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민식의 ‘톡톡 튀는 청주史’

청주를 차지한 신라, 소경小京을 두다

옛 읍성 터와 중앙공원 일대는 청주 역사의 중심이다. 청주 역사의 시작은 와우산을 비롯하여 무심천 건너 부모산과 그 자락의 너른 구릉에서 시작한다. 청주 테크노폴리스 부지의 옛 백제 마을은 4백 년 백제 역사의 터전으로 손색없다. 여기에서 백제 사람들은 미호천과 무심천, 그리고 주변에 솟은 산자락에 기대어 살았다. 산성을 쌓고 무덤을 만들고, 그렇게 수백 년을 살았다.

그 사이 고구려의 침입을 받아 물리쳤고, 다시 이 땅의 주인은 신라로 바뀌었다. 신라가 문의 양성산성을 쌓은 474년 이후 언제 쯤인가 신라군은 청주에 들어섰다. 늦어도 6세기 중엽, 신라 진흥왕이 영토를 크게 넓히던 그 즈음 청주도 신라 땅이 되었다.

청주를 차지한 신라. 그들은 우선 부모산의 백제 성을 헐고 그들의 석축 산성을 다시 쌓았다. 그게 오늘까지 남아있는 부모산성이다. 이때 신라는 저 멀리 한강 유역에서 고구려와, 다시 금강을 경계로 백제와 크게 다투고 있었다.

7세기 후반 삼국 통합을 마무리한 후 신라는 청주의 가치에 주목한다. 예로부터 백제의 군사적 요충이라는 점, 그리고 사방으로 뻗은 물길과 산길의 갈래 길이 시작된다는 점. 청주는 옛 백제 지역을 효율적으로 다스리기 위한 요충이었다. 이곳에 신라는 소경小京을 둔다. 685년(신문왕 5) 서원소경西原小京의설치.

 

운천동 신라사적비 탁본. 국립청주박물관에 전시 중인 사적비는 확인 이전 빨래판 등으로 사용하여 글자를 읽기 힘들다.

서원소경은 어떤 모습일까

흔히 말하는 5소경은 한 번에 설치한 것이 아니었다. 557년(진흥왕 18) 국원소경, 678년(문무왕 18) 북원소경, 680년 금관소경, 그리고 685년 서원소경과 남원소경을 두어 5소경 체제를 마무리하였다. 충주에 둔 국원소경은 고구려를 의식한 결과였으며, 북원소경과 함께 북으로 향하는 교통로의 거점이었다. 금관소경은 당시 신라를 위해 최전선을 누비던 가야왕족의 후예와 남해안 교통로를 염두에 둔 결과였다. 그리고 청주와 남원에 따로 소경을 두어 옛 백제지역을 아울렀다.

서원소경은 서해안에서 당唐으로 가는 길이자, 백제의 옛 서울인 웅진과 사비를 겨냥할 수 있는 곳이었다. 서원소경 설치 4년 후 청주에 성을 쌓았다. 689년 쌓은 서원경성, 혹은 서원술성西原述城이다.

특히 이때는 676년 당나라 군대를 몰아내고 비로소 삼국 통합을 이룬 직후였다. 언제든 당이 침입할 수 있었고, 고구려와 백제 유민들은 부흥을 꿈꾸던 때였다. 아직 전쟁이 끝난 것은 아니었다. 물론 서원술성·서원경성이 지금과 같은 둘레 4.2km의 돌로 쌓은 상당산성인지는 분명치 않다. 기록 속에 고상당성 혹은 상령산성上嶺山城으로 남아있을 뿐이다.

서원소경 설치 이듬해 지금의 운천동 일대에 커다란 사찰을 세웠다. 절의 이름을 알 수 없지만 옛 절터의 유적을 확인하였고, 이곳 가까이서 신라사적비新羅事蹟碑(충청북도 유형문화재 제134호)가 발견되었다.

왼쪽 둘째 줄의 ‘수공壽拱 2년’은 당의 연호인 수공垂拱과 같은 것으로 보아 686년 세운 것으로 본다. 내용 중에는 삼국 통합의 분위기를 말해주듯 ‘민합삼한民合三韓’이란 표현이 보인다. 전체적으로 불법을 찬양하고 왕의 덕을 칭송하며, 삼국 통합의 위엄을 드러내는 내용이다.

또한 1970년 발견한 운천동 출토 동종(보물 제1167호)은 통일신라시대에 만든 것이다. 이곳에 사찰이 있었던 사실을 말한다.
 

국립청주박물관에 전시 중인 운천동 출토 동종은 78cm의 크기로 통일신라시대의 대표작이다.

한편 1933년 10일 일본 도오다이지[東大寺] 쇼소인[正倉院]에서 발견한 서원경 인근 4개 촌락의 문서가 있다. 58×29.6cm 크기의 2매로 사해점촌沙害漸村, 살하지촌薩下知村 등 4개 촌락의 크기, 호구, 우마牛馬, 토지, 나무 등을 3년마다 기록하였다. 그리고 그 사이 감소된 수를 표시하였다. 호구는 연烟을 단위로 9등급으로 나누었다. 인구는 노비를 포함하여 남녀를 연령대로 6등급으로 구분했다. 가축과 과수 또한 세밀한 조사가 이루어져 통일신라시대의 구체적인 촌락의 모습을 살펴볼 수 있다.
 

1933년 일본 동대사의 정창원에서 발견된 서원경 주변 4개 촌락에 대한 기록이다. 원래 『화엄경론질華嚴經論帙』를 싼 종이였다. 서원경과 인근의 촌락으로 보고 있으나 구체적인 위치는 알 수 없다.

