송지호 철새-능파대 바위-천간정 관동팔경- 천진항

오늘도 걷는다마는<4>

넷째 날, 담배 냄새에 잠을 깼다. 어제 밤 좀 과음한데다 역겨운 냄새에 기분이 상한다. 서둘러 세수하고 짐을 꾸려 나섰다. 어제저녁 마시다가 조금 남은 소주를 생수병에 담아 길동무의 배낭에 찔러 넣고, 가까운 동네식당에서 김치찌개로 아침을 먹은 다음 왕곡마을을 향해 걷는다. 큰길을 좀 가다가 오봉천에 이르러 우측으로 갈라들어 한참을 올라가니 고갯마루 못미처 ‘왕곡마을 저잣거리’라는 것이 조성돼 있는데, 입간판에는 향토식당, 왕곡한과, 떡체험장이라 돼 있다. 고개를 넘어서니 ‘국가지정 중요민속자료 제235호 고성왕곡마을’이다.
 

왕곡마을 저잣거리에는 한과와 떡 향토음식 등 체험과 먹을거리가 있다.
큰백촌집 도면. 외양간이 내림지붕이다. 어떤 집은 좌측면으로 내린 경우도 있다.

양근함씨 4세 효자각을 시작으로 함일홍의 성천집, 동주 영화촬영지 큰상나말집, 큰백촌집과 작은백촌집을 둘러본다. 건물구조는 와가나 초가나 대동소이한데, 본채 처마아래에서 덧대어 내림지붕을 하고 있는 외양간이 특이한 구조다. 도면에는 정면에서 바라보며 좌측에 부엌과 외양간, 우측은 전면에 마루와 사랑방, 후면에 안방과 도장방의 구조다. 안방은 앞뒤로 출입문이 있고 도장방은 건물 뒤쪽으로 내었다. 그런데 이 도장방이 함경도 방언으로 곡식 등 물건을 간직하여 두는 곳간인지, 부녀자가 거처하는 규방을 뜻하는 것인지 모르겠다. 아마도 곳간이 아닐까. 강원도 문화재자료 제78호 고성 함정균 가옥은 19세기 중엽에 건축된 함경도형 온돌 중심 겹집에 마루가 도입된 전형적인 평면형식이라며 전문용어로써 설명해 놓았는데 잘 모르겠고… 때맞춰 활짝 핀 매화가 좋구나.
 

강원도 문화재자료 제78호 고성 함정균 가옥.

민속체험장, 함희석 효자각, 장터, 마을회관 그리고 막국수집, 특설무대, 주막을 지나 정미소에 이르러 마을을 뒤돌아보니 두백산 자락을 타고 흘러내리듯 형성된 마을이 보기 좋다. 문득 내 유년시절이 상기된다. 한국전쟁 휴전 후 시골생활을 택하신 아버지 덕택에 유년시절 3~4년을 농촌에서 지낼 수 있었던 고향마을이 생각났다.
 

마을을 벗어나며 뒤돌아 본 왕곡마을이 두백산 자락에 평화롭다.

봉수대 대신 기념 조형물만

마을을 벗어나 논길 밭둑길 따라 걷다보니, 저 멀리 송림 너머 송지호철새관망타워가 보인다. 호숫가 밭뙈기 하나에 물오리떼가 가득 앉아 먹이활동 하는 광경에 카메라를 들었더니 일제히 날아오른다. 우와~ 장관!이다. 정신없이 셔터를 누르면서도 일순 걱정이 앞선다. 화진포에서 본 철새 가까이 하지 말라던 AI 경고 플레카드가 생각났기 때문이다. 왔던 길을 되돌아 걷기길로 복귀하여 작은 고개를 하나 넘어 포도밭 원두막 아래서 쉬어 간다. 길가에 무인판매대를 만들어놓았는데 모과인지 말라비틀어진 것들이 수북하다. ㅉㅉㅉ

호숫가를 따라 돌아 7번 국도를 건너 해수플랜트연구센터 앞을 지나 송지호 해변으로 접어든다. 상당히 넓은 백사장과 가까이 고래를 닮은 섬이 있네. 황량한 백사장에 놓인 벤치에서 잠시 쉰다. 백사장에 선 남녀의 모습이 특이하다. 서로 등을 지고 폰을 들여다보다가 남자가 여자 뒤로 돌아서더니 결국은 나란히 되네. 장면이 바뀌어 젊은 남녀가 바닷가 가까이 다정하게 걷는 모습이 아름답게 보인다. 참 하릴없는 늙은이의 눈에는 별개 다 보이는구나.
 

송지호 철새. 일군의 물오리떼가 장관을 연출한다.
봉수대 해수욕장 화장실과 샤워룸 옥상에 봉화를 형상화 해 놓았다.

