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민식의 ‘톡톡 튀는 청주史’

철당간 이전 나무 당간을 세운 용두사

지권인智拳印의 부처를 떠올리며 다시 성안길을 찾는다. 예로부터 청주를 주성舟城이라 하였는데 읍성을 배에 비유하였다. 그리고 용두사 철당간은 돛대였다.

철당간은 준풍峻豊 3년, 962년(광종 13)에 세웠다. 철당간을 세운 이유는 청주사람 김예종金芮宗이 병에 걸리자 철당간을 세울 것을 부처님께 맹세한 것에서 비롯한다. 그러나 뜻을 이루지 못하고 죽자 사촌 김희일金希一이 그 뜻을 살려 철당간을 완성하였다. 쇠로 된 당간과 당간기幢竿記는 국보로서의 가치를 말한다.
 

용두사지 철당간(국보 제42호)의 1915년 모습이다. 철당간 속 목심木心이 썩어 기울어졌다. 1916년 시멘트를 채워 곧게 세웠다. 아래쪽에 읍성 성돌을 옮겨와 경계석으로 놓았다.
용두사지 철당간의 동쪽 당간지주에는 위, 아래 간공이 두 곳 뚫려있다. 동그란 간공은 철당간 이전 목당간이 있었던 것을 말한다.
철당간을 받치는 간대석은 지주를 이용한 것이다. 아마도 서쪽 지주였을 것이며 윤곽대와 세로띠가 선명하고 간공을 뚫었던 흔적이 남아있다.

그런데 자세히 보면 좌우 돌기둥인 지주의 모양이 다르다. 하나는 당간을 고정하기 위한 간공杆孔이 있고 다른 것은 없다. 게다가 간공이 뚫린 지주 하나는 뉘어 바닥 받침으로 쓰고 있다. 간공이 뚫린 돌기둥은 철당간 이전의 것들이다. 962년 쇠로 만든 당간 이전에 다른 재질의 당간이 있었다는 뜻이다.

아마도 나무로 만든 당간이 있었던 것이 아닐까 한다. 그렇다면 나무 당간과 지주는 언제 만들었을까? 962년 이전인 것은 분명하다. 따라서 용두사는 적어도 962년 이전에 세운 절이다. 다시 용두사를 그려보자. 당간은 절 입구에 세운다. 따라서 옛 읍성 윤곽에서 도청 쪽으로 치우쳐 절이 자리 잡았을 것이다.

그리고 절 입구에 높게 올린 당간. 나무 당간이라 하면 국립대구박물관에전시된 용머리 장식을 올려보자. 입 아래 도르래까지 만들어 당幢을 올렸었다.

일주문과 중문을 지나면 저만치 비로자나불을 모신 대적광전, 또는 비로전이 있고 그 뒤로 강당을 두었을 것이다. 물론 대적광전 앞에는 석탑을 모셨을 것이다. 탑동 오층석탑(충청북도 유형문화재 제25호 정도면 그럴 듯하다.

한편 새로 세운 지주는 둥근 간공을 제외하면 겉모양은 비슷하다. 정교한 새김도 그러하다. 그래서 두 지주의 시간 차가 크지 않다고 한다. 그런데 뒤에 만든 지주는 쇠로 만든 당간을 세우며 간공이 필요 없게 된 것이다. 또 쇠로 만든 당간은 결코 짧지 않은 시간과 적지 않은 돈이 들었을 것이다. 실제 당간기를 보면 사촌 형제가 시간을 두고 만들었다고 한다.

적어도 962년 이전 당간이 있는 절터가 있었다. 앞으로 남석교를 둔 적지 않은 크기의 절터였을 것이다. 실제 지금의 서문동 CGV 자리에서 신라 말의 해무리굽 청자가 나온 적이 있다. 상당산성에 머물던 신라 사람들이 이제 평지에 자리 잡기 시작한 것이다. 그곳에 용두사를 세워 왕권을 회복하고 옛 영화를 꿈꾸었는지 모른다. 새로운 도시가 만들어지고, 그 중심에 용두사가 있었다.
 

