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사 격외도리/ 한덕현 충청리뷰 발행인

한덕현 충청리뷰 발행인

박근혜 전 대통령에 대한 검찰의 영장 청구는 어쨌든 국민들에게 큰 상실감을 안기고도 남는다. 이 것의 옳고 그름을 따지자는 게 아니다. 박근혜라는 개인의 잘 잘못을 되새기겠다는 의도 또한 아니다.

과거 권위·독재시대는 그렇다 하더라도 지난 세월 인명을 포함한 국민들의 엄청난 희생으로 쟁취한 민주주의, 민주국가 체제에서조차 우리가 직접 뽑은 민선 대통령들이 번번이 나락으로 추락하는 것에 대한 그 국민적 자괴감과 패배의식이 너무 크다는 것이다. 왜 우리는 이렇게 밖에 안 되는가라는 질문을 수도없이 되뇌게 되는 요즈음이다.

박근혜는 검찰에 출두하면서까지 끝내 국민들에게 사과하지 않았다. 비록 무죄를 주장할망정 본인 때문에 나라가 이 지경이 됐고 탄핵반대 집회에선 무려 3명이나 목숨을 잃었다면 다른 건 다 차치하더라도 지도자로서 책임을 피할 수 없다는 건 상식이다. 그런데도 그는 국민들에게 버림받아 탄핵당하고서도 여전히 승복하지 않고 있다. 무슨 자질을 논하기 전에 이는 인간성 본질의 문제를 따져야할 판이다.

여기서 우리가 주목할 것은 대한민국 통치자들의 비극적 종말, 그것도 계속 악순환으로 이어지는 국가적 난맥상이다. 이미 몇차례의 경험으로 인해 다시는 그러지 말자고 다짐했지만 한심하게도 지금 또 전철을 밟고 있다. 여기엔 분명 근본적인 원인이 있을 것이다.

이와 관련해 아주 오랫동안 보편적으로 제기됐던 것이 하나 있다. 반역사의 보복문화다. 역사의 변곡점마다 우리는 제대로 된 정리 한번 못하고 늘 자기모순에 시달렸다. 결코 자격이 되지 않는 사람들이 역사의 주체가 됐고 국가권력의 주인공이 됐다. 친일청산의 실패가 대표적인 사례다. 이 때 가장 부각되는 것이 이른바 승자들이라고 하는 사람들이 자기들의 정체성을 숨기기 위해 패자의 입지를 아예 인정하지 않는 독선과 기망이다.

역사는 승자들의 기록임을 백번 이해하더라도 우리는 민주국가 운영의 가장 기본이라는 패자의 승복문화도 부족했지만 그 보다도 패자에 대한 승자의 배려가 너무 참담했다. 승자는 아예 그 패배자의 뿌리까지를 뽑아 응징하려 했고 결국 그 패배자는 단지 한번 실패했다는 것만으로 모든 것이 매도되며 종국엔 인격적 사형선고를 받는다.

그러니 패자는 이 것을 뼈에 사무치는 구원(舊怨)으로 켜켜이 쌓아놓았다가 상황이 역전되면 보복을 가하는 동물적 야만성을 늘 숨기지 않았다. 그 엄중한 탄핵의 정국에서도 반성은커녕 올림머리에만 신경쓴 박근혜 식 오기와 처신은 이런 국가적 적폐를 고스란히 재연하는 것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다. 그는 이미 도도한 민심의 흐름에 승복하는 아름다운 패배자가 되기는 다 글렀다.

‘지구는 좌절의 별이다’ 이 말을 책의 첫머리에 쓴 볼프 슈나이더의 <위대한 패배자>는 역사적 인물은 물론이고 현대의 명망가들을 등장시켜 승부에서 진다는 것의 참 의미와 또 그것이 인류 문명에 어떤 순기능을 안기는지를 실체적 사실로써 증명하고 있다. 그는 “승리자들로만 가득찬 세상보다 끔찍한 것은 없다. 그나마 삶을 참을만하게 만드는 것은 패배자들이다”면서 “실패는 당신이 열등하다는 것을 의미하는 게 아니라 당신이 다시 출발해야 하는 이유를 의미한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패배자들은 우리가 인지하고 있는 영웅들보다 훨씬 더 깊고 광범위하게 세계사에 영향을 미쳤다고 주장했다.

체 게바라는 한 때 실패자의 낙오된 삶을 살았기에 나중엔 세계사를 다시 쓴 혁명가가 되었으며 고흐는 생전엔 단 한 작품밖에 팔지 못하는 별볼일없는 그림쟁이었지만 지금은 그 좌절의 대가로 세계인에게 영원히 추앙받는 화가가 됐다. 에디슨은 1400번의 실패 끝에 전구를 발명했으며 조앤 롤링은 첫 소설로 고작 5천달러의 선금을 받고 실패를 곱씹다가 끝내 <해리포터> 시리즈를 탄생시킨다. 만약 문재인과 안철수가 그들의 호언대로 대통령에 당선된다면 그 결정적 힘은 지난번 대선에서의 실패와 좌절일 것이다.

그렇지만 무한경쟁의 대한민국 사회에서 한번 패배는 곧 모든 삶의 끝장으로 단정되기 일쑤다. 요즘 한창 열을 올리는 5월 대선의 경선은 오로지 승자 한명만을 위한 잔치가 되어 2등조차 설 땅을 잃어갈 조짐이고, 멀쩡하게 대학을 졸업하고도 취직을 못한 젊은이는 단지 그 한가지 이유만으로 생을 포기하기를 주저하지 않는다.

주변은 온통 돈이 지배하는 세상이 되어 평생을 자기신념에 충실하며 살아온 이들까지도 수중에 돈이 없다는 죄(?)로 가정에서조차 낙오자로 멸시받는가 하면, 일상의 모든 것이 오로지 성공이냐 실패냐는 극단적 이분법적 논리로 재단되어 여기에서 밀리는 사람들은 곧바로 삶의 패배자로 치부된다.

하지만 우리는 실패할 확률이 더 높은 세상에 살고 있다. 그러기에 실패는 또 다른 기회의 이름이지 결코 막다른 골목을 의미하지 않는다. 모든 패배 속에는 오히려 승리의 가능성이 담겨 있다. 실패는 새롭게 출발할 기회, 그것도 좀 더 영리하게 다시 시작할 계기를 안긴다는 걸 잊어서는 안 된다.

이걸 더 명쾌하게 확신시켜주는 말이 ‘모든 것에는 끝이 있다’다. 좋은 일에도 끝이 있고 나쁜 일에도 끝이 있다. 실패로 인한 지금의 고통도 언젠가는 희망으로 대체될 수 있기에 그 어느 때보다도 ‘위대한 패배자’들이 간절해지는 요즈음이다.

그리고 그 간절함의 한 가지가 더 이상 친박들의 입에 무는 거품과 태극기 집회의 할배, 할매들을 그만 보았으면 하는 바람이다. 이들을 대할 때마다 나라가 너무 조잡하고 저열하다는 자책에 가슴만 답답하다.

이번 대선이 끝난 뒤의 ‘위대한 패배자’를 우리는 반드시 기억할 것이다. 그들에 의한 ‘위대한 대한민국’을 학수고대하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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