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웨덴, 토론 중시하고 개인의 다양성 존중…유소년 시절부터 정당활동

윤송현의 세계도서관기행
(7)북유럽 편

스웨덴 도서관을 둘러보다보니 자연스럽게 고개가 ‘스웨덴 정치’로 돌려진다. 우리나라에서는 스웨덴을 복지정책이 잘 된 나라로 소개하거나 알고 있는 사람이 많다. 그런데 스웨덴을 알고 보면 더 중요한 것은 이 나라가 지구상에서 가장 민주주의를 충실하게 구현하고 있는 나라라는 점이다.
 

스웨덴 정치의 한 축을 지탱해온 노총(LO) 본부. 노라광장 옆에 있다.

몇 해 전까지는 행정부처에 ‘민주주의부’라는 것이 있었다고 한다. 최연혁교수가 스웨덴 민주주의부 장관을 직접 만나 인터뷰한 바에 따르면 사람들이 살아가는 환경이 계속 바뀌기 때문에 바뀐 환경에서 사람들의 의견을 수렴하기 위한 제도를 계속 바꿔나가야 하기에 민주주의부를 두고 있다고 한다. 지금은 부처의 국으로 되어 있다.

그런데 스웨덴의 역사를 거슬러 올라가보면 스웨덴이 민주주의 사회로 변하는 과정에서 특별한 사건을 찾아보기가 어렵다. 19세기초 러시아와의 전쟁에서 패하고 국력이 크게 쇠퇴하면서 왕권은 크게 축소되었고, 귀족과 성직자, 영주의 도움을 얻기 위해 의회를 열 게 되었다. 점차 의회의 권한이 확대되었지만, 의원 선출을 위한 투표권은 제한되어 있었다.

혁명보다는 개혁을 선택

스웨덴의 변화를 이끈 것은 사회민주당인데, 사회민주당의 지도자들은 혁명보다는 개혁을 선택했다. 국제적으로 마르크스주의에 따른 노동계급의 혁명이 사회주의로 가는 정통의 길로 받아들여지고 있었고, 스웨덴의 사민당내에도 계급혁명을 주장하는 세력이 있었지만, 브란팅을 비롯한 스웨덴 사민당의 주류 지도자들은 노동계급투쟁보다는 보통선거권 실현을 당면과제로 꼽았다. 혁명보다는 의회를 통한 민주적인 개혁을 선택한 것이다.

스톡홀름 중앙역앞에서 400여m 떨어진 곳에 노라광장(Norra Vantorget)이 나온다. 이곳에서 1902년 보통선거권을 주장하는 사민당 주도의 대규모 데모가 있었다. 광장 가운데에는 이 데모를 기념하는 커다란 부조물이 서 있다. 내가 아는 한 스톡홀름 거리에 있는 거의 유일한 정치적 기념물이다.

1917년 러시아에서 볼세비키혁명이 일어났을 때, 브란팅을 비롯한 사회민주당의 주류 지도자들은 볼세비키의 폭력 혁명을 비난하고, 멘셰비키를 지지했다. 1919년 스웨덴 의회에서 보통선거가 의결되었고, 1921년 선거에서 처음으로 남녀보통선거가 실현되었다. 이후 사민당은 착실하게 의회에서 의석을 늘려 집권을 경험하고 1932년부터는 44년간 장기집권을 하게 된다.
 

노라광장의 브란팅기념비. 1902년 보통선거권을 주장하는 대규모 데모가 있었음을 기념하고 있다.

협의를 중시하는 정치

이 대목에서 사람들은 또 쉽게 스웨덴은 사민당이 장기 집권을 했기 때문에 복지국가가 되었다고 이야기하곤 한다. 일부만 맞는 말이다. 스웨덴에서 사민당의 44년간 집권을 자세히 들여다보면 그 기간 동안 사민당이 의회에서 과반수 의석을 차지한 것은 두 번, 햇수로 6년밖에 안 된다. 대부분의 기간 동안 의회의석 과반수에 못 미쳤다. 말 그대로 여소야대였다.