용두사를 나서 남석교를 건너다

용두사를 나서 남쪽으로 향하던 발걸음이 남석교에 이른다. 조선 말기의 문신인 이유원李裕元, 1814~1888의 『임하필기林下筆記』(1871)에 남석교의 기록이 있다.* 남석교가 땅에 묻히기 전 기록으로 다리 어딘가에 ‘한선제오봉원년’이란 글귀가 새겨져 있다고 한다. 그리고 다리의 길이를 ‘활 한 바탕 정도’라 하였다. 다리에 새겼다는 기년은 신라의 건국 연대인, 기원전 57년이다. 실제 남석교는 고려 때의 것으로 보고 있어 차이를 보인다. 1872년 <청주목지도>에는 용두사지 철당간도 이때 세운 것이라 하였으니 어떤 연관이 있는지 모르겠다.

실제 2004년 발굴조사를 통해 남석교의 길이는 80.85m로 밝혀졌다. 다리의 구조는 널다리板橋로 다리 끝에는 석축을 쌓았다. 다리는 지금의 지표를 기준으로 남쪽이 보다 낮았다.

이러한 구조는 지금도 남아있는 유리원판 속 남석교와 차이가 없다. 시멘트를 포장한 듯 두터워진 상판 아래로 반 쯤 묻힌 교각이 보인다.

그러나 남석교는 1906년 대홍수 이후 여러 차례의 수해로 무심천 물길이 바뀌며 1936년 묻히고 말았다. 청남문 남쪽으로 도심이 확장되고 일제강점기의 시구개정 사업의 결과였다. 남석교를 묻어 넓혀진 곳은 석교정石橋町이라 하여, 과거 섬처럼 남아있던 월교리越橋里 지역을 아울렀다.
 

1915년 남석교 ⓒ국립중앙박물관
2004년 발굴조사 당시의 남석교 하부 구조. 다리 기둥 위에 장귀틀을 좌우로 놓고 그 위에 판돌을 올려 놓은 구조였다.
1915년 남석교 ⓒ국립중앙박물관

용두사 터에 읍성을 쌓다

역시 용두사가 엄연한 때엔 읍성이 들어설 수 없었을 것이다. 따라서 용두사의 존재는 읍성의 상한을 결정한다. 그렇다면 읍성을 처음 쌓은 때는 언제인가. 우리의 읍성은 고려 말 조선 초 외적의 침입이 빈번하던 때부터 쌓기 시작하였다. 우리 지역의 옛 읍성은 영동과 황간에 그 터가 남아있다. 그곳 읍성은 하천 옆 낮은 구릉 위에 있다. 가급적 방어를 고려하여 쌓은 듯하다. 물론 두 곳 모두 조선 후기에 이르러 사용하지 않았다. 이들 읍성은 삼국시대의 산성에서 점차 평지로 내려오기 직전인 고려 말 쌓은 것이다.

그렇다면 평지에 읍성을 쌓은 때는 언제인가. 단초를 얻기 위해 용두사가 폐허로 된 때를 찾아보자. 이십여 년 전 무심천 제방에서 많은 청도 유물이 쏟아졌다. 전신주를 세우기 위해 구덩을 파다 발견한 것이다. 그릇에 새긴 글귀를 따 사뇌사思惱寺 유물이라 한다. 어떤 위급한 상황에서 급히 묻은 유물들이었다. 아마도 외적의 침입 등 커다란 변란을 암시한다.

기록 속에서 청주까지 치달은 외적은 합단哈丹이 유력하다. 1287년(충렬왕13) 원의 반란 세력인 합단이 진압을 피해 고려로 들이닥쳤다. 이들은 고려의 동북쪽을 따라 내려오며 약탈을 일삼았다. 그후 원주, 충주 등에서 크게 패하고 청주를 거쳐 세종시에 이르러 거의 전멸되다시피 하였다. 아마도 합단의 침입이 고려 후기 청주를 위협한 커다란 사건이었다.

