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진해맞이봉-반암항-송강정을 한나절에 걷다

오늘도 걷는다마는<3>
동해에서 서해까지 해안선 따라 7000km

셋째 날, 3월3일 아침 6시에 기상. 어제 놓친 해맞이공원을 향한다. 경사가 급한 층계를 올라 등대 옆을 지나 ‘거진 해맞이봉 삼림욕장’이란 안내판에 이르니 어제 저녁식사 때 식당집 머슴을 자처하던 주인남자가 일러주던 대로 ‘일출, 일몰 때는 백섬이 와불로 보인다’고 쓰여있고, 정말로 부처님이 두 분이나 누워있는 모습이 선연하다. 어제의 노도가 거짓말인 것처럼 바다는 잔잔하다. 잠시 후 저 멀리 수평선 위로 붉게 물들기 시작하더니 이내 샛노란 해가 솟아오른다. 구름띠가 두 줄기 가로질러 멋을 더한 해는 점점 더 솟아 마침내 둥근 모습을 드러내었다. 어느새 구름도 벗겨지고 노오랗게 둥실! 떠올랐다. 정신없이 셔터를 누르면서 빌고 또 빌었다. 어쩌면 내 여생의 마지막일 이 행보를 끝까지 지켜주시고, 법적 노인이 된 아내와 자식 삼남매와 어린 손자들이 아프지 않고 건강하게 바르게 성장하도록, 우리 가족을 지켜주시고… 그리고 무엇보다도 나라 망친 권력으로부터 헬조선, 이게 나라냐, 좌절하는 민초들이 다시일어 설 수 있도록 잡아 주소서.
 

백도 와불. 큰 부처님 왼편에 작은 부처님이 같은 자세로 누워 있다. / 사진=강태재.

명태축제비가 있는 곳까지 내려갔다가 다시 올라와서는 와불이 있는 해안도로 쪽으로 내려와 인공암벽장 앞을 지나 부두로 들어오는데 마을 뒤 멀리 눈 덮인 하얀 산이 아침햇살에 빛난다. 큼지막하게 써 붙인 ‘물회 전문’ 횟집에 팔공광 화투장이 크게 붙어 있는 걸 보고 단박에 알아챘다. 방금 본 일출이었던 것이다. 조금 더 가니 광장에 커다란 명태 조형물이 서 있다. 아직 준공을 하지 않은 듯 바닥공사가 미처 마무리 되지 않았다. 좀 전에 본 해맞이공원 입구 길가 시멘트 축대에도 ‘고성명태는 행운이다’라고 쓰여 있는 것으로 보아 명태는 고성군의 밥줄임에 틀림 없는가보다. 그러니 어서 명태가 돌아오던지 인공부화 방사가 성공을 거두어야 되겠다.

부두에는 리어카를 끄는 여인네들, 해양경찰 앞에서는 그물을 정리하는 어부들, 이제 막 배에서 내리는 어부 그리고 투박하게 생긴 생선 몇 가지를 담아놓은 함지박 몇 개가 고작이다. 대부분의 배는 그냥 정박해 있다. 유행가에나 나올 법한 선창가 주막집을 찾았다. 테이블이 4개인데 이미 2개 테이블은 어부들로 보이는 손님들이 차지했고, 2개를 붙여놓은 테이블은 비어 있어 그곳에 앉았다. 만 원짜리 생선찌개를 주문하고 둘러보니, 네 명이 앉은 테이블엔 소주와 맥주병이 수북한데 찌개 하나 없이 마신다. 옆 테이블 어부 세 명은 맨 소주다. 음식을 내놓는 주인에게 저 분들은 왜 아침부터 술이냐니까 문어가 금어기라서 출어를 하지 못하니 어쩌겠냐고 한다.
 

성군의 자랑 명태가 한껏 뽐내고 있는 거진항 광장 조형물.
거진항 아침 풍경.

