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이기, 전두환 비판 후 ‘폭력고문 ’ 당한 뒤 안타깝게 사망
충북연고 민주화기념사업회 등록 열사 총 26명, 기록부재

“어디 가지마세요. 두렵습니다.” 故장이기 열사가 고문을 받고 병원에 이송된 뒤 임종 직전 가족들에게 한 마지막 말이다. 장 열사는 1979년 청주대 경영학과를 졸업하고 형의 의류상을 도와주며 회계사 시험을 준비하고 있었다. 장 열사는 사회전반에 관심이 많았고 특히 당시 전두환 정권의 권위주의 통치에 대해 비판하는 글과 나름의 민주화 방안 또는 개헌에 관한 글을 써서 각종 신문이나 정당에 보내기도 했다. 그러던 중 장 열사는 1986년 3월5일, 안양 박달교장 예비군 훈련장에서 전두환 정권을 극찬하는 정신교육에 대해 분노를 참지 못했다. 그는 교육에 참여하던 예비군들을 향해 “정권탈취야욕에 불타 광주시민 수천 명을 학살한 전두환을 처단하자”고 외쳤고 많은 참가자들이 함성을 지르며 함께 했다.
 

예비군 훈련장에서 전두환 정권을 비판해 고문을 당한 뒤 사망한 장이기 열사.

“안기부, 집과 가게까지 도청”

장 열사는 즉시 군에 체포되어 군 수사기관으로 끌려가 가혹한 폭행 속에 조사를 받았다. 며칠을 군부대에서 조사받던 그는 민간인 신분임을 이유로 다시 남부경찰서로 이첩, 유치장에 수감됐다. 당시 가족들은 장 열사의 생사도 확인하지 못했던 상황. 장씨의 형수 안경화씨는 “예비군 훈련이 있었던 당일 오후에 전화가 걸려왔다. 시아버님이 ‘애미야 정보부에서 사람들이 왔는데 이기가 헌병대에 끌려갔다고 한다’고 말했다”며 “이후 백방으로 수소문 했지만 어디로 끌려갔는지도 몰랐고 면회도 할 수 없었다”고 말했다.

가족들은 그로부터 며칠이 지난 늦은 저녁, 경찰서 옆 병원으로 오라는 전화를 받았다. 안씨는 “병원에 도착해보니 삼촌(장이기 열사)이 너무 많이 맞아 머리가 피에 엉켜 떡이 돼있었다. 엉망이 되도록 두들겨 맞았다”며 “당시 삼촌은 ‘재우지도 않고 하루 종일 맞았다’며 고통을 호소했다”고 당시상황을 전했다.

결국 장 열사는 가족들이 도착한 뒤 몇 시간을 버티지 못하고 세상을 떠났다. 안씨는 “삼촌이 세상을 떠나고 장례문제에 관해 얘기하는데 안기부가 예비군 훈련장부터 시작된 관련 내용에 대해 일체 함구할 것과 삼촌이 급사한 것으로 하라고 요구했다”고 설명했다. 결국 장 열사의 시신은 한밤 중 화장된 채 한강에 뿌려졌다. 유족들에 따르면 한동안 가족들은 집과 가게에 도청장치가 설치되고 감시를 받아온 것으로 알려졌다. 이후 시간이 흘러 장이기 열사의 문제가 세상에 알려지게 됐고 결국 2001년 5월29일, 민주화유공자 관련자 인정을 받아 지난 2014년 5월 민주화운동기념공원 민주묘역에 이장됐다.

장이기 열사가 졸업한 청주대학교 민주동문회 송재봉 회장은 “못난 후배들이 이제야 선배님을 찾아뵙게 됐다”며 “선배님께서 민주화를 위해 헌신하고 희생하신 것을 잊지 않고 후배들도 그 길에 함께 하겠다. 앞으로 추모위원회를 구성해 선배님의 희생을 기억하고 알려나갈 예정”이라고 말했다.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에 따르면 충북출신 민주열사는 총 26명인 것으로 확인됐다. 1965년 충북 충주에서 태어나 83년 서울대학에 입학한 김세진 열사. 김 열사는 86년 4월, 서울 관악구 신림사거리 가야쇼핑센터 앞에서 ‘전방입소훈련 반대’ 가두시위 도중 경찰의 폭압적인 강경진압에 항거하며 분신했다. 당시 전두환 정권은 81년부터 대학생들을 대상으로 용병교육인 ‘전방입소훈련’을 강제적으로 실시했고 김세진 열사는 이 같은 정부 정책에 항거하고자 ‘전방입소훈련 전면거부 및 한반도 미제 군사기지화 결사저지를 위한 특별위원회’를 결성했다. 김 열사의 희생을 기리고자 고은 시인은 ‘그대 숲 덩어리 썩지 않나니’라는 제목의 시를 발표하기도 했다.
 