합단이 충주를 거쳐 청주로 몰려온다는 소식은 공포 자체였을 것이다. 백성들은 피난을 떠나고 산성에 올랐을 것이다. 이때 사뇌사의 승려들은 급한 대로 소중한 제기들을 땅에 묻었던 것이 아닐까. 7백여 년이 지나 발견된 것은 묻은 이가 목숨을 잃었던 연유일 것이다. 이때 청주의 커다란 사찰은 거의 불타지 않았을까. 사뇌사는 물론 용두사마저. 이후 이곳에 다시 사찰이 들어서지 못하였다.
 

그림 흥덕사지 출토유물에 ‘용두사동량복진龍頭寺棟梁福眞’이란 글귀가 새겨있다. 같은 글귀가 사뇌사 유물에도 2점 있다.

공민왕이 머물던 청주 읍성

다시 읍성의 단서는 공민왕이 청주에 머물던 때였다. 홍건적을 피해 안동까지피난했던 왕이 6개월 동안 청주에 머물렀다. 1362년(공민왕 11) 9월 21일, 청주 동쪽에 무지개가 떠올랐다. 이때 무지개가 왕궁에 걸쳤는데 양 끝이 청주 내성內城을 넘지 않았다고 한다. 이 내성이 읍성을 말하는 것인지, 와우산의 내성인지 분명치 않다.

한편 고려 말, 모함으로 이색李穡 등이 청주옥에 갇혔다가 위기를 모면한 압각수 전설이 있다. 홍수로 크게 불은 물이 남문에서 북문으로 들이닥쳤다고 한다. 우리가 알고 있는 읍성의 윤곽이 비로소 드러난다.

청주읍성은 『세종실록』 지리지에도 분명하다. 돌로 쌓은 둘레 1,084보步의 읍성. 그리고 1487년(성종 18) 5,443척尺의 읍성을 다시 쌓았다. 옛 도량형을 언뜻 이해하기 쉽지 않지만, 대략 1.7km 안팎이다. 여기에 옹성이나 문루가 더해져 약간의 차이가 있으니, 지금 우리가 알고 있는 읍성의 윤곽과 비슷하다.

이밖에 공민왕이 머물던 자취는 공북루와 망선루에 남아있다. 지금 공북루는 터조차 알 수 없지만 이때 지은 시 29수가 전한다. 또 망선루에는 당시 과거 합격자의 방을 걸었다고 한다. 망선루의 옛 이름은 취경루聚景樓이다. 조선초 퇴락한 것을 1461년(세조 7) 다시 세우고 편액은 한명회韓明澮가 망선루望僊樓로 고쳐 썼다고 전한다.

압각수鴨脚樹(충청북도 기념물 제5호)는 1390년(공양왕 2) 목은 이색을 비롯한 10여 명이 모함으로 청주옥에 갇혔을 때 홍수가 나자 나무에 올라 화를 피했다는 이야기가 전한다.
중앙공원 북쪽에 있는 망선루(충청북도 유형문화재 제110호). 2000년 제일교회에서 뜯어낸 부재로 다시 세웠다.
1915년 경무부警務部 뒤쪽, 면사무소 앞에 있던 망선루. 보통학교 교사로 쓰였다고 한다. ⓒ국립중앙박물관.

지금의 망선루는 제일교회를 새로 지으며 뜯어낸 부재를 이용하여 2000년 다시 지은 것이다. 거의 새로 지은 것으로 원 자리가 아닌 중앙공원 한쪽에 복원하였다. 한 해 두어 차례 행사를 제외하면 가까이 갈 수 없는 공간이다.

여러 유명한 누각은 항상 사람들이 발길로 닦고 다진다. 그래서 더 튼튼히 오래 지켜내고 있다.