바람거센 해변, 콧노래 흥얼

 

모텔에 돌아와서 짐을 꾸려 출발이다. 하늘은 맑고 화창한데 바람이 거세다. ‘고성명태 산업관광 홍보지원센터’ ‘고성명태산업 안내도’ 같은 것을 흘깃거리며 다리 가까이 다가가자 가드레일 쇠파이프가 부르르 떨며 비명을 질러대는데 금방이라도 튕겨나갈 것 같다. 다리 한 가운데서 흰 눈 덮인 백두대간이 웅장하게 보인다. 할머니 한 분이 유모차에 의지하여 다리를 건너는데 영 불안하다. 어쩌자고 이런 날 외출이신가.

거진읍내를 벗어나 오션샹떼빌아파트 지나 길가 인도와 공터에 걸친 널따란 곳에 크고 기다란 그물을 펼쳐놓고 뚫어진 그물코를 깁고 있는 광경이 보인다. 가로수에 매단 MP3라디오라든가 노래기계 소리는 바람에 묻혀 들리지도 않는데 땅바닥에 앉아 그물을 깁고 있는 곳에 다가가 사진 한 장 찍어도 되겠냐고 했더니 얼른 모자를 벗으며 그러라고 한다. 아, 추운데 모자는 쓰시라 만류하고 가까이서 한 컷 잡았다.

첫 날과 둘째 날 산길을 많이 걸었던데 비해 오늘은 계속 평지가 이어진다. 날씨까지 화창하니 기분이 좋다. 콧노래가 절로 나온다. 소리 내어 노래를 불러본다. 듣는 이 없지만 혼자서 내는 신명도 괜찮다. 타박타박 헤적이며 그냥 저절로 흥얼거리는 즉석곡.
 

가로수에 매달린 노래기계 소리가 세찬 바람소리에 묻히는 그물 보수 작업장.

“놀멘 놀멘 걸어서 가자/놀멍놀멍 걸어서 가자/가다가 지치면 정자에 앉아/놀며 놀며 걸어서 가자/가다가 고프면 목로에 앉아/헤적 헤적 걸어서 가자/오늘도 걷는다 마는”

스마트폰을 꺼내 녹음도 해본다. 기타리스트 박종호에게 보내 작곡을 해보라 권하였더니, 악상은 넘쳐난다며 퇴짜를 놓네, 흥!

어느덧 반암항 작은 포구에 들어섰다. 그런데 한 사람이 방파제 저 끝으로 걸어가는 게 보인다. 뭔 일이라도 났는지 싶어 따라간다. 방파제 끝에서 만난 사내는 숭어떼가 들어오는가 살피러 왔다며 아직은 이른가보다고 한다. 건너편 방파제 끝에는 낚시꾼 하나 자리를 잡는다.

포구를 나와 반암마을로 들어서니 마을초입 둥구나무에 하얗게 바랜 북어가 매달려 있다. 아마도 정월대보름에 동제를 지낸 것이겠지. 안쪽 길로 들어가는데 전후좌우 온통 민박집이다. 단 한 집 예외가 없다. 좀 큰 집은 비치하우스이고 슈퍼 한 곳과 큰 길 가까이 식당 몇 개…. 민박골목길을 벗어나자 멋진 소나무 길에 관광안내 지도에도 나오는 ‘고성군 각자 전수교육관’이 있다. ‘무형문화재 제16호 각자장’의 목활자와 능화판을 보고 싶었으나 문이 잠겨 있어 아쉬웠다.

다시 바닷가. 철망으로 차단된 송림 곁을 따라 걷는다. 우측으로는 제법 널따란 들판이 펼쳐지고 비닐하우스 너머 저 멀리 설산은 계속 이어진다. 한동안 계속되던 직선 길을 꺾어 안내판의 북천철교/마산해안교 방향을 따라 송죽리 마산을 휘돌아 간다. 몇 가구 안 되는 작은 마을 초입에 죽은 나무 등걸의 가지 하나가 고라니처럼 생긴 것이 묘하다.
 

북천 하구에 산책로 데크와 정자가 있고 ‘연어맞이광장’은 공사 중인 것으로 보인다.
북천 하구 송강정철정자에서 길동무를 만났다.

