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민식의 ‘톡톡 튀는 청주史’

세종시는 문의가 낳은 산물

현재 문의文義는 청주시의 일개 면面에 불과하지만, 1914년 이전에는 독립 군현郡縣이었다. 객사인 문산관文山館(충청북도 유형문화재 제49호)이 있고 또 문의향교(충청북도 유형문화재 제94호)의 존재가 행정적 독립성을 말한다. 그리고 한때나마 문의군이었다. 그리고 문의현은 종6품 현감이 파견되던 다른 현과는 달리 종5품 현령이 임명된 격이 높은 곳이다.

20세기에 들어 문의현 지역은 크게 축소되었다. 1914년 현도면과 부용면이 분리되었고, 동면 일부가 가덕면에 편입되었다. 또한 1980년 대청댐 담수 이후 많은 지역이 수몰되고, 여러 행정적 제약으로 크게 위축되었다. 이제 문의의 역사는 현암사의 전설처럼 옛 터전 대부분이 물속에 잠겨 기록에서나마 그 흔적을 찾아볼 수 있다.

옛 문의현의 경계는 상당히 넓었다. 고려 때까지 연기현燕岐縣과 매곡현昧谷縣을 아울렀다. 그리고 문의현은 문의·부용(부강)·현도면이니, 지금의 세종시와 보은 회인·회남면을 포함하였다. 세종특별자치시가 공주 일부와 옛 연기군, 그리고 부강면이니 그 뿌리는 문의이다. 그러하니 세종시를 낳기 위해 천 년 동안 무던히 내어준 셈이다. 문의를 품은 청주가 세종 출범에 큰 몫을 하였다.
 

문산관은 문의현의 객사였다. 객사는 임금의 전패殿牌를 모시며 관리들의 숙소였다. 1666년(현종 7) 한 차례 옮겨 세우고, 1728년(영조 4) 중수하였다. 현재 문의문화재단지 내에 있다.

삼국과 후삼국의 전장, 곳곳에 남은 옛 성터

문의의 첫 기록은 『삼국사기』에 474년 신라가 일모성一牟城을 쌓았다는 것에 서부터 출발한다. 신라는 470년 보은에 삼년산성을 쌓아 금강 상류지역에 첫발을 디뎠다. 나아가 474년 금강 본류인 문의지역까지 차지한 것이다. 신라는 문의지역을 차지한 후 지금의 양성산성壤城山城(충청북도 기념물 제125호)을 쌓았다. 그런데 이듬해 백제는 고구려 장수왕의 공격을 받아 왕이 전사하고 부랴부랴 웅진으로 서울을 옮긴다. 이곳 양성산성에서 웅진(공주)은 30여 km에 불과하다. 말을 달리면 한 두 시간, 걸어도 하루면 닿는 거리이다. 이곳에 주둔한 신라군은 백제군과 함께 남하하는 고구려군을 함께 막았을 것이다. 그 와중에 죽어간 이들은 미천리米川里 고분군에 묻혔다.

문의현 지역의 산성 밀집도는 우리나라 최고다. 무려 열일곱 곳에 달한다. 이처럼 좁은 지역에 밀집된 산성은 거듭된 전쟁의 결과였다. 고구려군의 직접적인 공격을 받은 5세기 후반부터, 또 후삼국이 다투던 10세기 전반에 이르기 까지 삼국, 후삼국의 운명을 건 전투의 현장이 이곳이다.
 

양성산성은 문의 서쪽 해발 292m의 산봉우리를 감싸고 쌓은 석축 산성이다. 둘레 985m로, 동벽 가까이에 원지圓池가 있다. 661년 백제부흥군을 진압하던 신라군이 주둔하였고, 10세기 초 후백제군이 차지하던 곳이다.
미천리 고분은 문의 일대에 살던 신라 사람들의 무덤이다. 여러 기의 돌덧널무덤 속에서 토기와 철기 등 6세기 때의 유물이 출토되었다.

백제의 일모산군이 신라의 연산군으로

문의지역은 본래 백제 일모산군一牟山郡이었다. 신라가 차지한 뒤에도 한동안 명칭을 유지하다가 경덕왕 때 연산군燕山郡으로 고쳤다. 이 지명은 고려 때까지 이어졌다. 이때 연산군이 관할하던 지역은 지금의 문의지역을 넘어 세종 연기지역과 보은 회인지역을 포함한다. 백제 두잉지현豆仍只縣이었던 연기현과 백제 미곡현未谷縣이었던 매곡현까지다. 이처럼 문의의 옛 지명인 연산군은 연기현과 매곡현을 거느렸다.

신라 말 고려 초의 문의는 후백제의 영역이었다. 925년 고려 태조가 유금필庾黔弼을 보내 연산진을 쳐서 장군 길환吉奐을 죽였다는 기록이 있다. 직후 고려태조가 견훤에게 보낸 글에, ‘연산군 지경에서는 반란을 일으킨 길환을 군중에서 목 베었으며, 이어 청주성靑州城을 격파하던 날에는 직심直心 등 4, 5명의 목을 베었다’고 자랑하였다. 비록 길환과 직심 등이 반란을 일으켰다 하였으나, 사실은 문의와 청주가 곧 후백제의 영역이었음을 말하는 것이다.