망선루가 있던 제일교회 자리도 본래의 자리는 아니다. 원래는 객사 동쪽에 있었다. 일제강점기 청주보통학교 교사로 쓰다가 1921년 경찰서 체육관이 들어서며 헐렸다. 이후 1923년 몇몇 선각자에 의해 교회로 옮겨 사학私學의 모체로 삼았다. 청남학교와 세광고등학교가 여기서 태어났다.

청주옥淸州獄과 읍성 성돌을 뽑아다 세운 탑동 양관洋館(충청북도 유형문화재 제133호)은 선교사의 주택과 학교, 병원이었다. 1907년부터 1932년까지 6동의 건물을 완성하였다. 한옥과 양옥을 절충하고 벽돌과 유리, 보일러 등 새로운 문물을 적용하였다. 청주 지역 개신교의 정착과 활동을 살펴볼 수 있는 귀중한 유산이다.

그런데 양관은 1932년 마무리된 것이 아니라 1939년 제일교회 예배당으로 연결된다. 지금은 여러 사정으로 종파를 달리하고 각기 다른 학교법인을 운영하고 있다.

제일교회 자리는 옛 지도에서 익숙한 장소다. 바로 중영中營이 있던 터다. 국권을 상실한 후 중영 터는 선교사의 차지가 된 것이다. 그래서인지 계몽운동을 제외한 뚜렷한 독립투쟁의 기운은 찾아볼 수 없다. 오히려 한참 후 군사독재에 맞선 민주화운동의 중심으로 자리하였다.
 

1936년 지금과 같은 제방을 쌓기 이전 남석교로 흐르던 무심천과 멀리 양관이 보인다. 소민병원蘇民病院으로 쓰던 양관 6호이다. ⓒ국립민속박물관

전쟁은 영웅으로 기록된다

2014년은 지난 1세기를 돌아보는 의미 있는 한 해였다. ‘근대’와 함께 찾아온 식민지의 기억을 떠올리게 한다. 1914년 많은 일들이 있었다. 군현郡縣 통폐합에 따라 전통성은 약화되고 식민지 체제가 강화되던 시기였다. 마침 청주시와 청원군이 통합되면서 마치 백 년 전의 그때를 기억하게 한다. 모든 것이 효율성에 따라 재정비되던 때였다. 더불어 시구개정이란 명분 아래 읍성을 허무는 작업이 완료된 때다. 읍성 자리에는 신작로가 놓이고 그 길을 따라 수탈과 압제가 들이닥쳤다.

이제 백 년이 지나 다시 읍성을 쌓으려 한다. 실제 길이 35m의 다시 쌓은 성벽이 번듯하다. 식민 체제의 극복이란 명분 속에 무언가 아쉬움이 남는다. 또 다른 토건사업인가. 아니면 읍성과 함께 봉건시대의 부활인가. 전쟁은 무수한 이야기를 창조한다. 그게 역사로 남아 오히려 두렵다.

임진년 4월. 부산 앞바다를 가득 메운 왜선. 그들은 20만에 한양을 점령하였다. 파천播遷, 몽진蒙塵. 왕이 한양을 떠나는 순간 조선은 없었다. 단지 이름 없는 민초들이 왕 없는 나라를 지킬 뿐이다. 8월 초하루 무심천 건너 산기슭에서 치달은 의승병이 서문으로 돌진하였다. 조헌趙憲, 1544~1592이 이끌던 의병과 이보다 앞서 청주를 공략하고 있던 영규靈圭 등 승병들이다. 조헌은 당초 공주를 거쳐 한양으로 향하고 있었다. 이때 영규의 분전과 박우현朴佑賢의 전사 소식을 듣고 말머리를 돌려 청주로 향했다.

