마디로 슬프고 착잡하기만 합니다.
19일 기념식을 치른 수유리 국립4·19묘역은 이내 참배 객도 없는 쓸쓸한 일상으로 되돌아갔다고 합니다. 오늘 우리국민들의 대부분은 ‘4·19’라는 그것이 과거에 있었던 ‘하나의 사건’이라고 가벼이 여기고 있는 것은 아닐까, 생각을 해 봅니다. 결국 국민들의 망각 속에 죽은 자들만이 억울한 4·19가 된 것은 아닌지 모르겠습니다.
4·19묘역 빛 바랜 비문에는 이렇게 쓰여 있습니다. ‘해마다 4월이 오면 접동새 울음 속에 그들의 피 묻은 혼의 하소연이 들릴 것이요 해마다 4월이 오면 봄을 선구하는 진달래처럼 민족의 꽃들은 사람들의 가슴마다 되살아나리라.’ 춘래불사춘(春來不似春)이요, 온갖 꽃들 만발하는 봄이지만 봄이, 봄 같지 아니하니 봄이, 봄이 아닌 듯 합니다. 그렇게 봄날은 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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