오호항에 들어와 편의점에서 길동무는 라면을, 나는 비스킷을 집어 들고 봉수대해수욕장으로 간다. 길동무가 버너를 켜고 라면을 끓이는 동안 나는 봉수대를 찾는다. 해수욕장관리사무소에 봉돈 조형물이 있고, 샤워룸과 화장실 건물 옥상에도 봉돈을 만들어 놓았지만 정작 진짜 봉수대는 보이지 않네. 폰을 뒤져 죽왕면사무소에 전화로 문의하였더니 여직원이 받는데, 다른 이에게 묻는 듯 지긋한 목소리로 바뀐다. 정확한 위치는 찾지 못하였지만 지금 계시는 곳에서 보이는 산이라고 짐작만 할 뿐이라네. 인터넷 지도를 보니 봉수단이라고 표시돼 있다. 라면이 다 되었다며 길동무가 소주 담은 물병을 찾는데, 이런! 소주를 넣고 라면을 끓였네. 허, 참! 사람 그림자 하나 없는 해수욕장 한 가운데서 달리 방법이 있을까, 그냥 참고 먹을 수 밖에… 이 사람하고 얼른 헤어져야 내가 살겠구나. ㅉㅉㅉ

능파대 형형색색 바위 탄성

캬라반이 즐비한 오토캠핑장을 지나 이어지는 삼포해수욕장 해변길을 길게 따라 걷다보니 국적불명의 간판을 내건 펜션일색 마을인데, 자작도해수욕장이구나. 해변을 돌아 길가 멋진 펜션과 커피숍을 흘깃거리다보니 멋진 소나무 세 그루가 나타나는데, 그 뒤로 넓은 공터가 있다. ‘고성 문암리 선사유적지’이다. 신석기시대 주거지이며 동아시아 최초 신석기시대 경작유구인 밭이 확인되어 신석기시대 농경에 대한 증거로 평가받는다고 한다. 추가발굴조사를 통해 농경 및 어로생활상 복원을 추진한다는 문화재청 말씀이 쓰여 있다. 문암리 마을에 들어서면 오래된 교회의 종탑이 부숴진 담장 너머로 보이고, 훨씬 더 오래된 듯 기와집 한 채가 힘겹게 지붕을 이고 있는데 거꾸로 뒤집어 놓은 ‘도마 활어판매장’ 간판이 그나마 옛 영화를 짐작케 한다.
 

고성 문암리 선사유적지.

백도항 뒤로 바위 생김새가 특이한데 얼핏 목포 갓바위가 생각났다. 낚시꾼들이 꽤 여럿 모여 있어 얼마나 잡았나 종다래끼를 들여다보았더니 모두가 빈 그릇이다. 백도해수욕장을 지나 하트아치와 남녀가 껴안고 있는 조형물을 보고, 문암대교를 건너는데 다리아래 해변에서 투망을 메고 바다를 노려보는 사람들이 있다. 물고기가 가까이 오는가보다 생각하며 한참을 기다렸으나 투망질하는 광경은 보지 못하고 발걸음을 옮겨야 했다. 능파대에 도착하니 일군의 젊은들이 텐트를 치고 있었다. 자동차 위에 설치하는 텐트가 있다는 말은 들었지만 처음 보았다. 능파대에 올라보니 건너편 백도항 바위는 예고편에 불과했음을 알겠다. 형형색색 온갖 모양의 바위가 한 눈에 다 차질 않는다. 대단하다! 감탄이 절로 나온다. 이리저리 얼마간 둘러보면서 어디를 가나 눈꼴사나운 이름 새기기를 여기서도 본다. 또한 철계단, 쇠파이프 난간과 목책길 등 얼기설기 바위 위로 뻗은 탐방로가 마땅치 않다. 능파대 아름다운 모습에 생채기를 낸 듯 보기가 좋지 않다. 일일이 가까이 다가가지 않으면 어떤가. 차라리 배를 타고 나가 관상하는 것이 낫지 않을까. 탐방로 난간을 넘어 바위 위를 빠대며 다니는 사람들도 있으니…뭐라 더 말을 못하겠다.
 

능파대 일각. 한 두 컷으로 담을 수 없는 엄청난 규모다. 얼기설기 연결된 통로와 층계가 편리하지만 경관을 해치고 훼손하는 면도 고려돼야겠다.

오늘 내내 걸으며 열린 화장실을 처음 만났다. ‘문암2리 공중화장실’이다. 시설도 훌륭하고 넓어서 편리했다. 짐을 덜고 여유롭게 주변을 관찰한다. 강원평화지역 국가지질공원 안내도와 능파대 곰보바위(타포니)는 어떻게 만들어질까? 안내판에 소상히 쓰여 있다. 큰 결정(반점)으로 이루어진 화강암에 발달한 틈 또는 결정들 사이를 따라 바다에서 공급된 소금성분이 침투하여, 결정들이 자람에 따라 틈 사이가 점차 부스러져(염풍화) 넓어지고, 이에 따라 화강암을 이루는 광물이 떨어져 구멍들이 커지고, 소규모 구멍들이 결합하여 큰 구멍을 형성하기도 하고 기반암인 화강암이 부서지기도 한다네.