당시 상황을 설명하는 유가족들.

충북연고 민주열사 26명, 기억해야

1945년 충북 중원군에서 태어나 63년 동국대학교에 입학한 김중배 열사. 김 열사는 동국대학교 농학과 3학년에 재학 중이던 65년 4월, ‘대일굴욕외교반대 및 평화선 사수’성토대회를 마치고 서울 중구 퇴계로 대한극장 부근에서 시위하다가 경찰의 곤봉에 두부를 맞고 서울대학교 병원 응급실에서 치료를 받던 중 두개골 저골절상으로 사망했다. 김 열사는 1996년 2월, 동국대 명예졸업장을 받고 지난 2014년 민주화운동기념공원 민주묘역에 이장됐다.

1972년 12월, 충북 중원군에서 태어나 1989년 충주고등학교에 입학한 심광보 열사.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에 따르면 심 열사는 참교육을 열망하는 전교조 선생님으로부터 많은 감동을 받고 학교에서의 비교육적인 현실을 바로잡고자 참교육 운동에 적극 나섰다. 2학년 되자 가정형편으로 학교를 휴학하게 된 심 열사는 학교 측으로부터 자퇴하라는 강요를 받고 자신의 학교를 ‘무서운 학교’라 칭하며 충격을 표현했다.

결국 휴학을 하고 지하철 신문판매, 외판원 생활을 하며 사회의 불평등을 해결하기 위해선 ‘가난하고 소외받는 학생들을 위한, 민중을 위한 교육’이 참교육 이라며 실천에 나섰다. 하지만 높은 현실의 벽을 직시한 심 열사는 1990년 9월7일, 충주시 한 건물 3층에 올라 “농민이여, 농민의 깃발을! 노동자여, 노동의 횃불을! 전교조여, 참교육의 함성을!”이라는 유서를 남기고 분신 후 투신했다.

심 열사는 분신 하루 전날 ‘전교조 선생님께 드리는 글’이라는 편지에서 “이렇게 깊은 인연이 또 있을까요. 작년 구월께였을 겁니다. 작고 후미진 그런 사무실이 이젠 제법 자리를 잘 찾아 잡았네요. 벌써 일 년이란 세월동안 선생님들과 정을 나누더니만 부랴부랴 떠나게 되었군요”라며 “너무 상심해 마십시오. 오히려 세상에 흘릴 눈물이 부족하리라 봅니다. 참교육 그날을 보고 싶은 마음 저 도도히 흐르는 남한강보다 더 깊이깊이 설레입니다”라고 말했다. 이어 “참교육 안고 돌아라, 바람아. 바람아. 한반도를 휘휘 불어가라. 오라. 오라. 참교육 안은 바람이여!”라며 참교육의 열망을 표현했다.

이 외에도 노점상생존권 보장을 요구하며 분신한 이재식 열사, 회사의 부당징계에 항의농성 중 경찰과 구사대의 폭력강제해산에 분노해 분신한 강현중 열사 등 충북을 연고로 한 20여명의 열사들이 민주화를 위해 헌신했다.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관계자는 “열사라는 선정기준이 명확하게 법이나 제도로 규정된 것은 아니나 통상적으로 민주화운동에 참여했거나 민주권리를 주장하시다 희생하신 분들을 열사로 모시고 있다”며 “학술적으로 범위를 정해 열사들의 희생을 기리고 기억해야 한다. 앞으로 법이나 제도화를 통해 기록될 수 있도록 노력하겠다”고 말했다.

이에 대해 충북참여연대 이선영 사무처장은 “우리나라의 민주주의 역사는 피의 역사라고도 불린다. 열사들의 희생을 무의미하게 흘려보내서는 안 된다”며 “관련 위원회도 활동이 중간에 끊기는 등 문제가 심각하다. 이분들에 대한 재조명과 제대로 된 기록이 돼야한다. 시민사회에서도 관련문제에 대해 노력을 기울이고 대안을 제시하겠다”고 답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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