비로자나불이 두드러진 곳

770년 왕의 행차. 혜공왕惠恭王은 넉 달 가까이 청주에 머물렀다. 그런데 혜공왕이 왕위에 오른 직후부터 반란이 끊이지 않았다. 신라 하대下代의 시작이다. 이제 왕위는 힘 센 진골귀족의 차지가 되는 혼란의 시기였다. 혜공왕마저 선덕왕宣德王으로 즉위한 김양상金良相에게 살해되었다.

이처럼 혼돈의 시기에 혜공왕은 왕궁을 비우고 왜 청주에 머물렀을까. 그 이유를 어디에서도 찾을 수 없다. 오로지 그 궁금증은 청주에서 퍼즐을 맞추듯 찾아야 한다. 8세기 후반 경주 바깥은 새로운 세상을 꿈꾸고 있었다. 미륵세상을 설파하던 진표眞表의 활동. 그리고 왕권을 차지하기 위한 진골귀족들의 암투. 안팎의 도전으로부터 어느 것 하나 자유롭지 못했다. 삼국 통합 직후의 힘찬 기운은 간 데 없고 왕의 안위를 걱정해야 했다. 그런 왕이 청주에 꽤 오래 머물렀던 것이다.

그런데 그의 행차 후 서원경에서는 커다란 변화가 있었다. 775년(혜공왕 11) 안심사安心寺를 짓고, 778년 보살사菩薩寺를 중창하였다. 이들 사찰은 모두 진표와 관련 있으며, 특히 보살사는 제자 융종融宗으로 하여금 중창케 하였다. 또한 진표는 776년 속리산 법주사를 중창한 인물로 알려져 있다. 안심사는 918년 고려 태조가 다섯째 아들인 증통국사證通國師로 하여금 세 번째 중창한 사실이 있다. 그런데 보살사를 제외하면 모두 비로자나불을 모신 공통점이 있다.

진표가 활동한 김제 금산사와 보은 법주사는 화엄신앙과 미륵신앙이 공존하는 독특한 구조이다. 청주지역의 안심사와 괴산 각연사도 마찬가지이다. 전자의 경우 두 신앙체계가 십十자형으로 교차하고, 후자의 경우에는 앞뒤 엇갈리게 별개의 법당을 배치하였다.
 

대표적인 미륵도량인 김제 금산사의 미륵전은 옆을 향해 있고, 비로자나 불을 모신 대웅보전이 중심축에 있다. 그리고 두 축 가운데에 적멸보궁이 들어섰으니 시선은 분산될 수밖에 없다.

도심 속 신라의 옛 자취는 고려와 조선을 지나며 희미해져 갔다. 몇몇 유물들이 편린처럼 남아있을 뿐이다. 불교의 시대, 곳곳에 남아있는 자취를 찾아보자. 그런데 유독 우리 지역에는 손가락을 쥔 부처가 많다. 비로자나불이라 한다. 용암사, 청화사, 동화사…. 언뜻 꼽아도 적지 않다. 오죽했으면 길가 정하동 마애불조차 비로자나불을 새겼을까.

이들 비로자나불은 모두 돌로 만든 좌상坐像이다. 오른손 검지 손가락을 왼손으로 감쌌다. 그런데 정하동 마애비로자나불좌상은 손모양이 반대다. 영남 지역 많은 비로자나불이 대부분 왼손 검지를 오른손으로 감싼 것과 대비된다.
 

용암사 석조비로자나불좌상(충청북도 유형문화재 제23호)는 당산에 있던 것을 옮겨온 것으로 지금은 청주대학교 박물관 내에 있다. 광배는 없고 불상과 대좌만 남아있다. 불상 높이 117cm.
동화사東華寺 석조비로자나불좌상(충청북도 유형문화재 제168호)은 대웅전 안에 주존불로 모셔져 있다. 높은 대좌 위에 머리를 새로 만든 불상을 올려놓았다. 불상 높이 148cm.

한편 안심사安心寺 영산전靈山殿의 본디 이름은 비로전이다. 따라서 이 법당의 주존불이 비로자나불임을 알 수 있다. 비로자나불상을 잃은 후 나한을 모셔 지금은 영산전이라 한다.

『화엄경』에서 큰 부처인 비로자나불은 헤아릴 수 없는 모습으로 대중을 제도한다. 광명光明의 부처, 깨달음의 부처는 현실에서 왕이 닮고 싶은 부처였다. 안팎의 위기에 맞닥뜨린 왕에게 비로자나불은 구원이자 나아갈 길이었다. 우리 지역에 갑작스레 비로자나불이 늘어난 이유를 알 것 같다.

 

모충동 석조비로자나불좌상(충청북도 유형문화재 제316호)는 1940년 세운 청화사에 있던 불상이다. 광배와 불상, 대좌가 모두 하나의 돌이다. 머리에 쓴 삼면보관이 특징이다. 불상 높이 121cm.
청주의 다른 비로자나불상과 달리 정하동 마애비로자나 불좌상(충청북도 유형문화재 제113호)은 수인手印이 전형양식과 같다. 이 불상은 절터가 아닌 진천으로 향하던 옛 길에 있다.
안심사 비로전(충청북도 유형문화재 제112호)은 1613년 창건하였고 1842년 중수하였다. 앞면 3칸 옆면 2칸의 다포식 맞배집으로 좌우에 풍벽을 달았다. 좌우 공포로 보아 원래는 팔작지붕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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