초하루의 전투는 많은 희생에도 불구하고 실패하고 말았다. 그렇지만 이 날의 전투가 왜군에게도 적지 않은 피해를 입힌 듯 이튿날 왜군은 북문으로 도망하였다. 북문을 지키던 관군의 기피. 이 날의 생생함은 중앙공원 한쪽에 서있는 조헌 전장기적비戰場記蹟碑(충청북도 유형문화재 제136호)에 자세하다. 조헌은 청주읍성의 승전을 뒤로 한 채 고경명高敬命의 뒤를 따라 금산에서 순절하고 말았다. 원래 서문 앞에 세웠던 것을 일제강점기에 지금의 자리로 옮겨 세웠다.

지금도 우리는 청주읍성 탈환을 기념한다. 매년 가을 조헌과 영규, 그리고 순절인을 기리는 제향과 읍성 탈환을 기념하는 축제가 열린다. 여기에 과거의 기록과 현재의 기억이 충돌한다. 기억하고 싶은 것만 남을 뿐이다.
 

제일교회 예배당 1939년 10월 13일 정초定礎 표석. 1939년 착공하여 1941년 준공하였다.
1949년 6칸 예배당에 3칸을 덧대어 1950년 준공하였다.

병영을 옮겨 청주의 가치를 찾다

임진왜란은 많은 것을 바꾸어 놓았다. 단지 노략을 일삼던 왜구가 전쟁을 일으킨 것이다. 임진전쟁이다. 여전히 오랑캐라 치부했으니 왜란이라 한다. 왕이 머리를 조아리며 항복한 청淸과의 전쟁도 호란胡亂이라 한다.

조정은 많은 노력을 기울여 왜의 침략에 대비했다. 과거 바닷가 근처를 노략질하던 왜는 이제 더 이상 왜구가 아니었다. 부산에 상륙하여 빠른 길로 한양을 곧바로 쳐들어갔다. 그 길에 청주가 있으니 바닷가 가까이 있던 병영兵營을 이리로 옮길 수밖에 없었다(1651년). 이제 읍성에는 충청도병마절도사의 병영과 청주목사의 동헌이 함께 자리 하였다. 지금의 중앙공원은 병영, 옛 청원군청은 동헌 터였다.

한편 청주에 있던 관찰사영, 곧 감영監營은 공주로 옮겨갔다. 행정적 중심에서 군사적 거점으로 바뀐 순간이다. 감영을 공주로 옮긴 이가 괴산 소수에 연고를 둔 유근柳根, 1549~1627이다. 읍성 안 병영의 자취는 많지 않다. 병영의 정문인 충청도병마절도사영문忠淸道兵馬節度使營門(충청북도 유형문화재 제15호)이 있다. 동쪽을 향해 있다. 양쪽 기둥에 건 주련에, 주군의 군사를 지휘하고[節制州郡兵馬], 남쪽을 누르는 천 길의 구리 기둥[鎭南千丈銅柱]이라 하였다.

앞에서 보면 세 칸인데, 기둥과 초석에 판벽을 세웠던 흔적이 있다. 일제강점기 때 청녕각 편액을 달아 혼란이 있었다. 유독 이 건물만 남겨둔 이유가 의문이다. 이외 병영과 관련된 건물은 일체 남아있지 않다. 일제강점기 때의 사진이 남아있는데, 기와 담장을 두른 병영의 모습이다.

앞에서 보면 세 칸인데, 기둥과 초석에 판벽을 세웠던 흔적이 있다. 일제강점기 때 청녕각 편액을 달아 혼란이 있었다. 유독 이 건물만 남겨둔 이유가 의문이다. 이외 병영과 관련된 건물은 일체 남아있지 않다. 일제강점기 때의 사진이 남아있는데, 기와 담장을 두른 병영의 모습이다.
 