사민당이 정책을 실현하기 위해서는 의회에서의 합의가 필수적이었다. 끝내 합의가 안 되면 표결로 이어지지만 가부동수로 부결되는 상황에서도 폭력적인 해결 시도는 한 번도 없었다. 그런 과정이 오래도록 지속되면서 스웨덴의 정치는 토론과 협의, 합의를 바탕으로 한 정치로 자리잡았다. 높은 세금 부담률은 사민당이 일방적으로 밀어붙여 실현된 것이 아니다. 일상적인 토론, 협의가 바탕을 이루고, 다양한 세력들이 서로를 존중하고 인정하는 과정에서 만들어진 것이다.

불만이나 반대가 있는 세력들은 다음 선거를 기약한다. 반대의사를 다음 선거에서 적극 피력할 것이고, 국민의 지지를 더 받으면 그때는 다시 수정을 요구할 것이다. 1976년에 사민당이 44년간 차지해온 집권당의 지위를 내놓을 때도, 1982년에 다시 집권한 사민당이 임금노동자기금안을 통과시켰을 때도 우파들은 다음 선거를 기약했을 뿐이다.

비례대표 선거와 의원내각제의 나라

현재의 스웨덴 상황은 더 특이하다. 2014년 선거 결과는 특별했다. 8년 동안 집권했던 우파연합은 복지 혜택 축소, 공공성의 축소에 대한 반발로 지지율이 크게 떨어졌다. 그렇다고 사민당이 지지를 크게 회복한 것도 아니었다.

반이민정책을 내건 스웨덴민주당이 놀라운 지지를 얻어 캐스팅보트의 지위를 갖게 되었다. 우파의 정당들은 이미 선거 과정에서 반이민정책을 내건 스웨덴민주당과는 연대할 수 없음을 분명히 했다. 정권은 사민당(지지율 31%)이 환경당(지지율 6.9%)과 연합하여 구성하였다.

2015년 예산을 처리하는 과정에서 문제가 생겼다. 스웨덴민주당의 이민정책 예산 삭감 주장으로 사민당이 제출한 예산안이 부결되었다. 뢰프벤총리는 의회 해산후 재선거를 주장하였다. 그런데 그런 혼란은 오래도록 길들여진 스웨덴의 정서와는 맞지 않았다. 우파연합의 지도자들이 양보했다. 스웨덴민주당의 주장은 받아들일 수 없다. 그렇다고 의회 해산이라는 정치적 불안정도 받아들일 수 없다.

그래서 우파연합의 지도자들은 사민당의 정책을 지원해주기로 했다. 삭감된 예산은 추경안에서 살려주기로 한다. 이런 입장은 2024년까지 유지한다. 이런 합의로 스웨덴의 정치는 다시 안정을 되찾았다.

스웨덴의 민주주의는 개인의 다양성을 존중하고, 그런 다양성을 담아내는 정당을 제도적으로 존중한다. 정당 활동은 유소년시절부터 이뤄진다. 학생때부터 정당 활동이 이뤄진다. 학생이나 청년위원회가 다양한 활동을 펼친다. 그 결과 의회 의원의 구성이 세대별 인구 구성에 근접해서 이뤄진다. 40대 총리는 기본이고, 20대 후반의 여성의원이 당대표가 된 경우도 있을 정도이다.

그러면 스웨덴 사람들의 본성이 다른 것일까? 많은 사람들이 북유럽 사람들의 정서인 ‘얀테의 법칙’을 들고 있다. 튀지 않고, 나서지 않는다는 정도이다. 충청도식이다. 나는 그것을 핵심적인 요소라고 꼽는 것은 무리가 있다고 본다. 문제는 그런 문화를 만들어온 제도이다. 선거제도는 지역별 정당명부식 비례대표제이고, 권력은 의원내각제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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