왕건, 문의를 차지하며 후삼국 통일에 다가가

918년 태조가 궁예를 내쫓고 즉위하자, 웅주熊州·운주運州 등지와 청주의 진선陳瑄등이 후백제로 돌아섰다. 오죽했으면 이때의 상처가 훈요10조에 남아 지역 차별의 근거가 되기도 했다. 제8조, 차현車峴 이남, 공주강公州江 바깥 사람은 관리로 채용하지 말라는 것이었다. 바로 지금의 공주와 홍성을 염두에 둔 말이다.

925년 유금필의 싸움 이후에도 문의는 후백제에 속하였다. 932년 친히 일모산성을 정벌하여 격파하였다는 것이다. 그런데 문의에 막혀 더 이상 남하하지 못하던 고려군은 예상치 못한 승기를 잡게 된다. 그해 6월 연산군 관할의 회인 호족 공직龔直이 태조에게 귀순한 것이다. 원래 공직은 견훤의 부하 장수로 청주에서 보은으로 가는 길을 막고 있었다. 그런 공직이 왕건에게 항복하면서 배후를 빼앗긴 후백제는 커다란 타격을 입었다.

결국 932년 고려 왕건은 문의를 차지하며 금강 유역에서 우위를 점할 수 있었다. 이것이 후삼국시대를 종결하는 통합의 시작이었다.
 

회인 호족 공직이 쌓았다고 전하는 호점산성虎岾山城. 안팎에 기둥 홈이 남아있는 특징이 있다. 회인 매곡산성昧谷山城과 함께 공직의 거점 산성이었다.

1914년 문의군, 청주군에 흡수되다

궁예를 내쫓고 왕위에 오른 왕건은 문의를 어떻게 대했을까. 분명한 기록은 없지만 1172년(명종 2) 비로소 지방관인 감무監務를 두었다고 한다. 그렇다면 이때까지 독립 군현은 아니었던 듯하다. 곧 1172년 이전까지는 청주목의 속현으로 있다가 이때 비로소 감무가 파견된 독립 군현이 되었다.

이후 1259년(고종 46) 위사공신衛社功臣 박희실朴希實의 고향이라 하여 이름을 문의로 고치고 현령縣令을 두었다. 감무는 고려~조선 초기에 군현에 파견되었던 관리로서 현령보다는 한층 낮은 위계였고, 1413년(태종 13) 현감으로 이름을 바꾸었다. 이로 보아 1259년에는 공신의 고향이라 하여 한 단계 높은 현령이 파견되어 위상이 높아졌던 것이다. 위사공신은 최의崔竩를 죽이고 최씨정권을 무너뜨린 사건을 말한다.
 

문의향교는 본래 양성산 아래에 있던 것을 1609년(광해군 1) 남쪽 기산리로 옮겼다가 1683년(숙종 9) 다시 지금의 자리로 옮겼다. 앞에는 명륜당을, 뒤에는 대성전을 두었다.

충렬왕忠烈王, 재위 1274~1308 때에는 가림군嘉林郡에 속하게 하였다가 바로 복구하였다. 지리지 등에 계속 언급되어 있는 것으로 보아 사실로 보이는데, 가림군은 지금의 부여군 임천면 일대로 문의와 너무 멀다. 가림군은 고려 때 임천군林川郡으로 불렸다. 고려 초 임주林州로 승격되었다가 1018년(현종 9) 가림현으로 강등되고 1315년(충숙왕 2) 다시 임주가 된 곳이다. 그렇다면 가림현으로 읍호가 강등된 곳에 연산군을 붙였다는 모순이 따른다.

그런데 『고려사』에는 충렬왕 2년(1276) 봄 정월 청주가 조폐凋弊하여 판관判官을 임시로 없앴다는 기록이 있다. 그리고 그해 8월 갑자일에 도병마사都兵馬使가 적향賊鄕이었던 상주尙州와 청주 등지의 주호州號를 강등할 것을 청하기도 하였으나 불허되었다. 그렇지만 같은 왕 4년 3월 무술일에 청주 판관과 당성唐城 감무를 다시 두었다는 기록을 보면 앞서 청주목이 강등된 것을 알 수 있다. 따라서 청주목 관할이었던 문의현도 이때 가림군에 예속된 것으로 볼 수 있다.

비록 조선 후기의 기록이지만, 1694년(숙종 20) 9월 남구만南九萬이 아뢰기를, “오직 현감은 강등할 방법이 없기 때문에 혁파하여 근방의 고을에 소속시킨 다.”고 한 것을 보면 청주목이 강등되면서 연산군이 가림군에 속한 것으로 볼 수 있다.