중앙공원 북쪽에 옮겨놓은 조헌 전장기적비. 김진규金鎭圭가 짓고 이수당李秀棠이 써서 1710년(숙종 36)에 세웠다. 높이 230cm.
청주 동헌인 청녕각淸寧閣(충청북도 유형문화재 제109호)의 옛 사진이다. 1656년(효종 7) 목사 심황沈榥이 창건하고 1732년(영조 8) 현감 이병정李秉鼎이 중수했다. 1825년(순조 25) 목사 이덕수李德秀가 크게 고쳤다. 2008년 새로 보수하였다. 이 사진은 동헌이 아니라 병영에 딸린 건물이라는 견해도 있다.
2015년 네모꼴 장주초석을 교체하는 등 크게 보수를 하고 ‘정곡루正鵠樓’란 편액을 달았다. 앞면 3칸, 옆면 2칸의 2층 누각으로 아래층 중앙으로 출입하였다.
1910년대 초 자혜의원 옛 사진. 읍성을 허문 후 그 바깥으로 물길을 내었다. 병영 건물이 완연하고 압각수와 멀리 것대산 봉수가 보인다.

무신란戊申亂, 청주를 뒤흔들다

임진왜란 후 읍성은 통치의 공간으로 자리 잡는다. 읍성은 관官과 민民의 경계였다. 아마 백성들이 느끼는 읍성의 존재는 수탈 자체였을 것이다. 그것이 1910년대 초 읍성이 헐릴 때조차 아무런 저항이 없었던 것을 말하는 것이 아닐까. 물론 가진 자들의 입장에선 대가가 충분했으니 마다할 이유가 없었을 것이다.

18세기는 새로운 시기였다. 집권 노론과 반대편에 선 소론과 남인. 이들의 정쟁政爭이 극한 대립으로 치닫기 시작하였다. 소론과 남인의 왕, 경종이 4년만에 급서急逝하자 노론의 지지를 받던 영조가 왕에 올랐다. 소론과 남인의 위기였다.

한편 사농공상士農工商의 서열적 직역 인식이 점차 극복되어 가던 때였다. 특히 정쟁조차 경제적 기반을 필요로 하였다. 장시場市가 늘어나고 이를 통해 신분 상승을 꾀하던, 궁극적으로 신분제가 해체되어 가던 시기였다.

단순한 정치적 갈등이 아닌 총체적 변화의 시기였다. 이때 청주 사람 이인좌李麟佐는 영조를 부정하며 반란의 기치를 올렸다. 영남의 정희량鄭希亮과 호남의 박필현朴弼顯, 그리고 중앙의 동조 세력을 규합하여 난을 일으킨 것이다.

하지만 결국 반란을 실패하였다. 1728년 3월 15일 읍성의 문을 연 양덕부와 죽임을 당한 세 순절인의 이야기는 살펴본 바 있다. 이때 죽은 이들을 모신 사당이 삼충사三忠祠, 곧 지금의 표충사表忠祠(충청북도 기념물 제17호)다. 읍성의 북문 안쪽에 세웠던 삼충사는 1939년 개발에 밀려 수동 기슭으로 옮겼다.

기생 끼고 술 먹다 죽었다는 비아냥도 있지만* 세 관리의 죽음은 곧 충忠으로 살아났다. 그 반대쪽에 죽음이 있었다.

이제 조금씩 밝혀지고 있지만 무신란에는 지역의 유력 인물들이 대거 가담하였다. 반면 의병을 일으켜 진압에 나선 이들도 있었다. 이때 진압군에 섰던 이들이 우리 지역의 주인이 되었다. 열 네 충신의 후예들은 오늘도 우리 지역의 유력 가문으로 남아있다. 선택의 갈림길에서 충과 역逆이라는 냉혹한 평가와 함께 살아남은 자들의 역사가 되었다.

 

표충사는 1731년(영조 7)에 세워 1735년 사액되었다. 청주읍성 북문 안쪽에 있던 것을 1939년 지금의 자리로 옮겼다. 사우는 앞면 3칸, 옆면 2칸의 겹처마 맞배지붕 기와집이다. 건립 당시 세운 삼충사사적비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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