공부를 마치고 문암항, 교암항, 교암해수욕장, 교암방파제를 지나 천학정으로 올라간다. 초입 커다란 바위에 ‘천학정’이라 새겨 있는데 ‘??? 군수님 글씨/2005년 11월 27일 세움/△△△토건(주)/대표 △△△’라고 오석에 새겨 바위에 박아놓았다. 다 올라가니 또 나온다. 이번엔 90년대에 천학정을 보수하고 ‘고성군수 □□□’이다. 단체장들의 이름 알리기야 익숙한 것이지만 이름석자까지 또박또박 새겨 넣어야 하는가.
 

한국인의 이름새기기는 유구한 역사를 가졌다.
이 바위를 보면서 목포 갓바위가 연상됐다.

천학정에 앉아 바다를 바라본다. 선경이라 적힌 일출을 볼 시간은 아니어도 가히 고성팔경에 꼽힐만 하구나. 멀리 또 가까이 바다위에 솟은 바위에서 한 여인의 초상을 본다.

<밤나무숲 우거진/마을 먼 변두리/새하얀 여름 달밤/얼마만큼이나 나란히/이슬을 맞으며 앉아 있었을까/손도 잡지 못한 수줍음/짙은 밤꽃 냄새 아래/들리는 것은 천지를 진동하는 개구리 소리/유월 논밭에 깔린/개구리 소리//아, 지금은 먼 옛날/하얀 달밤//밤꽃 내/개구리 소리> ‘첫사랑’은 세월이 제아무리 흐르고 나이가 들어도 아련하고 안타깝고 잊을 수 없는 그리움이다.
 

천학정으로 가는 길 안내. 커다란 바위에 군수님 글씨를 새겨놓았다.
천학정 바로 아래 바위에 첫사랑의 초상이 있다.

뜻밖에 만난 전 대통령 글

헤어지기가 못내 아쉬워 떨어지지 않는 발걸음은 자꾸만 뒤를 돌아보게 한다. 길은 잠시 7번국도 동해대로로 올라갔다가 냇물을 건너더니 다시 해변길로 간다. 아야진해수욕장, 아야진항구는 제법 크고 법석거린다. 이제 막 들어오는 고깃배, 길가에 널린 생선, 낚시하는 사람들, 바다 가까이 사진 찍는 연인들을 보며 걷다보니 그 이름도 높은 관동팔경의 하나인 청간정이다.

<청간천과 천진천이 합류하는 지점인 바닷가 기암절벽 위 만경창파가 넘실거리는 노송 사이에 위치한 청간정에서 바닷물이 튀어 오르고 갈매기가 날아오르는 순간의 일출은 가히 천하제일경이다. 달이 떠오른 밤 정자에서 바라보는 경치는 마치 바다 위에 떠 있는 배 안에 있는 듯 착각을 일으킨다…로 시작되는 안내문은 청간정의 건립과 여러 차례의 중수 사실과 대통령 이승만, 최규하의 지원으로 보수한 사실 등을 기록해 놓았다.

2층 누각에 오르니 중수기 편액이 둘, 우남의 휘호 淸澗亭과 최규하의 한시가 걸려 있었다. 눈을 들어 바다를 바라본다. 고깃배 하나 흰 물결을 일으키며 지나는데 청간정 아래 해변은 철조망을 둘렀고 건물들이 애워싸고 있다. 천학정에 비해 누각은 더 크고 화려했으나 번다한 듯 느껴지는 주변 경관 분위기는 사뭇 달랐다. 청간정을 내려와 바다와 합류하기 직전의 냇물에 비친 청간정이 멋있게 보여 몇 번이고 셔터를 누르는데 가로 지나는 삐삐선 때문에 구도 잡기가 불편하여 폰 카메라를 써 보기도 한다.
 

청간정.
청간정 현판. 안에 걸려 있는 것이 초대 대통령 우남 이승만의 글씨.
최규하 전 대통령의 한시.

천진항에 도착하니 땅거미가 드리운다. 잠시 앉아 쉬었다가 다시 걸음을 재촉하여 봉포해수욕장 긴 백사장을 지나 봉포항을 건성으로 보며 속초경계까지 주파하려고 했지만 날이 어둡고 시장하여 광포호 근처에서 걷기를 끝냈다.

길동무와 합의(?)하에 시내버스를 타고 대포항으로 갔다. 토요일 밤의 대포항은 사람들로 넘쳐나고 있었다. 어? 옛날 대포항이 아닌데? 어리둥절하기는 길동무도 마찬가지였다. 이 골목 저 골목 더듬어 광어, 우럭 한 마리씩 회를 떠서 소주 몇 병 달게 마시고 저녁식사까지 한 다음 다시 시내버스를 타고 속초시내 모텔에 여장을 풀었다. 담배를 꺼내드는 길동무에게 말했다. “방안에서 담배 피지 마시오!” 단호한 어조로.

일찍 잠자리에 든 게 탈이었을까, 한밤중에 깨어보니 텔레비전은 저 혼자 왕왕거리고 길동무 코고는 소리가 지축을 울린다. 아~ 미치겠다. 함부로 길동무 만나지 말아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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