종5품 현령이 파견된 문의는 조선시대에도 계속 되었다. 문의에는 독립된 군현으로 객사를 포함한 관아는 물론 향교(문묘)·사직단·성황단·여단 등 제반시설을 갖추었다. 『신증동국여지승람』에 향교는 현의 서쪽 1리에 있다고 하고, 사직단은 현 서쪽, 성황사城隍祠는 양성산에, 여단은 북쪽에 있다고 하였다.
 

문의면 소재지 도당산을 배경으로 있던 문의초등학교. 객사인 문산관을 교사로 사용하였다. 문산관은 문의문화재단지로 옮겨가고 그 터는 물에 잠겼다.
양성산성 원지는 동심형 형태로 처음 만든 후 두 차례 크기를 줄여 사용하였다. 연못의 수위에 따라 3개 이상의 수구를 통해 물을 배출하였고, 배수로도 함께 발견되었다.

그런데 조선 영조 때의 『여지도서』에 향교는 현의 서쪽, 사직단과 성황사, 여단이 모두 양성산 남쪽 기슭에 있다고 하여 여단은 자리를 옮긴 것을 알 수 있다.

향교는 여러 번 자리를 바꾸었다. 처음 현의 서쪽 1리에 있던 것을 1609년(광해군 1) 폐지되었던 현을 다시 복구하면서 현의 남쪽 3리 기산리箕山里로 옮겼다. 이곳 또한 땅이 고르지 않아 1683년(숙종 9)에 현령 이언유李彦維가 현의서쪽 2리, 지금의 자리로 옮겼다.

그리고 관아 자리도 조선 전기와 후기 기록에 차이를 보인다. 『신증동국여지승람』에 양성산이 현의 서쪽 4리에 있으나, 『여지도서』에는 현의 서쪽 2리에 있다고 하였다. 이것은 조선 후기에 이르러 관아가 2리 가까이 서쪽으로 옮겨간 것을 말해준다.

옛 문의현의 터는 대청호에 잠겨 자취를 찾을 수 없다. 최근 가뭄으로 바닥이 들어난다는 소식에 달려갔지만 여전히 그 터는 물 속에 있었다.

문의의 양성산은 조선시대에 국가 제사를 지낸 곳이었다. 1413년(태종 13)왕은 내시內侍를 보내 양성의 신에게 제사 지내게 하였다. 양성산성 안쪽의 원지圓池는 대지大池라고도 하는데, 가물 때마다 기도를 드리면 효험이 있다고 한곳이다.

양성의 신에 대한 제사는 1429년(세종 11)에 감사가 제사를 지내도록 하였다. 1437년 예조에서 전국의 산천 단묘 등에 대한 제도를 정하면서, 문의현의 양성묘壤城廟 위판은 ‘문의군文義郡 양성지신壤城之神’이라 썼다. 이때 ‘문의군’ 세 글자를 삭제할 것을 청하여 허락받았다.

한편 조선 초기 문의현에는 고려 태조의 진영眞影과 쇠로 만든 주상鑄像, 공신들의 영정이 보관되어 있었다. 그것을 1428년(세종 10) 개성 유후사留後司로 옮겨 각 능에 묻게 하였다. 얼마 전 국립중앙박물관에서 북한의 문화재로 소개된 태조의 좌상이 이것 아닐까 한다.

문의는 임진왜란과 정유재란을 거치면서 황폐화되고 인구가 줄어들자 현을 없앴다가 1609년에 다시 복구하였다.
 

용흥면의 자취를 전하는 용흥국민학교유허비. 학교터 근처에 있던 것을 후곡리 입구 사향탑思鄕塔 옆에 옮겨 놓았다.
북한의 국보, 고려 태조상. 1992년 왕건릉 확장공사 도중 발견하였다. 황제만 쓰는 통천관을 쓰고, 마음장상馬陰藏相, 색을 멀리 함의 형상이라 한다.

한때 충청남도에 속하기도

문의는 1888년(고종 25) 한때 청주에 속하게 하였다가 1895년 행정구역 개편에 따라 문의군으로 독립하였다. 1896년에는 칙령 36호에 따라 전국 23부府를 다시 13도로 개정하면서 문의군은 4등 군郡으로 충청남도에 포함되었다. 10년이 지난 1906년 다시 충북으로 환원하였다.

문의군은 다시 1914년 조선총독부의 군현 통폐합에 따라 청주군에 편입되어 용흥면龍興面, 문의군 남면과 양성면養性面, 문의군 읍내면·북면, 부용면芙蓉面, 문의군 삼도면, 현도면賢都面, 문의군 일도면·이도면으로 나뉘었다. 한 군현을 네 곳의 면으로 쪼개며 이제 그 위용은

영원히 잃고 말았다. 이후 1917년 양성면은 문의면으로 이름을 바꾸었다. 1930년 1월 1일 다시 용흥면을 합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다. 1946년 5월에는 청주군이 청주부淸州府로 승격하면서 문의면은 청원군에 속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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