송강 정철 정자서 만난 길동무

 

북천 하구에 이르니 ‘松江鄭澈亭(송강정철정)’ 편액을 단 정자와 그 앞에 국토종주 동해안 자전거길 ‘북천철교 인증센터’가 있다. 인증 스탬프를 찍고, 해파랑길 지도를 보니 ‘연어맞이광장’인데 아직 공사가 끝나지 않은 듯싶다. 정자에 올라 ‘정자이름이 뭐 저래, 松江亭(송강정) 정도면 차고도 넘치는 것을…’ 혼잣말로 중얼거리는데, 먼저 온 과객이 말을 걸어온다. 그도 나와 같은 코스를 왔는데 화진포에서 산길이 아닌 도로로 왔다고 한다. 서울 산다는 그와 길동무가 되어 북천철교를 건너 냇물을 따라 들판으로 돌아 커다란 소나무와 함께 마을 입구에 서있는 장승의 환영을 받으며 동호1리 해당화마을로 들어섰다.

마을 앞은 평야를 이루고 바다 쪽은 송림 숲이 있는 잘 가꾸어진 체험마을이다. 들이 넓어 그런지 마을 앞뒤에 오래된 정미소가 몇 개 있고 새로 지은 정미소도 보인다. 마을 뒤 해안길로 들어서니 저만치 해변 송림 속에 무덤들이 여럿 보인다. 인근에 산이 없기 때문일 것이다.

그나저나 점심을 먹을 만한 곳이 없다. 얼마를 걸었을까, 냇물이 가로 막는다. 남천을 거슬러 올라가 큰길가에 이르러 걷기 길을 벗어나 간성읍내로 들어갔다. 시가지 어느 골목 할머니들 서넛이 있는 식당에서 비빔밥을 시켜 먹었는데 시장도 하려니와 된장찌개 맛이 좋아 맛있게 먹었다.

점심 후 길동무에게 나는 ‘건봉사’를 보러 가야하니 여기서 헤어지자 말했더니, 자기도 따라가겠다며 나선다. 개인택시들이 주차해 있는 곳에서 2만원에 왕복하기로 흥정을 했다. 고씨 성을 가진 나이 많은 기사는 관광가이드를 자처, 잠시도 쉬지 않고 설명을 해댄다. 적당히 맞장구를 쳐주면서 건봉사에 도착, 경내를 둘러보았다.

 

건봉사 불이문.
건봉사 능파교.

부처님 ‘진신치아사리’ 봉안

 

1920년대 봉암사 전경 사진과 함께 쓰여 있는 ‘금강산 건봉사’ 안내판 첫 머리에 건봉사는 전국 4대 사찰의 하나로… 시작하면서 신라 법흥왕 7년(520)에 아도화상이 창건했다고 적혀 있다. 신라가 불교를 받아들인 것이 527년이니, 이보다 7년이나 앞선 것이다. 만해 한용운 선생의 건봉사 사적지에 그렇게 적었다니 믿어야겠지. 염불만일회의 효시가 된 곳이며, 도선국사, 나옹화상이 중수했고 세조의 원당으로 어실각을 지었다.

임진왜란 때는 사명대사가 의승병을 기병한 호국도량이었으며, 왜군이 약탈해 간 통도사의 부처님 진신치아 사리를 찾아와 일부를 이곳에 봉안하였다. 1878년 큰 불이 나 무려 3,183칸이 전소되었으나 여러 차례 복원, 1911년에 9개 말사를 거느린 31본산의 하나가 되었고, 이 무렵 봉명학원을 설치 관동지방의 교육도장이었으나 일제에 의해 강제 폐교되었다. 특히 한국전쟁 중 건봉산 전투의 와중에서 본사 642칸, 18개 말사 124칸이 완전히 폐허가 되는 아픔을 겪어야 했다.

1951년 5월 ‘부처님 오신 날’을 불과 3일 앞둔 날, 유엔군은 후퇴하던 북한군의 중간집결지였던 건봉사에 폭탄을 퍼부어 모든 전각이 불타고 국보 412호 금니화엄경 46권과 도금원불, 오동향로, 철장 등 사명대사 유물이 잿더미에 사라지고 말았다니 참으로 안타까운 일이다. 1951년 4월부터 휴전 직전까지 16차례의 공방전이 벌어지는 가운데 국군이 쏘아댄 포탄이 10만발, 미 7함대 함포사격과 공군기 폭격이 더해져 그야말로 초토화되었고, 불과 20여 년 전만해도 군부대의 사전 허락을 받아야 들어갈 수 있던 절이었다고 한다.

