멀고도 먼 법 앞의 평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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멀고도 먼 법 앞의 평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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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승인 2017.04.07 14: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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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사 격외도리/ 한덕현 충청리뷰 발행인
한덕현 충청리뷰 발행인

박근혜 구속에 대한 언론의 첫 반응은 “법 앞의 평등이 실현됐다”였다. 여기엔 두가지 시각이 교차한다. 하나는 법 앞에선 모두가 평등하기 때문에 제 아무리 전직 대통령이라 하더라도 각종 실정법을 위반한 데 따른 형사처벌은 당연하다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권력을 사유화하며 전횡을 일삼은 악행에 대한 응징이 비로소 실현됨으로써 국가 기강이 바로 세워질 수 있다는 정서적 기대감의 표출인 것이다.

하지만 냉정하게 따져 보면 두 가지 다 틀렸다. 이를 증명하기 위해선 가정과 가설이 필요하다. 전자 즉 박근혜 구속은 만약 촛불이 만들어 낸 거국적인 국민여론이 없었다면 불가능했던 일이고, 후자 즉 국정농단 세력들에 대한 응징으로 나라의 기강이 다시 곧추세워질 수 있다는 희망은 앞으로 상황이 여의치 않을 경우 곧바로 배신감으로 돌변할 수 있다는 것이다.

쉽게 말해 우리나라 검찰이 살아있는 권력을 스스로 거스른 적이 있었는가라는 의문과 함께, 이른바 힘있고 가진자들의 법 논리는 늘 보통 사람들의 상식과는 거리가 멀었다는 그 상실감을 쉽게 떨쳐버리지 못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결국 촛불 시위가 없었다면 박근혜 탄핵과 구속은 어림 택도 없었고 또한 박근혜와 그 추종자들은 앞으로도 모든 법논리를 동원해 요리조리 빠져나갈 개연성이 충분하다는 우려감의 발로인 것이다. 국민들은 지난 탄핵정국을 통해 확인된 김기춘과 우병우 등 ‘법 기술자’들에 의한 ‘법 농단’을 절대로 잊지 못한다.

그 때문일까. 박근혜 구속은 우리가 그토록 갈구하는 ‘법 앞의 평등’이나 ‘법과 원칙’과는 전혀 무관하다고 혹평하는 이들이 예상외로 많다. 아닌게 아니라 ‘법 앞의 평등’이라는 화두는 단 며칠을 못버티고 다시 시궁창으로 버려질 위기에 처했다. 박근혜 전 대통령이 일반 수용자 예닐곱명을 수용하는 넓은방을 혼자 차지하고 있고, 검찰 조사 역시 검사와 수사관들의 구치소 출장으로 이뤄지는가 하면, 기소는커녕 혐의에 대한 조사도 마무리되지 않은 상태에서 벌써부터 사면논란이 불거지고 있기 때문이다. 이를 두고 “우리나라에서 법 앞의 평등은 애초부터 개소리”라는 비난마저 제기되고 있다.

하지만 법 앞의 평등(equality before the law)은 세계 모든 민주국가의 헌법에 규정될 정도로 인간과 그 인간의 이성에 의한 국가운영에 있어 결코 변질되지 말아야 할 최고, 최대 과제라는 것을 잊어서는 안 된다. 우리나라도 헌법 제11조 1항에 ‘모든 국민은 법 앞에 평등하다’고 명시하고 있다.

법 앞의 평등은 ‘짐이 곧 국가다’로 상징되는 절대왕정 시대에 몽테스키외의 <법의 정신>에 의해 처음 논리적으로 체계화됐다는 점도 이채롭다. 그만큼 이 말 자체가 일반적인 사회흐름에 반하는 역동성을 지니는데다 그 실현까지는 극도의 상대성을 숙명적으로 벗어날 수 없음을 시사하고도 남는다. 이게 말처럼 쉽지가 않다는 것이다. 이 책도 나오자마자 금서가 됐다.

책에 나오는 “부(富)는 권력을 부여하지만 시민은 자신을 위해 그 권력을 행사할 수 없다”든가 “법은 너무 치밀하면 안 된다. 법은 보통의 지적능력을 가진 사람들을 위해 만들어지는 것이다. 그 것은 논리의 기술이 아니라 단순한 이론이기 때문이다” 등의 말은 지금 생각해도 무릎을 탁 치게 한다. 무려 3세기 전의 사유(思惟)가 어쩌면 그토록 현재의 우리나라 상황과 맞아 떨어지느냐는 놀라움 때문이다. 결국 몽테시키외는 이러한 것들이 보장되지 않는 현실을 고통스러워하며 어렵게 <법의 정신>을 완성, 법 앞의 평등을 외쳤는지도 모른다.

그의 말대로 시민, 서민들은 늘 권력 행사의 뒷방으로 밀려나게 마련이고 법은 너무 치밀할 필요가 없는데도 가진자들은 오히려 법에 대한 논리의 기술을 맘껏 동원해 세상을 농단한다. 정황이 다 드러나는 뻔한 혐의에조차 철면피같은 법논리로 빠져나가던 김기춘 우병우 조윤선 같은 ‘법 미꾸라지들’을 바라보면서 우리는 법 앞의 평등이라는 말이 현실과 얼마나 동떨어지는 지를 다시 한번 실감할 뿐이다.

법 앞의 평등은 여전히 ‘이상향’이라는 것을 우리는 때와 장소를 가리지 않고 경험하며 산다. 수백억원 뇌물죄로 구속되고서도 수억원대 연봉의 우리나라 최고수준 변호사로부터 지원을 받는 삼성 이재용의 법과, 불과 2400원을 납입하지 않아 해고된 전주 버스기사 이희진이 맞닥뜨리는 법은 절대로 같을 수가 없다.

사석에서 화풀이 한번에 철창신세가 되는 서민과, 국가운영을 30년 뒤로 후퇴시킨 국정농단의 원흉 김기춘 우병우가 느끼는 법에 대한 정서는 당연히 다르다. 몽테스키외의 말대로 서민들은 단순히 옳고 그름의 이론적 기준으로 법을 인식하지만 잘 배우고 출세까지 한 그들은 온갖 ‘논리의 기술’을 들이대며 법을 자신의 노리개로 삼는데 주저하지 않는다.

그렇다면 법 앞의 평등은 결국 신기루에 불과한 것인가. 아니다. 그 답이 역시 몽테스키외의 <법의 정신>에 그대로 나와 있다. 계몽주의자인 그는 자신보다도 가족을, 가족보다는 타인과 프랑스를, 더 나아가 인간세계를 사랑했다, 그러면서 사람의 존엄과 그 가치를 지키기 위한 인간으로서의 의무를 강조하며 법이야 말로 이를 확실히 보장해 주는 수단이라고 본 것이다. 이를 우리 식으로 말한다면 “법 앞의 평등은 먼저 인간이 되는 게 우선”이라는 정도로 해석될 것이다.

우리가 명심해야 할 것은 대한민국에서 ‘법 앞의 평등’을 구현하기 위해선 그 첫 단계로 다음번 대통령은 필히 ‘인간’이어야 한다는 사실이다. 정직하고, 깨끗하고, 배려하고, 소통하며 책임도 질줄 아는, 그리하여 국민의 아픔과 상처 앞에선 누구처럼 악어의 눈물이 아닌, 목놓아 펑펑 울어댈 수 있는 그런 인간이 대통령이 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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