범어가 새겨진 비석 앞을 지나 전쟁의 포화에서 유일하게 살아남았다는 불이문을 들어가니 왼편 극락전 구역은 돌계단이 층층이 남아있는 빈터다. 부처님의 진신사리가 모셔진 적멸보궁을 참배하고 능파교를 건너 金剛山乾鳳寺(금강산건봉사) 현판이 걸린 봉서루를 지나 대웅전 구역으로 간다. 보물 제1336호 능파교는 극락전 구역과 대웅전 구역 사이를 흐르는 개울을 이어주는 홍교로서 숙종연간에 축조된 것을 여러 차례 고쳐 오늘에 이르고 있었다. 능파교 양켠에 서있는 석주는 수행의 과정을 나타내는 십바라밀을 새긴 것으로 건봉사에서만 볼 수 있다는데 봉서루 입구 외에도 곳곳에 보이는 다양한 모양의 석주와 문양 그리고 80여기에 달하는 부도와 비석이 특이하다.

특이한 형태의 부도와 비석을 찬찬히 살펴보고 싶었으나 기다리고 있을 택시기사를 생각해 급히 셔터를 누르곤 서둘러 떠났다. 욕심 같아서는 진신사리 친견과 사명대사 기념관, 등공대 등을 보았어야 하지만 그러려면 오늘 일정을 여기서 마쳐야 되겠기에 차일을 기약할 수 밖에 없었다. 귀로에 육송정홍교는 보리라 맘 먹었건만 그마저 지나치고 말았다.

 

공현진 옵바위.

공현진항 해변 명물 ‘옵바위’

 

간성읍내로 돌아온 우리는 다시 시내버스를 타고 점심 전 벗어났던 걷기길로 되돌아와 가진항을 향해 걸었다. 해변을 지나 마을을 휘돌아 넘어 바다로 접어들어 호젓한 고개를 넘어가니 ‘가진해변 문어와 보쌈 - 황교익의 죽기전에 꼭 먹어야할 음식 101 방영’ 문어맛집이 기다리고 있다. 군침이 돌았지만 건봉사 답사하느라 늦었기에 패스, 가진항으로 들어갔다. 희고 잘 생긴 바위와 작은 동산은 철조망으로 차단돼 있다. 즉석에서 먹을 수 있게 멍게를 파는 가게 앞에서 소주 한잔하자는 길동무를 채근하여 발길을 돌리는데 가자미인지 생선을 손질해 실로 꿰매는 아주머니를 보면서 저거라도 한 두 마리 사갈까 하다가 그만둔다.

건봉사에서 쓴 시간을 조금이라도 벌충해야 되겠기에. 아름다운 가진해변을 뒤로 하고 공현진항으로 발걸음을 재촉하니 시원한 해변에 사자가 앉아있는 모습을 한 바위가 보이는데 가까이 가보니 앞면은 코가 큰 사람의 얼굴처럼 보이기도 한다. 사자바위 앞 바위는 공룡 같다고나 할까, 암튼 두 마리 짐승이 서로 마주하고 있는 듯 재미있는 모습이다. 나중에 들으니 이 바위가 옵바위, 이곳이 옵바위 해변이라네.

땅거미가 지기 시작한 공현진1리 마을에서 민박집을 찾아 두어군데 돌아 정했는데, 외관은 물론 객실도 호텔급이었다. 3만원씩 6만원인데 1만원 깎아서 5만원에 흥정을 했다. 길동무의 제안으로 마을안길 가게에서 햇반과 돼지고기 찌개거리를 사서 숙소에서 저녁식사를 했다. 길동무가 고집해서 산 소주 됫병을 거진 다 비웠다. 그런데 아뿔사, 이 친구 담배를 호드기 나발불듯하네. 그러면서 하는 말이 지가 코를 좀 고는데 어떡하죠, 한다. 이제 와서 뭘 어쩌라구! 속으로 못마땅했지만 웃고 말았다.

저작권자 © 충북인뉴스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